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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rat Dec 06. 2021

2021년 11월 읽은 책들

독서 기록 - 한 해의 끝자락을 달려가며

cover image : Photo by Sage Friedman on Unsplash

  


어느새 11월이다. 이제야 잠잠해지나 싶더니 다시 오미크론 변이까지. 이 팬데믹의 끝은 어디일까?


코로나도 코로나지만, 11월에는 갑작스러운 부상으로 외출하는 시간이 현저하게 줄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독서할 시간이 매우 매우 늘었다는 점은 감사한 부분. 다치치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면 한 템포 쉬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는 재정비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정말 좋은 책들을 많이 읽어서 뿌듯한 한 달이다. 지난달에 이어 여성 작가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들을 많이 읽었다. 몸이 약해지면 마음도 약해진다고, 비교적 잔잔한...머리보단 가슴으로 읽는 책들이다. (아프면 머리 쓰기도 힘들다!) 소설, 에세이류를 한창 읽으니까 또 논픽션 책들이 당긴다. 12월에는 사놓고 읽지 못한 비문학 류를 해치워야겠다.



요새는 작가별로 몰아 읽게 된다.



장편소설 <밝은 밤>은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겠는' 클리셰가 딱 들어맞는 책이다. 가끔  '정말 타고난 작가구나'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작가가 그렇다. 최은영 작가는 예전에 <내게 무해한 사람>으로 처음 접했다. 이번 기회에 <밝은 밤>과 <쇼코의 미소>를 같이 읽었다. <밝은 밤>은 읽으면서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가 많이 떠올랐다. 두 책 모두 여러 세대에 걸친 여성 서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밝은 밤>은 한국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전 세대의 이야기가 더 깊게,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  <밝은 밤>은 책을 덮고 여운이 남는 것이 아니라 읽는 동시에 여운이 남았다. 특정 인물들의 삶이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와 계속해서 삶이 이어지는 경이로움을 다시금 되새겼다.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닌가.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130p


단편 모음집인 <쇼쿄의 미소>는 좀 더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다. 짧지만 강렬한 이야기들이다. <쇼코의 미소>의 이야기들은 ‘낯선 배경'의 낯선 상대'들을 자연스럽게 다룬 점이 좋았다. ‘쇼코의 미소’는 일본인 친구인 쇼코와의 이야기이고, '씬짜오, 씬짜오'에는 베트남에서 온 투이네 가족과의 이야기가 독일을 배경으로 이어지고, '한지와 영주'에는 프랑스의 한 시골마을 수도원에서 케냐에서 온 한지를 만나는 영주의 이야기가 담겼다. 케냐인, 베트남인, 일본인, 한국인 모두 비슷한 감정과 연대 하에 담담히 이야기가 풀어지는 게 좋았다. '외국인' 이랴기는 보통 우리는 할리우드의 영화, 혹은 백인들의 글, 아니면 아예 현지 문학으로 접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렇게 한국인 주인공이 한국의 정서로 그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스토리는 색다른 감동이랄까. 뿐만 아니라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나 '미카엘라'처럼 익숙한 배경에서 익숙한 대상들(엄마)과의 이야기를 다룬 것도 정말 좋았다. '소설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 준 최은영 작가의 책들이다.

가끔 글쓰기에 해이해지고 게을러질 때면 그때 그렇게 울었던 나의 마음을 떠올려본다. 이생에서 진실로 하고 싶었던 일은 이것뿐이었다. 망상이고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292p, <쇼코의 미소> 작가의 말 중






그리고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드디어 그녀의 작품들을 몰아 읽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나이지리아 출생으로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았고, 세계적인 상들을 여럿 수상한 유명 작가다. 데뷔작 <보라색 히비스커스>와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 <숨통>, <아메리카나>까지 '지금의 나이지리아'를 가장 사실적이고 재치 있게 다룬 작품들을 썼다. 아프리카 출신 작가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주목받는 작가다 보니 아프리카 현대 문학의 아버지인 치누아 아체베의 '21세기 딸'로도 불린다. <엄마는 페미니스트>,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등 성평등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운동가이기도 하다. 2015년 '타임'의 '영향력 있는 100인'에, 2017년 '포춘'의 '위대한 지도자 50인'으로 선정됐다. (내한해 강연도 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그녀의 TED 강연을 옮긴 책이다. 해당 강연은 당시 큰 화제였다.

