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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Nov 02. 2024

경력자의 미덕

엄마 경력 1429일째



날이 갑자기 다시 더워졌던 가을날이었다. 나는 이서와 이한이를 데리고 이 마트 저 마트 돌며 장을 보고 있었다. 여기서는 한 곳에서 필요한 것을 다 사기 어려워 필요한 것들을 다 사려면 여러 마트를 다니는 날이 많다. 벌써 세 번째 마트였다. 나는 아이들을 세 번째 카시트에 태우고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날도 덥고 이쯤 되면 몸에 진이 빠지곤 한다. 이한이가 벨트를 매기 싫다고 몸싸움을 하거나 이서가 주차장에서 위험한 행동을 하려 할 때 끝까지 화내지 않고 집에 가는 것이 엄마의 소원이자 할 일이다. 마지막 마트 일과를 마치고 카트를 잠시 차 앞에 세워두고 장본 것을 차에 실은 뒤 이서가 자기 카시트에 앉는 동안 이한이를 태우고 안전벨트를 껴주고 있었다. 이서의 벨트를 마무리해 주려 반대편으로 돌아가는데 옆 차에 짐을 싣던 한 여성분이 활짝 웃으며 내가 바쁘니 대신 카트를 옮겨주겠다고 했다. 그에게 고맙다고 외치는데 나도 모르게 활짝 웃게 됐다. 그분은 돌아오며 다시 활짝 웃었다. "You're doing great, mom!(잘하고 있어요, 엄마)"하며 엄지 손가락을 올려 보였다. 돌아오는 안에서 아이들은 고개를 꺾고 잠들었다. 나는 백미러로 아이들이 자는 보고 노랫소리를 줄였다. 마음속으로 말을 떠올렸다. Doing great, mom! 이서와 이한이의 엄마, 잘하고 있다! 잘하고 있다는 짧은 말에 마트 돌아다녔던 것도 잊게 힘이 났다.


미국 남부에 속한 여기 켄터키 주는 대도시와 달리 오가며 보는 낯선 이와 짧은 인사와 눈짓을 주고받는다. 아이가 없을 때는 길에서도, 심지어 신학교 안에서도 나를 피하는 사람들을 느끼기도 했는데 아이와 같이 길을 다니면 인종에 관계없이 모두가 친절하다. 유모차를 밀고 다니면 마주 오던 사람이 먼저 길을 비켜주고 누군가 얼른 뛰어가 문을 열고 잡아주고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귀여워해주고 아이들이 떨어뜨린 물건을 주워주고 무언가 직접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 때문에 인내심이 필요한 순간에도 웃으며 천천히 하라고 격려해 준다. 특히 아이들이 예뻐 보이고 싶어 잔뜩 멋 부리고 다닐 때는 아이가 입은 드레스나 장식을 엄청난 리액션으로 칭찬해 주는 이들을 꼭 만난다. 그게 좋아서 이서는 집 근처 마트에 갈 때도 차려입곤 한다. 신기하게도 여기서 마주치는 이웃들은 일정 선을 절대 넘지 않는다. 내가 묻기 전까지는 조언을 하지도 않고 아이를 만지지도 않고 나를 불쌍한 눈길로 보지도 않고 그저 활짝 웃으며 도와준다. 내가 길에서 자주 듣는 말은 딱 세 가지다. So cute(귀엽다), Your hands are full(빈 손이 없으니 돕겠다), Doing great, mom(엄마, 잘하고 있어요)!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서 어린아이를 돌보느라 바쁜 엄마가 있으면 우리 엄마들은 그 엄마를 꼭 쉬게 한다. 어린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오면 돌아가며 안고 트림을 시키고 그 엄마가 편하게 밥을 먹도록 아이를 돌봐준다. 때마다 불러 밥을 해 먹이고 외로울까 들여다보고 만나서 함께 산책하고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힘든 느낌이 조금 덜어지고 모두가 이런 시간을 지났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면 내가 지금 지나는 이 어려움이 조금 덜 특별해진다. 엄마는 매일 다른 이유와 크기로 힘든데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받은 배려가 그날의 작은 위로가 된다. 특히 먼저 자녀를 키워본 선배 부모들은 남녀노소 작은 도움을 주며 말한다. 이때가 그립다고. 그러면 지쳐서 동태눈으로 아이들을 보며 친절 기계처럼 말하다가도 정신이 번쩍 든다. 엄마는 매일 다른 이유와 크기로 행복하기도 하다는 걸 생각한다. 젊은 부모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후배 부모의 노고를 안다. 그리고 이 바쁘고 복잡한 삶이 얼마나 값진지도 안다. 그렇게 내 손이 비었을 때 빈 손 없이 바쁜 부모에게 잠시 손을 내미는 것이 경력자의 미덕일 것이다. 그러니 나도 이 시간을 잊지 않고 내 눈에 불편한 것을 말하는 것은 잠시 참고 그저 작은 도움을 주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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