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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Oct 28. 2020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싸네

열등감과 수치심으로 가득했던 마음의 공간

슬기롭지 못했던 시간


"조정석이 좋은 배우인 건 알겠는데 잘생긴 것인지는 모르겠네. 그래도 외모는 내가 좀 더 낫지 않아?"

이건 무슨 강아지가 음매 하는 소리냐며 아내는 발끈했다.

"세상에나! 당신은 거울 안 봐? 우리 정석이 오빠 얼굴이 얼마나 섹시한대. 비교할 때가 따로 있지.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 따로 볼 거야!”

가당치도 않다는 듯 아내는 나를 쏘아보고선 고개를 돌려 TV 화면 속 정석이 오빠에게 다시 눈을 맞춘다. 아내의 표정이 과즙 풍부한 천혜향을 입안에 넣은 것처럼 상큼해진다. 젠장, 이번 생에 나는 조정석처럼 되긴 틀린 것 같다. 조정석 배우가 출연한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보면서 그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연기면 연기, 노래면 노래 부족한 게 없어 보인다. 참 좋은 배우다. 무엇보다 코로나19로 지친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줬다.(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전 지구적으로 코로나19가 확산했던 2020년 봄에 방송됐다) 그건 연기력만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가 인간으로서 좋은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아내가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있다. 혼자 히죽히죽하길래 조용히 다가가 옆에 앉았다. 조정석 노래 모음을 보고 있다.

“여보 이거 봐봐. 어쩜 이리 노래를 잘해? 멋있지?” 내 앞으로 화면을 슬쩍 밀면서 말했다.

질투가 난다. 목구멍에 뭔가가 턱 걸린 느낌이다. 잠시 묻어두었던 배우의 꿈을 다시 꺼내야 하나 고민된다. 웃지 마라! 진지하니까.




"군대 화장실의 암모니아 냄새에 대한 성분 분석을 다시 해야 할지도 몰라. 분명 뭔가 새로운 물질이 발견될 거야.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집중력이 발산됐다니까. 변기 위에서, 진짜야!"

나는 엄마와 누나를 앞에 앉혀 놓고 너스레를 떨었다. 엄마의 얼굴에 지난 몇 년간 볼 수 없었던 환한 빛이 서려 있었다. 엄마를 기쁘게 하는 일들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누나는 건강고 예쁜 딸을 출산했다. 우리집 1호 손녀다. 나는 지난 네 번의 수능시험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당당히 대학교 합격증을 엄마에게 안겨주었다. 엄마는 모처럼 발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내가 부대 안에서 수능시험을 준비하고, 말년 휴가를 나와서 시험을 보고, 제대하자마자, 3주 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 안에 실기시험을 준비하고 치루는 과정에서 엄마는 말없이 기도만 하셨다. 그런 엄마가 처음으로 본인의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숱한 감정이 스쳐 갔지만 나중을 위해서 꾹 눌렀다.


연극영화과는 개성 넘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신입생환영회의 사회를 맡은 선배는 개그콘서트에서 한창 뜨고 있는 유명 개그맨 H였다. 눈앞에 연예인과 내가 동문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묘한 연대감이 느껴졌다. 나 역시 연예인이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언제 되느냐?' 시간 문제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끼가 넘치는 동기들의 개인기를 감상하면서 정신없이 웃고 있는데 갑자기 H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나를 일으켜 세웠다.

"너가 군대 제대하고 입학한 신입생이냐?"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그의 말투에서 서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순간, 나는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어쭈? 대답 안 해? 나이 많다고 유세하냐?" 그의 말투는 이미 성이 단단히 나 있었다.

"아... 아닙니다." 나는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면서 대답을 얼버무렸다.

"대답 크게 안 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말라버린 호수 바닥 같은 침묵이 극장 안에 흘렀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나도 화가 났다. 갑자기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다짜고짜 화낼 이유가 뭐냔 말이다.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 육군 헌병대 병장이었던 나에게 대답 작게 했다고 소리를 질러? 속으로 이 말을 곱씹으며 나는 H를 노려봤다.

"뭘 봐? 눈 안 깔아? 이번 신입생들 완전 개판이네. 다들 엎드려뻗쳐! 2, 3학년도 다 엎드려뻗쳐!"

