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 주(酒)저리 주(酒)저리-220
최근 우리나라의 술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통계에 따르면, 1973년 한국의 1인당 연간 주류 소비량은 16.8L로,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이었다. 이후 1987년까지는 10.2L로, 매년 10L를 꾸준히 넘겼다. 그러나 최근 주류 소비 형태가 달라지면서 2021년 기준 우리나라 15세 이상 인구의 1인당 연평균 알코올 섭취량은 7.7L로, OECD 평균인 8.6L보다 낮은 수준을 보였다. 이는 와인이나 맥주를 식사와 함께 음료처럼 즐기는 유럽 국가들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반면 한국은 식사보다는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회식 한 번에 소비되는 주류의 양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물론 과거에 비해 회식 문화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술은 회식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음료다.
이처럼 술을 많이 마셔온 나라인 만큼 사회적 문제도 뒤따랐다. 특히 한국의 음주문화를 말할 때는 폭탄주와 술 강요 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폭음, 회차 문화, 술잔 돌리기 등도 대표적인 술자리 특징으로 꼽힌다. 일반적으로 ‘폭탄주’란 서로 다른 술을 섞어 마시는 방식을 말하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소주+맥주)’이 있다. 그러나 소맥 외에도 위스키, 양주, 막걸리 등 다양한 조합이 존재해 왔다.
폭탄주 문화는 단순히 분위기를 띄우는 수단이 아니라, ‘술을 마시게 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는 특징이 있다. 특히, 폭탄주는 ‘원샷’을 해야 하는 강요 문화와 맞물려 있었다. 한 번 잔을 들면 끝까지 비워야 했기 때문에, 개인의 컨디션에 맞춰 조절하며 마시기 어려웠다. 다행히 최근에는 혼술·홈술 문화의 확산과 함께 사회 인식이 변화하면서 폭탄주 문화 역시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한때 집단 중심의 문화로 굳어졌던 폭탄주가 개인의 주량과 취향을 존중하는 흐름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매우 의미 있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폭탄주를 마시기 시작했을까? 현대 폭탄주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한 설에 따르면 20세기 초 미국의 부두 노동자들이 적은 돈으로 빠르게 취하기 위해 값싼 위스키와 맥주를 섞어 마신 것이 시초라고 한다. 또 다른 설은 같은 시기 러시아의 벌목공들이 시베리아의 혹한을 견디기 위해 보드카와 맥주를 섞어 마신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1983년 강원도 지역의 군·검찰·안기부·경찰 기관장 모임에서 처음 폭탄주가 만들어졌고, 이후 전국적으로 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최근 확인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폭탄주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진건의 소설 『적도(赤道)』(동아일보, 1933.12.20.~1934.6.17.)에 폭탄주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1934년 1월 16일자 『적도』(1) 제22회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중략) 어젯밤 명월관 본점에서 맥주에다가 위스키를 타 먹은 탓인지, 눈을 뜨자마자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었다. (중략)」
병일이라는 인물이 명월관이라는 고급 요릿집에서 맥주에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장면이다. 비록 신문 연재 소설의 한 대목이지만, 이러한 묘사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이미 폭탄주 문화가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문 소설 속에는 위스키를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 ‘모던보이’라 불리던 젊은 세대는 카페에서 맥주와 양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고, 레스토랑에서는 카레라이스(라이스 칼)를 주문해 먹었으며, 바에서는 위스키를 즐겼다는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맥주와 위스키는 당시에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상류층이라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술이었다. 다만 1934년에 쓰인 소설 속 위스키는 일본이나 유럽에서 수입된 제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당시 수입품 가운데 위스키(양주)는 569석(1석=180L)이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 맥주는 국내 생산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933년 대일본 맥주 주식회사가 서울 영등포에 ‘조선맥주’를 설립했고, 인근에는 ‘쇼와기린 맥주’ 공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스키에 맥주를 섞어 마시는 문화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당시는 일본 식민지 시기였던 만큼, 문화의 상당 부분이 일본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일본에는 맥주(ビール)에 위스키(ウイスキー)를 섞어 마시는 음주 문화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1923년 산토리(당시 寿屋)가 야마자키 증류소를 세우고, 1937년 ‘가쿠빈(角瓶)’을 출시하면서 일본 위스키의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와 함께 요코하마·고베 같은 외국인 거주지와 긴자의 바(Bar)를 중심으로 서양식 칵테일 문화가 확산했다. 그 결과, 서양에서 유행하던 맥주에 위스키를 섞어 마시는 ‘보일러메이커(Whisky + Beer)’문화가 일본 상류층과 외국인 전용 호텔·바를 통해 전해졌다. 물론 이러한 음주 문화가 당시 상류층이나 외국인 사회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점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후 일본은 1950년대 이후에 저렴한 일본 위스키가 대량으로 보급되었다. 원래는 맥주에 소주, 청주를 섞던 비일割り(비루와리) 문화가 있었는데, 거기에 위스키도 포함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보일러메이커(boilermaker)’ 역시 그 기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명확한 정설은 없다. 다만 보일러메이커는 탄광, 부두, 벌목장 등 노동 현장에서 힘든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값싸고 빠르게 취하기 위해 즐기던 술로 알려져 있다. 대중적으로는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금주령이 내려졌던 1920년대 후반, 미국 몬태나주의 시골 마을 밀주집에서 두 형제가 만나는 장면이다. 늦게 도착한 형 노먼(크레이그 셰퍼)이 카운터에 앉아 술을 주문하며 말한다.
“Give us a couple of boilermakers, friend!” (주인장, 보일러메이커 두 잔 부탁하네)
이처럼 여러 근거를 제시하더라도 폭탄주의 정확한 뿌리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 노동자들의 보일러메이커 음주 방식이 일본으로 전해지고, 다시 일본 상류층을 거쳐 외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던 우리나라의 ‘모던보이’ 세대를 통해 상류 사회로 확산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이처럼 미국의 보일러메이커라가 음주법이 일본의 위스키비루를 거쳐 조선(대한민국)의 폭탄주로 시대적인 변화를 거쳐 왔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폭탄주와 폭음 문화가 곧 한국의 전통 음주 문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본래 한국에는 계절마다 술을 빚어 풍류로 즐기며, 절제된 음주 문화를 이어온 오랜 전통이 있었다. 또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같이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으로 모시고 예를 다하는 음주 의식도 존재했다. 연말연시가 다가오면서 모임이 잦아지는 시기다. 그러나 연말의 들뜬 분위기에 취해 몸을 해칠 정도로 술을 마실 필요는 없다. 이제 술은 ‘대화를 이어주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체’, 즉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도구로 자리 잡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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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소믈리에타임즈에 게재한 컬럼입니다.
https://www.sommelier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297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