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종이 달(紙の月)>
*영화 <종이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얼마 전 국내 모 은행의 2년 차 신입행원이 회삿돈을 횡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천안 모 지점 직원이 13억 원가량을 횡령한 혐의가 포착된 것이다. 그는 출납을 위해 지점이 가지고 있던 돈을 빼돌렸다. 은행이 지점에서 자체 감사를 하던 중 자금이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휴가를 보내고 있던 해당 직원을 지점으로 불러 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 간 큰 횡령 소식(?)을 듣고 바로 떠오른 영화가 있다. <종이 달(원제 : 紙の月)>이라는 일본 영화다. [8일째 매미]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작품으로, 미야자와 리에가 주인공인 우메자와 리카를 연기했다. 영화는 평범한 은행원이 거액의 회사 돈을 횡령하는 이야기다.
* 각각 일본/국내판 포스터. 개인적으로 국내판이 영화의 분위기와 메시지를 더 잘 표현하는 듯싶다.
은행원 '리카'는 주부 생활을 하다 4년 전에 은행에 입사했다. 남편의 사업도 꽤 잘 나가고, 얼마 전 드디어 계약직에서 정직원이 되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단조로운 업무는 지루하고, 남편과는 사이는 좋지만 사랑은 느껴지지 않는다. 영업사원인 리카의 주 업무는 고객 관리다. 돈을 예금하거나 돈을 불릴 상품을 가입하는 여유로운 노인들이 주 고객이다. 은행에 왔다 갔다 하기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리카가 대신 돈을 예금하거나 인출 해 전해주는 일도 한다. 어느 날, 리카는 백화점에 들렀다가 판매원의 설득에 넘어간다. 꽤 고가인 화장품을 구매하느라 현금이 모자랐고, 고객의 돈에 손을 댄다. 적은 액수이기에 바로 은행을 찾아 돈을 채워 넣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하면 안 되는 일'을 시작해버렸다.
리카는 여느 때처럼 외근으로 고객의 집에 방문했다가 고객의 대학생 손자 코타를 만난다. 그 후 전철에서 우연히 만난 둘은 사랑(이라 쓰고 외도라 읽는다)에 빠진다. 코타의 딱한 사정을 듣게 된 그녀는 도움을 주기 위해 고객의 예금에 손을 댄다. 그 후로 그녀는 계속 고객의 돈에 손을 댄다. 몰래 서류를 빼돌리고, 거짓말을 일삼는다. 급기야 집에 온갖 기계들을 구비해 놓고 서류를 위조한다. 그 돈으로 그녀는 대학생 애인과 호텔에 가고, 명품을 사고, 맛있는 걸 먹으러 다닌다. 바닷가가 보이는 둘만의 별장도 구한다. 점점 어딘가 화려 해지는 그녀에게 같은 은행의 동료 직원은 "분위기가 바뀌었다. 조심해라. 은행은 보는 눈이 많다. 남의 돈 만지는 곳인데 당연하지 않나. 다들 지켜보고 있다."라고 조언한다. 그러면서, "가끔 나도 정말 나쁜 짓 하고 싶어 진다. 그러지 않게 우메자와(주인공)씨가 나 좀 감시해달라."라고 덧붙인다.
영화 중간중간 청소년기의 리카가 나온다. 큰 재해가 온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위해 모금을 하는데, 도움을 받은 아이로부터 직접 편지도 받게 된다. 리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지만, 점점 다른 반 친구들은 모금을 하지 않는다. 결연 학생의 소식도 끊겼다. 그 상황이 안타까웠던 리카는 아버지의 지갑에서 돈을 훔쳐 5만 엔을 기부한다. 너무 큰 금액을 한 학생이 내자 학교 측은 기부를 중단한다. 어린 리카는 "받는 것보다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며 항의한다. "그 돈을 어떻게 손에 넣었지?" "아빠 지갑에서요." "용서할 수 없다. 아이들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리카가 대학생 애인과 처음 밤을 새운 날. 전철을 타고 집에 오는 길, 새벽녘 하늘에 희미하게 달이 떠있다. 손가락으로 달을 긁어보니, 달이 지워진다. 가짜니까 지워진다. 리카는 빼돌린 돈을 쓰면서, 외도를 하면서 행복했지만 언제 끝날지 두려웠다. 슬프지는 않았다. 가짜니까. 진짜같이 보여도 진짜가 아닌, 처음부터 모두 가짜인 행복. 가짜니까, 망가져도 상관없었다. 두렵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들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25년간 충실히 근무해 온 직원인 스미씨가 뭔가 잘못됨을 눈치채고, 리카의 일탈은 종지부를 찍는다. 영화의 끝부분에 범행을 시인하고 은행의 조치를 기다리는 리카와 그 모습을 바라보는 스미씨가 나온다. 리카는 자신이 "비참하다"라고 말하고, 스미씨는 "그래도 넌 그 돈으로 하고 싶은 걸 했잖아. 내가 못한 일을 넌 했잖아. 난 생각해봤어. 내가 당신이라면? 난 밤을 새보고 싶어. 밤을 새본적이 한 번도 없거든. 다음날 피곤하니까."라고 말한다. "돈은 종이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이 말을 듣고 리카는 의자로 유리창을 깬다. 스미씨가 붙잡자 "같이 갈래요?"라고 묻는다. '가짜'로라도 행복을 살고 일상이 망가진 사람과, '일상'에 충실하며 행복을 꿈꾸기만 하는 사람. 누가 더 진짜 자유로운 걸까? 스미씨는 리카가 도망간 길을 멍하니 바라본다.
