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인 Sep 04. 2023

나를 나로 자유롭게 할 길, 너를 나로 가두지 않길

이혜정, ⟪길 위의 아이⟫


수많은 길이 얽히고설킨 ‘땅 위의 섬’. 누가 만들었는지,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 기원과 역사 모두가 수수께끼인 이 미로 도시에 한 아이가 살고 있다. 누군가의 따듯한 관심과 다정한 돌봄 없이 길에서 홀로 나고 자란 아이. 그러나 남들보다 작은 몸집의 아이는 길 위의 다른 아이들에게서 자신의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다. 너는 우리와 함께 도둑질할 수 없을 거야. 너는 우리처럼 재빨리 도망칠 수 없을 거야.


살면서 그 언제와 어디에서도 따스한 인정과 격려를 받아 본 적 없는 아이. 보이는 길 위에 남들과 함께 서 있을 수 없는 아이. 숨겨진 길 위에 나 홀로 서 있어야 하는 아이. 아이는 애써 자신을 토닥인다. 괜찮아. 괜찮아. 내 발로 골목길 속의 골목길을 찾아 그 길을 내 길로 만들 거야. 내 걸음으로 내 길을 걸어서 이 섬의 출구를 찾아낼 거야.


그렇게 혼자 씩씩하고도 쓸쓸하게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던 아이에게 아이와 비슷한 모습과 처지의 ‘너’가 다가온다. 홀로여서 외롭고 힘겨웠던 아이의 삶은 ‘함께’라는 붓으로 그려진 새롭고 다양한 길로 뻗어간다. 나는 ‘너’의 그림자, ‘너’는 나의 그림자가 된 듯한 기분으로 같이 걸은 길. 서로를 지키고 붙잡으며 용기 내어 건너는 길. 적적하지 않은 길 위에서, 막막하지 않은 밤 안에서 두 사람은 함께 상상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미로 도시의 출구를 이 길 끝에서 만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언제까지나 우리는 우리가 찾고 그려낸 이 길 위에서 함께일 수 있기를.




나를 나로 자유롭게 할 ‘길’을 찾고 걸어가는 긴 여정을 3부에 걸쳐 그려낸 ⟪길 위의 아이⟫. 길 위에서 마주하고 경험했던 모든 순간을 통해, 길 위에서 함께 하고 떠나보냈던 모든 인연을 통해 길 위의 아이는 자신의 진심을 마주하고 관계의 진실을 이해하며 인생의 진리를 체득해 나간다.


인생을 ‘길’로 비유하며 저마다의 같지만 다른 삶을 사유한 다양한 그림책을 만날 수 있는 요즘. 그래픽 노블의 형태를 취한 ⟪길 위의 아이⟫ 또한 삶의 여러 순간과 장면을 다양하게 은유하며, 내가 나로 자라가고 나아가는 ‘성장 서사’를 담고 있다. 제 길이 될 수 없는 세상의 수많은 길 밖으로 밀려난 작은 아이의 작은 그림자. 제 것일 수밖에 없어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삶의 고뇌와 고난들로 가득 채워진 검은 구멍. 같은 마음으로 같은 출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였던 우리의 맞잡은 손. 그러나 점점 작아져가는 서로의 겹쳐진 그림자. 점점 멀어져 가는 각자의 선명한 발자국・・・・・・. 128컷에 걸쳐 펼쳐지고 모아지고 흩어진 이야기는 세상의 수많은 길 위에 내가 끼어들 틈 하나 찾지 못해 아파하는 모든 마음에 공감한다. 인생의 숱한 만남과 이별 속에서 나의 두려움이 너의 호기심이 될 수도, 나의 도전이 너의 불안이 될 수도 있음을 이해하려 애쓰는 모든 걸음과 공존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따로 또 같이 걸어가는 모든 단음과 화음에 공명한다.


어찌 보면 뻔하기 쉬운, 그러나 어찌 보면 언제나 절실할 수밖에 없는 ‘인생길’이란 주제를 담은 이 작품을 비슷한 주제의 다른 작품과 구별 짓는 요소는 바로 ‘핑크’와 ‘코발트블루’로 드러나는 두 가지 색이 아닐는지. 다양한 색의 물감이 만나 섞이는 긴 과정 속에서도 두 가지 색은 섞이지 않았다. 섞일 수 없었다. 동행이 곧 섞임으로 이어져 새롭고 풍부해진 다양성을 드러내는 작품이 있고, 동행에도 섞이지 않고 뚜렷하게 구분되는 개별성을 드러내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나의 길은 대체로 어둡지만, 가끔씩 나와 다른 당신들을 만나 환해지는 순간들 덕분에 내가 나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작품. 그리하여 이 고적한 인생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다고 응원하는 작품.



나를 나로 자유롭게 할 이 길이 너를 내게로 가두는 길이 되지 않기를 바라게 된 두 색의 두 사람.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길을 각자의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겠지. 자신의 분명한 색을 잃지 않고서. 둘이 함께 변하고 자라 가고 나아갔던 기억을 잊지 않고서. 같이 쌓았던 추억에 가끔씩은 기대어 가면서・・・・・・.




이혜정 작가님의 전작 ⟪...라고 말했다⟫ 가 두더지, 홍학, 양, 박쥐, 고슴도치, 곰 등의 동물들에게서 나의 길을 나답게 걷는 방법을 묻고 듣고 배우는 장면을 담은 그림책이었다면, 신작 ⟪길 위의 아이⟫는 나의 길을 나답게 걷는 방법을 각자의 길 위에서 스스로 깨우치고 부딪히며 알아가는 과정을 담은 그림책(이자 그래픽 노블)이었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가 독자에게 인생의 정답을 말하기보다 ‘독자와 함께 인생의 정답을 찾아가는 작품’으로 내게 와닿았다는 점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두 권의 그림책을 함께 펼치고 만나는 동안, 작가님의 이름 옆에 ‘익숙한 기법과 색다른 구성, 다양한 아이디어로 인생을 깊게 은유하고 짙게 사유하는 작가’라는 코멘트를 적어두었음을 밝히면서.


* 이혜정, ⟪길 위의 아이⟫, 길벗어린이, 2023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구원이 되어준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