https://youtu.be/hg3umXU_qWc


세 작품을 함께 읽으니 그녀의 다양한 문제의식과 달라진 스타일(?)을 비교할 수 있었다. <아메리카나>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나이지리아 청년들의 아메리칸드림과 이를 둘러싼 명암, 사랑과 우정을 다룬 이야기다. 매우 재밌다! 세계화 속에서, 나이지리아  청년들도 똑같이 연애와 결혼, 친구들과의 갈등, 부모님과의 세대 갈등, 대학 입시, 진로 문제, 이사, 직장 구하기, 가부장적 문화(특히 더 심한)에 대한 거부감, 출세하고자 하는 욕구까지 비슷한 고민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아다치에 가 내세운 인물들은 전통적인 나이지리아 문화와 관습에 깊게 영향을 받으면서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은 않는다. 미국을 갈망하면서도, 고국을 그리워한다. 석사 졸업장을 가지고 있어도 '외노자'일 뿐인 자신의 위치에 절망하면서도 '오로지 미국 중심으로 생각하는' 미국에 경멸을 느끼기도 한다. <아메리카나>에서는 그런 미국인들, 미국에 대해 나이지리아인인 이페멜루가 '순수하게 낯설게 관찰하는' 재치 있는 표현들이 많이 나온다. 미국인들은 보통 본인들이 외부를 관찰하고 판단하고 평가하지, '관찰 대상'이 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나. (단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아닌 '미국'으로 대표되는 전통 권력, 서방세계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미국, 서유럽 중심의 세계를 살아가는 아시아인으로서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한국에서 살 때는 평소 느낄 일 없지만 해외서 관광객이 아닌 신분으로 지내다 보면 더욱 와닿는 그런 것들) 엄연히 각국의 문화와 특성이 너무나도 다르지만 '아시아인'으로 퉁쳐지는가 하면, 미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어도 외모가 아시안이면 "당신은 악센트가 없네요. 미국에 언제 왔어요?"란 질문을 받는 그런 것들.  나이지리아에서는 엄연한 중산층에 대학교육까지 받은 이페멜루지만 미국에서 아르바이트조차 구하지 못해 고전하다 '마사지를 해주기만 하면 된다는' 백인 남자의 제안을 최후의 보루로 생각해야 하는 현실. 그 현실 속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답답함과 절망, 혼란, 깨달음이 날카롭고 재치 있게 담겨있다. 공감도 하고, 탄식도 하고, 각성도 했다. 이런 점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고, 소설의 힘이 아닐까?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아다치에의 문단 데뷔작으로 억압적인 가부장제 속에서 세상을 알아가는 한 소녀의 이야기다. 절대 권력의 아버지가 강요하는 엄격한 천주교 문화 속에서 소녀는 외부 세계와 완벽히 차단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연결점인 '고모'의 노력으로 소녀와 소녀의 오빠는 '아버지가 만든 세상' 밖을 경험한다. 우정, 사랑(신부님을 향한 동경? 첫사랑?), 그리고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발견하는 즐거움까지 세상에는 새로운 것들이, 경험해야 할 것들도 너무 많다.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지만, 넓게는 '과거에 머물고 있는' 나이지리아를 살아가는 청년(아다치에 본인을 포함한)들의 각성을 다룬 것으로 느껴졌다. <숨통>은 단편들을 모은 책으로, 급격히 밀려들어 온 미국 문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동경, 환멸, 몰이해, 소통의 순간을 겪는 전 세대의 나이지리아인들의 여정을 담았다.

