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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bricks Jul 28. 2020

고산자는 어떻게 군사기밀 지도를 볼 수 있었나?

<고산자 이야기> - 2

고산자는 평민 출신이다. 신분제가 엄격했던 조선 초 보다는 심하지 않았겠지만,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하더라도 관직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지도를 보는 것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 항공 사진도 없던 조선 시대에 고산자가 어떻게 <대동여지도>와 같은 비교적 정확한 지도를 그릴 수 있었을까? 1편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선대에 만든 훌륭한 지도와 지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지리정보에는 한계가 있었고, 고산자는 지금처럼 자료만 펼쳐놓고 지도를 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판각본이 여러 벌이 발견되어 일부 지역은 판본별로 다소 차이가 있는데, 아마도 잘못된 부분을 고쳐 다시 판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불분명한 자료라던가 누락된 곳은 고산자가 직접 답사를 하며 수정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이 부분도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고, 이번 편에서는 고산자가 평민 신분으로 당시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자료들을 어떻게 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고산자가 조선의 정확한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가 남겼거나 남긴 것으로 보여지는 여러 결과물을 보면, 그의 판각 솜씨나 청구도, 동여도 등을 통해 가능한 정확하게 제작하려한 흔적들이 이를 입증한다. 하지만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려웠을 것이고, 그의 인맥이 지도 제작에 크게 기여했다.


고산자의 인맥을 살펴보면, 고산자와 오랜 시간 친분을 유지한 사람이 당대 유명한 실학자인 최한기이다. 최한기는 양반 출신이지만, 그 당시 집안에 큰 벼슬에 오른 인물이 없었고, 아버지가 그의 나이 10세 때 요절해 큰집 종숙부의 양자로 입적돼 숭례문 근처 창동(倉洞)으로 이사해 살았다. 고산자의 집은 약현(만리동)이었으니 관심사와 연배 비슷한 고산자와 동무가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고산자가 평민이지만, 최한기의 인품상 허물없이 지냈을 것이다. 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지구전후도>다. 이 지도는 중국에서 건너온 서구식 세계지도인데, 최한기가 이것을 구해와 김정호에게 판각을 맡겼다고 한다. 이 때가 1843년, 고산자가 마흔쯤 되었을 때다.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 신헌이라는 무신이다. 신헌은 외교관으로 주로 활동을 했는데, 어릴 적 스승이 정약용과 김정희다. 두 분의 제자라는 것만으로도 신헌이 현실에 밝은 식견을 가졌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전라도에 근무할 때 초의선사와도 교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그의 식견과 사상은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이때가 대략 1850년 후반으로 신헌이 헌종 승하와 관련한 유배에서 풀려난 직후인 듯 하다. 그의 유배생활은 김정호를 만나게된 결정적 계기가 된다. 


사실 신헌은 헌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헌종이 위독할 때 그가 사사로이 의원을 데리고 들어갔다가 얼마 뒤 왕이 승하하게되자, 안동김씨 세력에게 배척을 받고 유배를 가게된 것이다. 잘 알려진 바, 헌종은 안동김씨인 할머니와 풍양조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괴롭힘을 받은 세도정치의 대표적인 피해자 중 한 사람으로, 안동김씨 세력은 철종 즉위 후 그를 전라도로 유배 보낸다. 이때가 풍양조씨 세도의 중심에 있던 신정왕후(조대비 엄마)의 세가 꺾일쯤이었는데, 안동김씨에 의해 유배를 가게된 그로서는 당연히 김씨 일가와 멀어지게 되었고,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신정왕후와 연이 있었던 이하응(흥선대원군)과 친분을 갖게된다. 이어 관계를 좀 더 확고하게 다지기위해 신헌은 고산자에게 많은 자료를 제공하여 당시까지 볼 수 없던 최고의 지도를 만들어 윗선에 선물하게 된 것이다. 이때 지도가 <동여도>인지 <대동여지도>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이런 스토리 전개로 봤을 때 이하응에 의한 <대동여지도>의 '판목소각설'은 잘못 전해진 것이라 하겠다. 

(신헌과 관련된 이야기는 많지만 이정도로)


마지막으로 알려진 인물은 최성환이라는 인물인데,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고, <대동지지>와 <여도비지>라는 책에 고산자와 공동저술자로 이름이 남아있는 것이 전부다. 규장각에서 근무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 고산자가 그에게서 여러 물리적인 도움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까지는 실질적인 재정적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몇 년 전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영화는 매우 실망스럽다. 위와 같은 잘알려진 사실조차 왜곡하고 있고, 정교한 지도 제작 기술보다는 고산자를 희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이다. 제작의도가 의심스럽고 참담하다. 첨부한 대동여지도의 금강산 부분을 보자. 금강산에는 여러 사찰과 암자들이 많았는데, <대동여지도>에는 5개 사찰이 표시돼 있다. 백두대간 능선을 기준으로 서쪽이 내금강(노란색 부분), 동쪽이 외금강(녹색 부분)으로 불려, 내금강에 정양사, 표훈사, 장안사가 있고, 외금강에는 신계사, 유점사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 일만이천봉을 모두 표현하지 않았지만 금강산의 수려한 풍광과 지리 정보를 세세하게 묘사하려한 고산자의 고집과 노력이 엿보인다. 


이러한 지도를 만들 수 있던 것은 군사기밀 지도를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신헌과 앞서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지도 제작에 관여한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과연 <대동여지도>를 실물로 보았을까? 백두산과 금강산만이라도 꼼꼼히 살폈더라면, 영화를 그리 가볍게 만들지는 못했을텐데. 고산자와 그의 지도에 대해, 그에게 도움주었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제대로 된 이야기로 전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매우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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