엔딩 장면에 외국의 시끄러운 시장이 나온다. 그곳에서 리카는 우연히 한 사과장수를 본다. 어릴 때 모금을 보내고 받았던 편지에 동봉된 사진 속 남자아이는 얼굴에 큰 흉터가 있었다. 지금 눈 앞의 사과장수 얼굴에 똑같은 모양의 흉터가 있다. '훔친 돈'까지 보내며 도왔던 그 아이. 그 아이는 아빠가 되어 있다. 리카는 울먹이며 사과를 깨문다. 하지만 감동도 잠시, 멀리서 오는 경찰을 보고 리카는 인파 속으로 황급히 도망친다. 리카는 잠시 동안 가짜 자유를 누렸지만, 그 대가로 영원한 진짜 자유를 잃었다.
2시간이 좀 넘는 조금 긴 러닝타임에도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화려한 액션이, 그래픽 효과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BGM선택이 훌륭하다.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특히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의 눈빛과 표정이 정말 '리카'같았다.
"대체 왜 저 돈에 손을 대지? 너무 간이 큰 거 아니야?"라고 연신 외치게 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런 그녀가 안쓰럽다. '거짓 행복'에 중독된 그녀는 그 행복이 '거짓'인지 알고 있다. 최고급 호텔에서 즐거운 날들을 보내지만 결국 '체크아웃' 해야 하는 시한부 행복이다. 고지서에 적힌 금액은 현실이다. 학교에 구식 컴퓨터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코타에게 새 컴퓨터를 사주지만 알고 보니 그는 오래전 학교를 그만뒀다. 동아리 친구와 바람도 피우고 있다. 그걸 알고도 리타는 코타에게 "이번 주말에도 별장에 가자"라고 말한다. 설사 그것이 거짓이라도, 그렇게라도 행복하고 싶은 그녀의 절박함이 느껴졌다.
그녀의 고객 중에 물건을 계속 사는 노인이 있다. 한 번은 모조품 목걸이를 샀는데, 리카가 "예쁘네요. 모조품이지만"라고 묻는다. 노인은 "가짜여도 상관없어. 뭐 어때? 예쁘잖아."라고 답한다. 리카의 마음속 외침을 대변하듯이. "거짓이면 어때, 행복하잖아. 행복하면 됐어."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리카가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켜져도 앞으로 가지 않고 있다. 뒤에서 그녀를 발견한 스미씨가 다가와 묻는다. "갈 거야, 안 갈 거야?" 남의 돈으로 누리던 거짓 행복과 거짓 자유. 만약 리카가 멈추지 않고 '더 간다면' 어떻게 될까.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다." 뒤의 장면에서 스미씨는 말한다. 거짓에는 끝이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특히 거짓은 반드시 끝이 있다.
우리는 살면서 그런 순간들을 맞는다. "갈 거야, 안 갈 거야?"라고 자신에게 묻는 그런 순간들. 고시에 연달아 실패하는 사람은 더 공부를 할 건지 그만둘 것인지 묻겠고, 애인과 헤어질 위기인 사람은 이 사람을 잡을 건지 아니면 놓을 건지 물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스미씨라는 타인이 물었지만, 현실에선 스스로 물어야 한다. 보통 우리는 '더 행복한 길'을 택한다. 아마 그게 맞다. 하지만 그 행복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파악하는 것도 우리 몫이다. 리카는 그것이 가짜인 줄 알아도 '계속 갔다'. 그리고 결말은? "비참했다."
우리 모두의 머리 위엔 적어도 하나의 '종이 달'이 떠있다. 내가 손 뻗어 지우면 사라지는 그런 달. 내가 지우면 지워지는 그런 것들.
붓다는 묻는다. "네 마음의 불길이 언제 일어나는가? 너의 기대, 너의 잣대, 너의 바람, 너의 욕망에서 네 삶이 어긋나기 시작할 때 불길이 솟구치지 않나. 그러나 따져보라. 누가 그 불길에 장작을 공급하고 있는가. '내 마음이 불탄다, 내 삶이 불탄다'며 괴로워하면서도, 계속해서 잣대를 고집하고, 끝없이 장작개비를 밀어 넣고 있는 이가 누구인가."
내 욕망이 내 삶을 태우고, 세상을 태운다.
'종이 달'을 띄우는 것도 우리고, 지우는 것도 우리다.
*cover image : Photo by Alexandre Godreau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