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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Jul 29. 2024

온실 속 화초



밤마다 아이들이 잠들 때까지 어둠 속에 같이 누워서 이런저런 기도와 생각을 한다. 잡다한 생각들,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맘껏 생각하기도 하고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다 생각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어느 날은 옛날 일을 생각하다가 문득 알아챘다. 나는 온실 속 화초로 자랐다. 물론 그 온실이 부유해서 거대하고 휘황찬란하지는 않았다. 우리 집은 적당히 잘 살던 시절도 있고 추위와 더위를 버텨야 했던 시절도 있다. 하지만 작거나 약해도 온실은 온실이었다. 사시사철 피고 지기를 반복할 수 있는 곳. 누군가 온습도를 적당히 유지해 주고 잡초도 뽑아주고 바깥바람이 들지 않도록 문틈을 잘 막아 시들면 다시 살려주고 꽃 피우면 예뻐해 주는 곳 말이다.


우리 집에는 대단히 좋은 차는 없었어도 아빠는 털털거리는 고물 차를 끌고도 꼭 약속 시간 십 분 전이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른 여섯 시든, 밤늦은 두 시든 어디든 필요하면 자다 깨거나 자지 않고 기다렸다가 데리러 왔다. 사업을 정리하고 빚을 피해 도망치듯 이사 간 시골에서는 버스가 두 시간 반 만에 한 대가 들어왔다. 아빠는 위험하다며 정류장까지 같이 걸어가 버스가 출발할 때까지 유리창 옆에 서서 웃었다. 대단한 과외는 못 붙여줘도 기술 시험을 준비할 때는 아빠네 공장에 데려가 부품들을 직접 보여줬고 한문 시험을 준비할 때는 서당에서 조기 교육받은 아빠의 오랜 지식을 총동원해 도왔다. 무엇보다 시험이 닥쳐 새벽까지 공부할 때면 아빠는 내가 외로울까 괜히 할 일을 만들어 깨어있곤 했다. 나는 내 방에서 공부하면 아빠는 거실 불을 환하게 켜두고 책을 읽었다.


엄마는 아빠가 사업을 정리하고 한동안 헤맬 때 엄마는 약한 몸을 끌고 나가 생계를 책임졌다. 어릴 적부터 타고나길 약한 몸이라 일을 다니며 밤마다 그렇게 몸이 아파 약을 달고 살았다는데 나와 동생은 까맣게 몰랐다. 아빠는 된장찌개랑 계란찜밖에 할 줄 몰라서 밥도 구 할은 엄마 몫이었다. 내가 학생일 때는 집에 에어컨이 없던 시절이라 엄마는 선풍기를 틀고 부엌에 서 있었다. 그마저도 선풍기 바람에 가스레인지 불이 약해질까 등 뒤로만 바람이 불게 두고 허리춤에 손을 얹고 선 엄마가 떠오른다. 이마에는 땀이 맺혔다.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무기력증에 빠졌을 때도 나를 붙들고 이곳저곳 찾아다녔다. 나는 청소년 전문 상담가도 만났고 정신의학과에도 다녀왔다. 한창 통장이 가벼워져 천 원 한 장도 고심하며 쓰던 때였는데 엄마는 일주일 치 오만 원이나 하는 우울증 약을 턱 샀다. 엄마는 편견 없이 나를 낫게 하는 데에만 힘썼다. 나는 약 한 알을 먹고는 기분이 나아졌다. 나아진 내 마음에 엄마 마음이 전해져 그 후로는 약을 먹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지금 나는 남편이 만든 온실에 산다.


나는 이십 대 후반에 결혼을 했고 아빠가 먼저 떠난 후에 나는 오래 슬펐다. 아빠가 주던 사랑이 사라지니 어디든 언제든 빈 것 같았다. 지금 보니 나는 내 온실이 없다고 느꼈던 거다. 남편은 내 생각과 감정에 관심이 없는 듯했고 결혼 생활 중 여러 어려움을 지나며 남편과 내 마음은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붙여보려 자꾸 남편을 재촉했다. 남편은 준비되지 않은 서로의 마음을 침묵으로 덮었다. 이런 균열은 육아에 돌입하면 더욱 빠른 속도로 갈라진다. 우리의 싸움은 길고 깊어져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순간도 있었다.


