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두려워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서 이별을 택하는 사람들
절망이 두려워서 희망을 포기하는 사람들
예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이상한 선택들
삶의 가능성이 넘치고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던 어린 시절에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을 비겁하거나 약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애써 수고롭게 죽음을 택하는 그 심리 자체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이해할 수 없기에 이건 병이고 치료해야 하는 현상이라 생각했다. 죽음이 그렇게 일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의 발목을 장난처럼 잡아 당긴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러기엔 아무리 아닌 척해도 삶의 에너지는 넘쳤고 유치한 자학을 하는 와중에도 젊음은 반짝거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이 먹고 어린 시절에 비해 훨씬 더 비겁하고 놀라울 정도로 몸과 마음이 약한 사람이 되고 나니 이젠 오히려 자살을 삶의 선택지에서 꼭 제외해야 할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기가 힘들어졌다. 자살 예찬론자까진 아니지만 그 길을 선택하려는 사람에게 그런 선택은 어리석은 짓이고 너는 병마에 시달리는 존재이니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아주 당당하게 얘기할 자신이 없다는 얘기다. 살고자 하는 사람도 충분히 이해하고 죽고 싶은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난 희망 없는 시간을 소진하며 꾸역 꾸역 사는 것 못지 않게 죽는 것도 두렵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자살을 하거나 하진 않을 것이다. 죽음의 허들을 넘는 것이 손바닥 뒤집듯 쉽다면 무망감과 무기력에 젖은 이 사회의 생존 경쟁 이탈자들은 약간만 기분이 다운 되도 레밍 떼 마냥 죽음을 택할거라 확신한다. 그게 안되니까 그나마 인구 감소 폭이 이 정도로 완만한 거다.
자살이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나 같은 루저에게는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이젠 확실히 인정하는 바이긴 한데 어이없는건 매번 죽음을 생각할 때 마다 죽는 순간의 외로움이나 죽은 후의 시체의 부패와 같은 지엽적인 것에 죽음 자체보다 더 집착을 한다는 거다. 죽음 이후의 상황을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죽음이 죽음으로 기능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의 반영 아닌가? 그럼에도 이 정도 수준의 사고방식으로도 인생에 단 한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자살 토큰을 아낌 없이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보면 죽는 게 어려운 만큼 생명의 가치가 좀 한심한 수준까지 내려와 있는 건 아닌가 싶다.
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고 계속 밀려오는 것이 질병이라고 생각했다. 해소해야 하고 치료해야 하는 징후라고 생각하고 약을 먹든 상담을 받던 아님 외부의 자극을 통해서든 그것을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원인을 제거하던 혹은 넘쳐나는 생의 의욕으로 그 그림자를 확실히 밀어내든 말이다. 이 학습되고 승인된 이 삶의 가치에 대한 판단이 무의미한 거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게 또 절대적인거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죽음을 갈망하는 것이 질병이라면 삶을 미치도록 희구하는 것은 건강한 건가? 이도 어쩌면 이상한 신진대사 항진증과 같은 또 다른 질병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