H의 말 한마디에 백여 명의 학생들이 물소떼가 달리는 듯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일제히 엎드려 뻗쳐자세를 취했다. 나도 그 틈에 껴서 엎드려 뻗쳤다. H는 앞에 서서 계속 나를 공격했다. 굴욕감이 밀려왔다. 내가 어떻게 들어 온 대학인데... 하지만 자리를 박차고 나갈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아 XX, 뭐 이런 X같은 경우가 있어?" 마음속으로만 쌍욕을 읊조리고 있을 뿐.

천만다행이었다! 욕을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은 것 천망다행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 '서프라이즈!' 몰래카메라였다.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시작으로 신입생 전체를 속이는 시나리오였다. 선배들이 다가와 놀라게 해서 미안하고 뒤늦은 입학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H는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환영회 후에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도 H는 나를 외면했다. 모두를 속이기 위한 ‘였다지만  순간, H 눈빛은 진짜였던 거다. 나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있었다.


그날의 기분을 잊으려 노력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에게 연대감을 느꼈었고, 그와 동문이라는 사실은 나를 우쭐하게 했었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그래서 한번도 다뤄진 적 없는 날것 그대로인 감정이 솟아올랐다. 바로 열등감이었다. H와의 인연은 그렇게 마음의 상처가 되어 나를 새로운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존재를 알린 열등감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하루빨리 유명해져서 내가 받은 수치심을 H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학교에서 진행되는 체계적인 연기 수업은 진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다. 러시아에서 오신 교수님은 자꾸 수업 시간에 나무와 곤충을 연기해보라는데 나는 미치는 줄 알았다. 대체 연기다운 연기는 언제 할 건지 묻고 싶었다. 조급함을 못 이기고 대학로로 나갔다. 입시 실기를 도와줬던 극단에 찾아가 무대에 세워달라고 무작정 졸랐다. 연출가는 내게 작은 역할을 맡겨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대사 두 마디가 전부인 단역 연극배우로 데뷔를 했다. 혜화동1번지 소극장이 나의 첫 무대였다. 그 후로 한동안 극단 사람들과만 어울렸다. 연습과 공연이 끝나면 포장마차에 앉아 예술과 연기에 관해 토론했다. 학교에서 곤충과 나무를 연기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폼나 보였다. 밤새 그렇게 시간을 보냈으니 당연히 학교 수업에는 참여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학교에서 만난 선배는 내가 하도 안 보여서 자퇴한 줄 알았다고 했다.

"아이 돈 케어! 나는 나이를 먹고 학교에 왔기 때문에 동기들과 똑같은 속도로 가서는 안 돼. 나만의 방식이 있어. 너희들이 어떻게 보든 상관없어! 나는 빨리 가야 하니까." 마음속에 굳게 새겨진 말이었다.


성적표가 나왔다. 학.사.경.고!!

나의 조급함이 만든 결과는 신랄했다. 신입생환영회에서 H에게 굴욕을 당했다고 느낀 날. 그날 남몰래 속삭였던 말을 나는 잊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들어 온 대학인데..."

열등감은 나에게 지난했던 과거로부터 보상받는 길은 서둘러 화려한 조명에 감싸이는 것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학교 성적 따위가 뭐가 중요해? 유명해지면 다 소용없는 거야! 어서 달려. 달리라구!!"

열등감은 이렇게 말하며 내 위에 올라타 채찍질하기 시작했다. 나는 경주마처럼 차안대를 착용하고 앞만 보고 달려갔다.

그때 나는 미처 몰랐다. 내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를.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참 좋은 드라마다. 여기서 ‘좋은’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그중 첫 번째로 '좋은' 것은 주,조연급 배우뿐만 아니라 한 회만 잠깐 등장하는 단역배우도 시청자들 기억에 남게 해준다는 거다. 얼마 전, 시즌 1이 끝나고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되는, 일명 '하드털이'영상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단역배우들의 오디션 영상이었는데 제작진은 단역배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가 욕심이 많아서요. 아주 작은 역할이지만 ㅇㅇㅇ 배우님과 꼭 함께하고 싶어서 이렇게 모셨어요." 라고 말한다. "모셨어요." 이 말을 들은 배우들의 표정은 감동 그 자체였다. 짧게는 수년, 길게는 20년 이상 단역배우로 살면서 현실과 꿈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했을 번민이 다 날아가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긴 터널을 지나 온 그들이 화려한 조명에 감싸이는 모습을 보고 싶다. 오래도록 버텨 온 배우들이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젊은 시절 같은 꿈을 꾸었던 한 사람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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