"악센트가 예쁘네요. 어디 출신이에요?"
"나이지리아요."
"나이지리아요. 거기 전쟁 중이지 않아요?"
"아닌데요."
"신분증 좀 볼 수 있을까요?" 여자가 신분증을 흘끗 보더니 덧붙였다. "이름을 어떻게 발음한다고요?"  -<아메리카나 1> 221p
교수들이 "참여"라고 부르는 행위는 불편했고,왜 최종 점수에 포함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지 학생들을 떠들고 또 떠들게 하고, 수업 시간을 뻔한 얘기와 공허한 얘기와 때로는 무의미한 얘기로 낭비하게 만들 뿐이었다. 미국인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늘 수업 시간에 뭔가를 말하라고, 무슨 얘기든 떠드어 대라고 배웠음이 분명했다…(중략)…그들은 절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기억이 잘 안 납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마찬가지로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으면서도 학생이 해답을 알고 있을 여지를 남겼다. -<아메리카나 1> 227p
"감사합니다." 이페멜루는 문득 미친 듯이 강한 열망을 느꼈다. 받는 사람들의 나라가 아니라 주는 사람들의 나라 출신이고 싶었고, 가진 것이 많아서 남한테 베푸는 축복을 누려 온 사람 중 한 명이고 싶었고, 넘치는 연민과 동정심을 가질 만큼 여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고 싶었다.  -<아메리카나 1> 287p
"내 풍성하고 멋있는 머리는 재즈 밴드 코러스 면접을 볼 때나 좋지. 이번 면접에서는 프로다워 보여야 해. 프로다워 보이는 데는 곧게 편 머리가 최고지만 구불구불하더라도 최소한 백인처럼 느슨하게, 아니면 나선형으로 구불거리기라도 해야지, 흑인 머리처럼 뽀글뽀글하면 안 돼."  
"당신한테 이런 짓을 하게 만드는 빌어먹을 세상이 잘못된 거야." -<아메리카나 1>344p






<꿈꾸는 하와이>와 <어른이 된다는 건>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여행기와 에세이집이다. <꿈꾸는 하와이>는 특유의 맑은 문체로 하와이의 아름다움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관찰한다. (하와이에 가고 싶어 짐! ) 훌루에 대한 애정과 사색 부분이 재밌었다. 학원을 빠져도, 잘 못해도 '나만의 길'을 간다는 바나나. 현대인들은 끊임없는 '타인의 관심'에 노출되어 있다. 인스타그램의 좋아요와, 틱톡의 구독자와, 유튜브의 조회수까지 끊임없는 타인의 관심이 나의 경쟁력이 되는 사회가 됐다.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유튜브의 브이로그가 아닐까. 나의 일상을 내가 직접 찍어서 공유하고, 또 누군가는 그런 일상을 본다. (나도 브이로그 보기 좋아한다) 그만큼 이제 우리는 24시간 '나를 노출하는 것'에 익숙하다.


누군가에게 보이지 않아도, 증명하지 않아도, 인정받지 않아도 우리의 일상은 그 자체로 가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에서 위로가 된(?) 대목이 있다. 고등학교 때 수업에서 멍 때리던 자신은, 나름대로의 '공부'를 하고 있었단 것. 쉰 살이 다되어서 읽은 고전도 많다는 것. 나도 스스로 취미가 독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읽지 않은 고전들을 발견할 때마다 '아직도 이걸 안 읽고 난 뭐했지?' '학창 시절에 무슨 책들을 읽은 거지?' 하는 생각에 조금 화가(?) 날 때가 있다. 그런데 바나나처럼, 작가조차 그렇다는 것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맞다. 고전이라고 모두 이미 읽었어야 한다는 법 있나. 아직 읽지 않았단 것은 '앞으로 읽을 책'이 많다는 사실이기도 하니까. 그 기대감에 살아갈 수 있으니까.


독서든 명상이든 여행이든 일상이든 나만의 길'을 가는 것이 중요하단 사실. 그리고 그렇게 온전히 '나만의 길'을 걸어가며 만족하고 안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게 정말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이 세상에 편한 것은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인생은 멋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기가 톱인 장소에서는(그게 일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연인이든 남편이든 아이든...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 똑같이 힘은 들어도 보기에는 근사하니까. 똑같이 꾹꾹 참고, 할 말을 삼키고, 내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면서, 그런 매일을 쌓아 간다.

