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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Jan 28. 2024

엄마, 제대로 해라

엄마 경력 1150일째



며칠 전 친구가 새해 목표를 물었다. 딱히 세운 건 없지만 내가 이번 학기 마음먹은 건 '바쁜 남편을 잘 도와주자'였다. 새해 목표라고는 그거 딱 한 개였다. 하지만 이런 모호한 목표를 세우고 내 마음은 매일 종이장처럼 팔랑 인다. 남편은 지금 하루종일 계속 뭔가를 하며 매일 지쳐 곯아떨어지고 물론 나도 남편에게 일을 미루는 것은 아닌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내가 조금 더 편하길 바란다.


오늘 결국 그 결과로 오래간만에 밤잠을 안 자고 다리 주물러달라고 쫑알거리는 이서에게 화를 냈다. 사실 오늘 내내 이서에게 무섭게 말했다. 하지 말라고 세 번 이상 말하게 하면 무조건 무섭게 목소리를 바꿨다. 밤 열 시가 돼가는데 결국 이서는 안 자고 이한이 분유는 부족해서 애들을 줄줄이 달고 부엌으로 내려와 분유를 더 타고 다시 방으로 가서 눕혔다. 이서는 혼나고 나니 역시나 장난기가 수그러들어 잠들었다. 그러면 나는 또 화가 난다. 잘 거면서 억지로 참고 엄마 화를 돋웠구나.


애들이 잠들고 나니 열 시가 넘었다. 나는 내일 교회에 다녀오면 또 엄청나게 젖병과 이유식 설거지가 쌓이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 나온 것들을 치우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남편은 우리의 첫 청년이었던 형제와 마지막 성경 공부를 마치고 조금 더 지나 들어왔다. 나는 부엌에 서서 이한이의 빨대컵을 사려 아마존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남편이 들어오고 한참 지나 그냥 부엌에 선 채로 "왔어?'하고 한마디 했다. 서로 보이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남편도 "어" 하고는 그대로 이층으로 가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부터 교회 일 하고 성경 공부 준비하고 하필 오늘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아 부랴부랴 네 가족이 옆집으로 가서 아이들을 씻기고 왔다. 피곤했을 테다. 집에 있었던 내가 나가 맞아줬어야 하는데 쫌생이처럼 마음이 찌그러들어 그러지 못했다.


무얼 할까 하고 추신수 선수 가족이 나오는 클립을 틀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추신수 선수와 그 아내 하원미 씨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십 대 초반 어린 나이에 만나 결혼하고 먼 미국 땅에 와서 가진 것 없는 젊은 선수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온갖 고생을 기꺼이 담당한 아내. 영상 속 그의 부엌은 깨끗했고 그가 차린 밥상은 수라상 같았다. 가족들은 거리낌 없이 서로 애정을 표현하고 스킨십하고 다정한 대화가 오갔다. 그리고 추 선수는 함께 밥을 먹으며 첫째 아들이 룸메이트와 잘 지내기가 힘들어 다음에는 혼자 살고 싶다고 조심스레 말하자 혼자 사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한다. 대화로 잘 해결해 가야지 피하기만 해서는 어떤 사람과도 잘 지내기 어렵다며 말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늘 말했던 대로 '하기 싫더라도 해야 하는 일이면 제대로 해라.'


아, 저거구나. 저게 바로 저 부부가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구나. 저게 바로 나의 남편이 지금 해내고 있는 일이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구나. 나는 엄마가 됐고 엄마의 삶에는 하기 싫은 일이 지천에 널렸다.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배워야 할 아이는 자기의 타고난 죄성대로 살고 싶어 한다. 그 애와 나의 죄성이 부딪힌다. 집안일은 시작과 끝이 없어하고 돌아서면 다시 생겨나고 내가 치우면 뒤에서 두 아이가 다시 늘어놓는다. 이 기분은 마치 페이퍼를 다 썼는데 지워져서 다시 쓰면 또 지워져 버리는 기분이다. 매일 반복해도 해결되지 않는 일들. 이거야말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잘 해내고 싶기도 하다. 아이들을 놀아주며 부지런히 정리도 하고 끼니마다 아이들이 밥 먹은 자리에 초토화되는 부엌도 쓸고 닦는다. 조금이라도 정리된 삶을 살고 싶어 서랍도, 찬장도, 창고도 짬짬이 정리를 하고 있다. 건강한 식사를 준비하고 싶고 이서와 이한이에게 다양한 식재료를 맛보게 해주고 싶다. 여기 온 뒤로 알레르기가 생겨서 먼지도 잘 닦아야 하고 가습기도 닦고 말리고 네 가족이 되니 빨래도 자주 쌓여 부지런히 해야 한다.


동시에 이렇게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바쁘게 움직인다 해서 집은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그중 내려놓을 것들을 생각하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요 며칠 나의 우선순위는 정리와 청소였다. 나는 이서에게 대답하면서도 눈을 보지 않고 설거지를 하거나 바닥을 닦았다. 이서는 눈 떠서 잠들 때까지 엄마에게 말하기 때문에 그 말을 귀히 여기지 않은 탓도 있다. 다음 주 나의 목표는 이서, 이한이와 조금 더 교감하는 거다. 바쁜 것은 내려놓고 같이 천천히 하자. 다시 천천히 움직이는 연습을 하는 거다.


오늘 이서에게 못된 엄마였던 걸 반성한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는데 나는 자주 사랑하는 이들에게 무례해진다. 이건 내가 고쳐야 할 평생의 문제다. 그러나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내가 나와 남편과 이서와 이한이에게 주는 사랑이 그러기를 다시 한번 기도한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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