남편은 실용적인 사람이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에게 기대한 것도 내가 시간을 잘 지키고 살림과 육아에서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이었다. 나는 낭만적인 사람이라 상대의 실수를 잘 넘겨주고 함께 보내는 시간을 중요시한다. 나는 나대로 남편이 나에게 원하는 것들이 힘들었고 내가 원하는 것은 해주지 않아 늘 불만이었다. 오랫동안 한숨과 포기가 이어졌다. 서로를 무너지게 하고 더 무관심해지기도 했다. 남편이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적어 나는 그동안 많은 것을 오해했다. 나는 조금씩 변했다. 결혼 생활이란 서로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상대가 나에게 주는 것을 발견하고 고마워하는 것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남편이 나에게 해주는 것을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의 언어를 해석하는 거다. 외국어를 배우듯 노력하니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의 사랑 표현은 이런 것들이다. 이서와 내가 비눗방울 총을 시도해 보려 신나서 밖에 나갔는데 알고 보니 건전지를 넣어야 했다. 건전지를 넣어야 한다는 말에 남편은 수업을 가려다 말고 드라이버를 가져와 열고 손수 건전지를 넣어주는 거다. 그리고 제대로 비눗방울이 나오는지 밖에 서서 확인하고 학교에 간다. 남편이 설거지를 해두면 그게 나를 사랑한다는 표현이다. 빨래를 접으면, 아이들을 씻기면, 가끔씩 밥을 차려주고 그럴 힘이 없을 때는 내가 요리를 쉬도록 외식을 하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다. 일을 마치고 그 앞에 이서를 데리고 가 있으면 삼십 분 함께 놀고 집에 오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다. 영어로 공부하는 것만도 힘든데 시간을 쪼개고 쪼개 일하고 재정에 필요한 것들을 발로 뛰며 해결하고 공부를 해내는 것도 사랑이다. 실용적인 자신의 생각을 깨고 조금씩 나의 행동과 언어를 익혀가는 것도 그의 노력이고 사랑이다.


그렇게 조금씩 시선을 바꾸니 그가 만든 온실이 보였다. 남편은 유학생활 내내 식당이나 학교 호텔에서 일했고 그건 하고 싶은 일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일이었다. 수많은 유학생 아내들이 숨어 일했지만 남편은 우리가 돈이 없어 궁지에 몰릴 때마다 일을 찾겠다는 나를 조금 기다려보자며 말렸다. 유학지에 와서 가난하고 외롭고 삼시세끼 밥 차리고 몸이 아파도 아이들 맡길 곳이 없다며 이 시간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찾지 못해 툴툴댔지만 사실 평탄하게 살았다. 남편이 비바람을 다 막고 있었다. 나는 왜 남편이 이 생활을 함께하는 나에게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남편이 부지런히 사는 하루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요새 남편에게 이 집이 온실 같기 바라며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당장 바꿀 수 없는 우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열심히 아이들을 키우고 집을 쓸고 닦고 밥을 차린다. 집안일과 육아를 해내는 것은 보상도 없고 힘에 부치는 일이지만 남편은 내 노력을 알아보는 사람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들도 한다. 다정하게 배웅하고 맞아주는 일, 친절하고 웃기게 말하고 남편의 고생을 알아주는 일. 부부만의 시간이 서로에게 어떤 행복을 주는지 알려주는 일. 우리는 늘 바쁘고 돈도 시간도 빠듯하게 살지만 한 번 더 부지런을 떨고 틈이 나면 온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아껴주고 있다. 우리가 서로에게 따뜻한 집을 만들어 주면 그 안에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자연히 그것을 느끼며 자라지 않을까 꿈꿔본다.


하루는 이한이 카시트를 설치하는 법을 몰라서 남편에게 알려달라고 하니 어차피 알려줘도 내가 하기 어렵다며 안 알려준다. 결국은 다 자기 몫이다. 내가 손목이 약해서 생수도 매번 남편이 옮기고 미국 와서는 세금 신고도 주유도 세차도 다 본인이 하는데 나는 그게 편하면서도 가끔 좀 겁이 난다. 그래서 그날 자려고 누워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는 진짜 나보다 오래 살아야 돼. 나는 자기가 다 해주는데 자기 없으면 애 둘 데리고 어떻게 살아. 혼자 카시트도 못 끼는데.." 그랬더니 남편은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웃어버리고 여느 때처럼 금세 잠들었다. 나는 진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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