만약 내가 '내 분야에서는 화려하니까, 이쪽에서는 실력이 늘지 않고 수수하더라도 참지 뭐.' 하는 식으로 훌라를 했다면, 오래 계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훌라의 세계에서 나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말만 그럴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나만의 길이다. 거기에는 나만 볼 수 있는 무언가가 있고, 나만 아는 미미한 숙달이 있으며, 좌절이 있다.  -<꿈꾸는 하와이> 101p
"하와이는 정말 천국과 비슷하더군요. 그 바람과 햇빛의 느낌이. 그래서 다들 하와이에 가면 천국 같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 반대가 아닐까요. 천국이 하와이 같을 겁니다. 사람들은 천국을 기억하고 있는 거죠." -<꿈꾸는 하와이> 145p
실제로 저는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도스토옙스키도 톨스토이도 나쓰메 소세키도 읽지 않았습니다. 간단한 고전 몇 권 외에는 미스터리와 SF, 만화, 프랑수아즈 사강과 다자이 오사무와 다치하라 마사아키만 줄곧 읽었죠. 그래도 자신이 읽은 것을 일러스트로 그리고 감상문을 스는 등, 저 혼자 무언가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는 배울 시간이 아주 많습니다. 제 나이 쉰이 되어서야 처음 읽은 고전도 무척 많고, 옛날 영화도 조금씩 보고 있습니다. 공부는 몇 살이 되는 할 수 있죠. 이런 자세는 고등학교 수업 때 혼자 멍하게 지낸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어른이 된다는 건> 41p
그렇다면 사람은 뭘 하기 위해 태어났을까요. 저는 각자가 자기 자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자신을 끝까지 관철하면, 왜 그런지는 몰라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더군요. 인간이란 애당초 그렇게 생겨 먹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102p






오랜만에 마거릿 애트우드를 읽었다. <글쓰기에 대하여>, <나는 왜 SF를 쓰는가>, <먹을 수 있는 여자>를  연달아 읽었다. 앞의 두 에세이집은 모두 올해 출간된 신간이다. 좋아하는 작가가 국내에서 유명해지면 좋은 게, 작품뿐 아니라 강연을 담은 책이나 에세이도 속속 번역돼 출간된다는 점이다. <글쓰기에 대하여>는 제목대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한 애트우드의 지적인 고찰이다. 단테와 셰익스피어, 에밀리 디킨슨과 에이드리언 리치, 뒤라스와 앨리스 먼로, 톨킨과 스티븐 킹까지 영미권 작가들을 인용하면서, 작가라는 사람의 삶, 글쓰기의 무게와 즐거움을 논한다. 여섯 번의 강의를 글로 옮긴 책인데, 애트우드는 이 강의를 하면서 스스로도 '나는 어떻게, 무엇을, 왜 쓰는가'에 대해 물었던 것 같다.


<나는 왜 SF를 쓰는가>는 그가 SF라 불리는 장르에 대해 쓰게 된 계기와 이 장르에 대한 고찰을 담은 책이다. 어릴 적 낙서와 그림에서도 '상상력의 세계'에 매료됐던 어린 애트우드를 발견할 수 있다. SF 장르와의 "평생에 걸친" 관계를 되짚어보는 셈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작품들의 세계관은, 어릴 적부터 찬찬히 쌓여왔던 결과물이다. 애트우드는 본인의 작품이 왜 SF로 분리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부터 시작한다. SF가 뭐길래? (그는 자신을 SF작가로, 자신의 작품을 SF로 한정 짓지도 않는다.) 애트우드는 본인은 '일어나지 않을', '근거 없는' 이야기는 소설로 쓰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녀 이야기>, <증언들> 등 그의 작품들이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지만 마냥 절망적이지 않은 점은 이러한 작가의 신념 때문이 아닐까. '디스토피아'를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 말이다.

역사적으로 유스토피아는 행복한 이야기였던 적이 없다. 크나큰 기대는 몇 번이고 거듭해서 내동댕이쳐졌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의도로 행해진 일들은 사실상 지옥으로 향하는 포장도로를 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 우리는 실수를 바로잡거나, 재난을 불러일으켰던 방향을 반대로 바꾸거나, 불결한 소굴을 정화하거나, 많은 이들의 삶에 존재하는 온갖 비참함을 개선하려는 시도를 애초에 하지도 말아야 하는 걸까? 물론 그건 아니다. 우리가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건, 유지보수 작업과 사소한 개선에 힘쓰지 않는다면 상황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비탈길을 내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는 힘이 닿는 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중략)…우리는 우리 자신, 불완전한 그대로의 우리 자신에게 꼼짝없이 매여 있지만,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나 자신이 실생활에서 유스토피아로 향하는 길을 밟아 가도록, 할 수 있는 한 준비하는 것이다. -<나는 왜 SF를 쓰는가> 158p


