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질감 극복을 위한 프로젝트
“저는 한마디로 통일은 대박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2014년 1월.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신년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회견 직후, 이 말은 모든 신문의 머리기사로 도배됐다. 대통령 5년 단임제의 특성상 정부의 대북 정책은 임기 초에 결정되기 때문에 국민들은 새 대통령의 입에서 나올 통일 비전에 주목했다. 그 무렵 베를린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한 나는, 인터넷을 통해 회견을 지켜봤다. “독일의 통일 과정을 연구해 미래 한반도 통일에 필요한 밑거름이 되자”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2013년 6월, 아내와 생후 4개월 된 딸과 함께 서울을 떠나 베를린에 왔다. 내 나이 서른여섯. 적지 않은 나이였다. 늦은 유학이었기에 서둘러 연구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 정부의 대북 철학이 나의 연구에 중요한 지표가 되어주길 기대했다. 박 대통령의 연설을 요약하면 대충 이러했다. “정부는 북한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을 강화하고 민간교류도 확대할 것이다. 이번 설을 맞아 이산가족이 상봉하도록 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의 첫 단추를 잘 풀어 남북관계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 북한이 비핵화 진정성을 보여주면 실질적 평화가 가능하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 국민들 중에는 통일비용이 너무 많이 들지 않겠느냐, 굳이 통일할 필요가 있겠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다”라면서 “내년(2015년)이면 분단된 지 70년이다.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야 한다” 강조했다. 회견 내용 중에 내가 놓친 것이 있진 않을까? 언론의 해설을 찾아봤다. 그런데 대부분의 언론이 엉뚱한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다소 즉흥적인 발언 같았던 “통일은 대박”이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2012년 대선후보 시절, “네거티브에 너무 시달려서 멘붕이 올 지경이다”라는 과거 발언도 소환되었다. 대통령이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대박, 멘붕 등의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해설이었다.
분단 이래, 보수냐, 진보냐 구분할 필요 없이 대통령은 저마다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해왔다. 앞선 이명박 정부 내내 얼어붙었던 남북관계를 고려할 때 박근혜 정부의 대북 정책이 한반도 평화의 불씨를 되살려주길 기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대박’이라는 단어 하나가 대북 정책의 모든 이슈를 집어삼켰다. 통일이 왜 대박인지에 대한 해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통령의 설명도 빈약해 보였다.
2014년 3월 28일, 국빈 자격으로 독일을 방문한 박 대통령은 드레스덴에서 또한번 ‘한반도평화통일구상’을 밝혔다. 먼저 독일의 통일 과정을 예찬했다. 남과 북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는 북한에게 세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남북 간의 인도적 문제 해결.
둘째, 남북 공동 번영을 위한 민생 인프라 공동 구축.
셋째, 남북 주민 간의 동질성 회복을 위한 노력.
대부분의 국내 언론은 이 내용을 높이 평가한 데 반해 독일 언론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여전히 후유증을 앓고 있는 독일의 통일이 과연 예찬받을 만한 것인가 의문을 품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독일의 한 저널리스트는 대북 메시지를 밝히는 자리에 주독 북한 대사를 초대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경제난 속에 부모를 잃은 북한 아이들이 거리에 방치되어 있고 추위 속에서 배고픔을 견뎌내고 있다는 외신 보도를 접하면서 가슴이 아팠다”, “지금 이 시각에도 자유와 행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탈북자들이 있다”고 말하는 대통령은 진심으로 동질성 회복(세 번째 제안)을 원하고 있는 것인가. 또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비도, 적극적인 협상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왔다. 당연히 북한의 반응도 부정적이었다. 4월 1일 자 로동신문을 통해 “드레스덴 선언은 나라와 민족의 이익은 덮어두고 몇 푼 값도 안 되는 자기의 몸값을 올려보려고 떠든 반통일 넋두리”라고 매도했다. 북한은 박근혜식 통일을 북한의 사상과 제도를 해치기 위한 반민족적인 ‘체제통일’로 규정했다. 남북 관계가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경색되어 가는데도 ‘통일 대박론’은 사라지지 않고 좀비처럼 여기저기를 유랑했다. 각종 강연회에서 통일 대박론이 설파되었다. 통일이 되면 정년 퇴직자나 예비역 장교까지 일해야 할 만큼 일자리가 늘어나 경제 규모가 커지고, 통일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생각에 ‘세금 폭탄’을 우려하지만, 통일 직후부터 10년간 총소득의 1%를 세금으로 부담하면 매년 11%의 실질 소득이 늘어나기 때문에 경제적 관점에서 남북이 모두 잘살게 된다는 근거 없는 경제 이론까지 등장했다.
