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자 이야기> - 1
이 글은 이전에 저의 페북에 올린 피드를 가져와 고쳐 쓴 것 입니다.
고산자는 김정호의 호 입니다.
조선은 쿠테타로 세워진 나라다. 기울어져가는 고려를 당시 불만이 많았던 군인들이 명분없이 낼름 삼킨 것이다. 새롭게 나라를 세운 조선은 체계적인 지방의 관리를 위해 고을의 지리 정보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당시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지도는 많았지만, 고을이나 읍성에 대한 지리 정보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종 지리지를 쓰고 읍성 지도를 그려 중앙정부에 바치도록 했다. 현재도 일부 지리 정보는 국가 보안 상 감춰져있지만, 당시엔 이런 자료는 극비에 해당됐다. 그렇게 수 십년 간 지리 정보를 모으고 편집해 집대성한 것이 <세종실록지리지>다. 이 지리지는 조선 건국 이후 의욕적으로 진행되다가 여러 권력 다툼으로 흐지부지되어 자칫 창고에 묻힐 수 있었던 것을 세종이 집권하면서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실록지리지>는 고산자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세종실록지리지>는 그야말로 한반도 구석구석 지리 정보를 집대성한 (적어도 현재까지는) 우리나라 첫 지리백과사전이다. 이 책에는 각 지역의 지도와 함께, 고을의 지리적 특성과 토산물 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는데, 이 정보들을 기반으로 정치, 군사,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데 참고할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 초에 이미 한반도에 대한 자세한 자료가 있는데, 익히 알려진 것처럼 과연 고산자가 백두산을 수 차례 오르며 지도를 그릴 필요가 있었을까? 이 전설같은 이야기는 당시 일제가 조선의 측량 기술과 정보력을 폄하하기 위한 간계였다는 것이 학계 정설이다. 조선은 무식해서 직접 발로 뛴다는 일본의 야로(?)가 있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전설이 수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것이다.
그럼, <세종실록지리지>만으로 고산자가 지도를 그렸을까하는 의문이 있겠지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조선은 지리 정보를 구축하는데 비교적 적극적이었고, 우리에게 많은 유산을 남겼다. 조선 초기부터 구축한 정보를 기반으로 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지리지와 지도, 그리고 <산경표>라는 한반도의 지형을 대간과 정간, 정맥으로 구분해 기록한 책이 있었고, <대동여지도>와 비슷하게 생긴 <동국대지도>라는 전국도를 비롯한 다양한 축적의 읍성 지도들이 있어 고산자가 백두산을 여러 차례 오르지 않아도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지리 정보는 고급 정보에 해당해 평민이었던 고산자가 쉽게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언급하겠다.
첨부한 그림은 대동여지도의 백두산 부분이다. 당시에는 '천지'를 '큰 연못'이라는 의미로 '대지(大池)'라 불렀던 듯. 대대로 영산으로 섬겼던 높고 웅장한 백두산의 모습에 제법 신경 쓴 모양새다. 백두대간은 이렇게 시작되어 개마고원, 금강산, 태백산을 거쳐 전라도 지리산 자락까지 이어지고, '천지'에서 시작된 물은 압록강과 현재 중국의 토문강으로 흐른다.
'대지' 아래에는 '정계비(定界碑)'와'분수령(分水嶺)'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백두산정계비'는 작은 돌멩이 두 개가 쌓인 형태로 꼼꼼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강희임진정계(康熙壬辰定界)'라는 글이 보이고 석퇴(石堆)와 목책(木柵)이 동물 발자국과 울타리 모양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그 옆으로 두만강의 발원지로 보이는 강줄기가 보인다. 일부 학계에서는 이것이 고산자가 백두산에 오르지 않았다는 반증의 근거라 말한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은 서쪽으로 압록강, 동으로 토문강이 있는데, 백두산정계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지를 받들어 변계를 조사하고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므로, 분수령 상에 돌에 새겨 명기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
정계비에는 중국과의 경계를 이 두 강을 기준으로 한다고 적혀있고, 그 발원지 사이에 정계비를 세워 경계를 확정한 것인데, 이때 실증적인 기록을 정확히 남겨두지 않아 후대에 두고두고 국경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아래 논란을 일으켰던 요인 몇 가지를 모았다.
1. 두만강과 토문강은 중국어 발음으로 유사
2. 토문강은 동쪽으로 발원해 방향을 바꿔 북으로 흐르고, 한반도를 크게보면 두만강이 동쪽으로 흐름
3. 백두산 천지를 기점으로 발원해 땅속으로 사라졌다 나타나는 건천이 여러 곳 있었음
4. 건천의 표시로 세웠던 석퇴(石堆)가 무너지고, 목책(木柵)이 썩어 발원지에 대한 논란이 가중
5. 정계비 건립 이후 제작된 조선의 지도에도 백두산 주변 강줄기 표시가 일관되지 못함
요즘이야 위경도 좌표와 위성으로 국경을 정확히 나누지만 이러한 불명확한 지리 정보는 논란의 씨앗을 점점 키워 청은 간도와 만주에 사는 조선인을 몰아내고 두 곳을 청의 영토로 편입하겠다고 조선에 압력을 가했다.(1882년) 이에 조선은 사신을 보내 3차례에 걸친 회담(감계담판, 1885년 시작)을 했지만 모두 결렬되었고, 러일전쟁 승리와 조선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은 중국과의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을 우리나라 국경으로 확정한다.
여기서 <대동여지도>의 문제가 발견되는데, 분수령 오른쪽에서 발원하는 강줄기는 토문강으로 묘사되어 북으로 흘러야 하지만 이 강줄기가 두만강으로 이어져 그려졌기 때문이다. 실제 두만강의 발원지는 백두산 천지 근처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학계의 주장은 <대동여지도>는 이전에 제작된 지도들을 참고했을 것이고, 만약 고산자가 백두산을 수 차례 답사했다면 천지 주변의 불명확한 지형에 대한 오류는 바로 잡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졌고, <대동여지도>의 원도에 해당하는 <청구도>가 1834년에 제작됐으니, 그 사이에 제작된 지도 중 어느 한 지도라도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았다면 국경에 대한 논란은 없었겠지만, 안타깝게도 <대동여지도>는 부정확한 정보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대동여지도>가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설(독도가 그려진 대동여지도가 일본에서 발견됨)이 있어 고산자의 백두산 등정설이 힘을 얻을 수 있지만, 당시의 교통 상황과 고산자의 나이, 사용할 수 있는 장비 등을 고려한다면 그가 험난한 백두산에 여러 차례 올랐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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