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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25. 2019

교실의 구조만 바꿔도 삶의 질이 달라진다.

다시 채워져 갈 마음의 공간

 '빠따' 몇 대로 대가를 치른 후에야...


한국에서의 학창 시절, 수업 시간이면 선생님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특히, 수학 시간에는 덩치 큰 친구 뒷자리에 앉아 최대한 나의 존재를 감추고 싶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수학 선생님은 숨고 싶어하는 학생만 기가 막히게 골라낸다. "오늘 며칠이지? 7일이니까... 17번! 나와서 문제 풀어봐", "3교시니까... 3분단 세 번째 줄 나와서 문제 풀어봐" 이런 식이다. 선생님의 시선을 피한다 치면 최신 과학으로도 밝혀내기 힘든 그만의 알고리즘(Algorithmus)이 학생을 칠판 앞으로 불러낸다. 칠판의 절반을 채워야 하는 무리함수의 문제 풀이 앞에 좌절한다. 도저히 모르겠다. 등 뒤에 있는 마흔 아홉 개의 시선이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어김없이 '빠따' 몇 대로 대가를 치른 후에야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차피 못 풀 거 알면서 도대체 왜 그러는가?


수학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빠따' 몇 대 안 맞으려고 따로 돈 들여 과외하고, 예,복습하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원형감옥인 '파놉티콘(Panopticon)'의 간수처럼 학생들을 내려다보는 선생님의 시선에 복종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모든 학생이 나 같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시선만을 쫓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고, 선생님(권력)이 만든 규율에 복종했다. 선생님한테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불행히도 권력을 좇는 애들이 공부를 잘했고, 좋은 대학에 갔다. 그리고 출세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사회가 고통을 겪고 있는 거다.


이런 분위기는 수업 참여의 큰 동기가 된다.


세미나실(Seminarraum)에 앉아 있으면 자꾸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났다. '빠따'를 베풀어주시던 선생님의 이름과 얼굴은 가물가물하지만 내 엉덩이를 찌릿하게 파고들었던 통증은 생생하다. 속수무책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던 학창 시절이 한심해서 웃음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풋!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건너편에 앉아있던 토비아스(Tobias)가 왜 저러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독일 학교의 세미나실은 대개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는 구조로 되어 있다. 때에 따라 학생들은 참여하는 학생 수와 수업의 목적에 맞게 언제든 공간을 바꿀 수 있다. 모든 학생의 시선이 교수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는 한국의 강의실과는 전혀 다른 구조이다.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 그래서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도 학생들 간의 소통이 가능하다. 수업 내용에 대한 다른 학생들의 반응을 바로바로 확인할 수 있다. 시선이 교수에게만 집중되지 않기 때문에 절대 권력도 없다. 교수도 수업에 참여한 한 사람일 뿐이다. 교수는 기본적인 수업의 주제와 방향성만 제시한다.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교수와 학생이 함께 만들어 간다.


원형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시선을 공유하면서 토론을 시작했다. 이날의 주제는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독일 총리의 '난민 정책(Flüchtlingspolitik)'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온 벤야민(Benjamin)이 포문을 열었다. "난민으로 인해 범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이어갔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있는 시라아에서 온 칼렛(Kahled)의 표정이 좋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반론을 제기한다. "벤야민의 말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근거는 충분하다"며 몇 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또다시 칼렛이 "가짜뉴스(Fake News)"라며 반박한다. 두 사람의 공방이 가열되자 교수가 나서서 두 사람 사이에서 중재한다. 세 사람은 분위기 전환 차원에서 밖으로 나갔다. 헉! 그들은 복도 끝에 서서 마주 보며 담배를 태운다.

"감히, 교수님 앞에서 맞담배라니..."


보통의 독일 대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단순히 교수의 강의만 듣는 것이 아니라 동료 학생들과 생각을 공유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토론을 한다. 거침없이 자기의 생각과 이론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위기는 독일 학교들의 큰 장점이다. 이런 분위기는 수업 참여의 큰 동기가 된다. 그뿐만 아니다. 수업을 이끌어 가는 교수도 이런 분위기에서 긴장할 수밖에 없다. 혹여 교수의 강의가 지루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면 학생들은 바로 지루한 표정을 짓는다. 순식간에 세미나실 전체로 번져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교수도 열심히 해야 한다. 진지한 연구와 수업 준비를 소홀히 했다가는 학생들에게 바로 외면당한다.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다.


독일 사람들 또 토론해?


이런 교실의 구조는 자연스레 독일의 토론문화를 만들었다. 독일 사회는 어떤 쟁점이 있을 때 "토론으로 시작해 토론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한국에게 2대 0으로 패한 후에 보여준 모습에서 그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만약 우리 대표팀이 승패가 중요한 경기에서 약팀에 힘없이 패배했더라면 한국 사회는 어떤 모습을 보였겠는가? 일단, 감독은 경기장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경질 통보를 받았을 것이다. 이후 신문 기사의 헤드라인은 "한국 축구, 총체적 난국", "OOO 감독, 전술은 있었나?", "예견된 대참사, 악몽의 밤" 등의 단정적인 말들이 도배했을 것이다. 그런데 독일은 그러지 않았다. 패배 이후, 모든 방송에서 토론을 시작했다.  나는 "이 사람들 또 시작했네! 흠"이라며 승자다운 모습으로 호기롭게 그들의 토론을 지켜봤다. 여러 가지 토론 주제 중에서 내 눈길을 끈 주제는 "대표팀 감독 '요아힘 뢰브(Joachim Löw)'의 거취를 어떻게 해야 하나?"였다. 나는 너무나 당연히 경질 혹은 자진 사퇴가 되리라 생각했다. 토론은 며칠 동안 계속됐다. 그러더니 마침내. 세상에나, '뢰브 감독 연임'으로 결정 냈다. "독일의 토론 문화 참 대단하다. 죽어가는 뢰브를 살려냈네. 허허 참."


이제 우리도 제발 토론 좀 합시다!


한국인들 만큼 교육 문제에 대해 예민하고, 민첩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싶은 정도로 대한민국 사회는 교육 분야에 대단한 열정을 가졌다. 그러나 벌써 수십 년째 한국의 '주입식 교육이 문제'라고 지적하고는 있지만 달라진 게 별로 없다. 그러기도 쉽지 않겠다. 하긴 어른들이 토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니 학생들이 토론 문화의 중요성을 어찌 깨닫겠는가. 걸핏하면 휙 토라져서 광장으로 달려 나가 구호만 외쳐대니 그럴 수밖에. 답이 없다. 답이.

토론하지 않고 자기 말만 주구장천 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학창 시절, 선생님의 시선만 쫓아다니던 녀석들이 생각난다. 그 녀석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이제 좀 잘 살자!"


가끔 날씨 좋은 날에는 잔디밭에 둘러앉아 수업했다. 반바지 입고 선글라스 낀 교수 슈테판 형님, 잘 지내시나 모르겠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나는 이때도 살짝 뒷줄에 앉아 있다. 폼나게 앞자리에 누워서 수업할걸... 소심해서는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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