박근혜 정부와 함께 시작된 나의 연구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돛을 잃은 배처럼 표류하고 있었다. 도통 갈피를 못잡고 조급함에 쫓기고 있을 때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 시간이 소용돌이처럼 지나가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2018년 4월 27일, 3차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나의 연구도 조금씩 실타래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분단국가다. 말 그대로 분단은 하나였다가 두 개로 갈라진 상태를 말한다. 남과 북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지리적으로 갈라졌다. 이에 더해 우리 사회의 분열은 이보다 훨씬 복잡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얽히고 설킨 지정학적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는 이야기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질적인 개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충돌하고 있다. 분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문제의 해결은 어려워질 수 밖에 없다.
1953년 체결된 정전 상황이 언제쯤 종전선언으로 이어질지, 누구도 알 수 없다. 통일은 대박보다는 쪽박에 가깝지 않을까? 솔직한 나의 생각이다. (독일의 경우를 보라! 여전히 통합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북의 위정자들이 깔끔하게 통일하기로 합의하고, 분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역사가 긴만큼 다시 하나의 사회가 되어가는 과정 역시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예 새롭게 창조하는 편이 쉽다고 생각할 만큼. 하지만 알다시피 모든 창조의 과정엔 반드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정파적인 시선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통일 담론은 뫼비우스의 띠같은 지금 상화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던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 없이 분할 점령하기 위해 경계선을 그으면서 발생했다. 분단 이후, 남북의 갈등은 깊어졌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상징되는 냉전체제의 형성과 맞물려 일어나면서 지리적 분단뿐만 아니라 이념적 분단도 심화했다.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축출됐고, 북한에서는 민족주의자들이 박해를 받았다. 또한, 북한에서는 토지개혁, 국유화 등 사회주의 체제가 자리 잡았고, 남한에서는 시장경제가 발달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념의 분단 위에 체제의 분단이 더해진 셈이다. 남북의 분단은 어느덧 70년이 훌쩍 넘게 지속하고 있다.
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에 첫 진보 정권이 출범하면서 남북의 분단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그때로부터 8년 전이었던 1990년, 독일의 통일을 지켜본 김대중 대통령은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의 ‘동방정책’을 닮은 대북화해협력정책을 제시했다. 진보 정권(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남북관계는 한국전쟁 이후 가장 혁신적인 관계로 발전했지만 유의미한 결과는 없었다. 보수가 다시 정권(이명박-박근혜 정부)을 잡으면서 남북 관계는 또다시 경색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남한의 보수 정권과 언론들은 권력 유지를 위해서라면 북한과의 갈등(총풍 사건)도 서슴없이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했다.
우리의 역사는 스스로 민족 통일의 길을 차단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지리적 분단은 한반도에 완전히 상반된 두 개의 이념과 체제를 생산했다. 때로는 최소한의 감정도 없이 상대방의 체제와 이념에 대해 비판하는데 열을 올렸다. 공간을 가로막은 장벽 너머에는 비이성만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권력자들은 언론과 예술을 통해 대중의 생각을 통제했고, 우리는 거기서 무기력하게 자유를 잃어갔다.
76년 세월 동안 한반도 위에 두 공간은 끊임없이 대립했다. 정답 없는 문제를 받아든 우리는 그 답을 찾으려 독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한반도 상황에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로선 독일의 사례에서 분단을 끝낼 수 있는 치트 키를 찾고 싶어했다. 베를린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약 8,122km. 먼 거리만큼이나 여전히 독일과 한반도의 정치적, 사회적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두 공간이 20세기 초 역사의 타임라인 위에서 잠시 스치듯 만났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통일을 대박이라는 단어로 치환하기엔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상황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총풍 사건: 1997년 12월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 측에서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청와대 행정관 등 3명이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북 측의 참사 박충을 만나 휴전선 인근에서 무력 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