<먹을 수 있는 여자>는 1969년에 출간된 애트우드의 첫 장편소설이다. 제목만 보면 대체 무슨 얘기인가 싶다. 하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계속 빠져든다. 소설은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는 메리언이라는 여성의 시점에서 흘러간다. 그녀의 일상을 통해 당시의 현실이 어떻게 여성들의 숨통을 조이는지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사회에서 부여한 역할'과 스스로의 자아 사이에서 느끼는 괴로움, 이어지는 거부와 반항을 나타냈다.


주인공인 메리언은 대학을 나와 그럭저럭 한 여론조사 회사에 다니는 젊은 여성이다. 그녀에게는 젊고 잘생긴 수습 변호사 피터라는 남자 친구가 있다. 그는 전도유망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지만 대부분의 여자를 약탈자로 간주하고 '여자가 해야 할 일'을 강조하는 남자다. 메리언은 그런 그의 비위를 맞춰주며 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점점 답답함과 거리감을 느낀다. 피터는 결혼을 무덤이라고 생각하지만 점점 결혼하는 친구들이 늘어나자 메리언에게 청혼한다. 이후 메리언은 점점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다. 먹을 수 없는 음식도 늘어난다.


메리언의 주변 남자들은 모두 '남성 위주의 세상'에서 여성에게 사회사 부여하는 역할을 암시한다. 덩컨은 여자를 '남자를 돌보는 도우미'로 생각하는, 안식처로만 여기는 남자다. 친구인 렌은 여자를 성적으로만 보거나, 트로피처럼 떠받들기만 하는 '어린 생각'을 가진 남자다. 친구 클라라의 남편인 조는 여자를 연약한 존재로만 여기며 보호하려고만 한다.


여성 캐릭터도 '혼란'을 겪는 여성들을 대표한다. 친구인 클라라는 출산 휴 삶이 육아에 종속됐다. 룸메이트인 에인슬리는 언뜻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며 홀로 아이를 갖고 싶어 하지만, 결국 '아이에겐 아빠가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 경계선에 있는 인물이다. 결혼 후 여자 직원은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보그 부인(관리자) 까지…


사회가 부여한 역할과 이미지에 대한 여성들의 '거부감'은 현대에서도 계속된다. 소설에서 이러한 거부감은 여성들에게서 '이상 행동'으로 나타난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이 엄마의 환영을 보면서 대화를 나눴듯이, 메리언은 점점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일탈'도 나타난다. 메리언은 자신의 약혼 축하 파티에서 느닷없이 탈출한다. 그리고 덩컨을 찾아가지만, 얻을 수 있는 위안은 없다. 나는 이 지점을 가부장제(남성 1)에서 느낀 답답함이 또 다른 가부장제(남성 2)에서 해소될 수 없다고 해석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것이 1969년이다. 애트우드는 이 작품을 스물세 살에 기획해 스물네 살에 집필했다. 바로 그 당시, '젊은 여성' 애트우드였기에 쓸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결혼과 출산, 육아로 대표되는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관문’에서 여성들은 큰 혼란을 느낀다. 메리언이 거부감을 느꼈듯이, 모든 여성이 아내와 어머니를 꿈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사회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정해두기 마련이고, 그 역할극에서 여성의 자아는 지워지거나 대체되기 마련이다. 소설은 그런 갈등 속에서(시스템 자체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메리언이 ‘대체 뭣 때문에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됐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너무 우울하거나 진지하지만은 않게 그려냈다.


당시로서는 ‘앞서가는’ 작품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이라고 다를 바 있나?) 그때부터의 고민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는 게 아닐까. 애트우드는 희망의 틈을 남겨뒀다. 메리언은 결국 나중에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 '먹으면서' 음식과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주도권을 가진 자아를 부분적으로 되찾는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탈고한 지 4년 만인 1969년에 드디어 세상의 빛을 보았고 마침 그때 북미에서 페미니즘의 열풍이 시작됐다. 당장 이 작품을 페미니즘 운동의 소산으로 간주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누가 내게 묻는다면 페미니즘이 아니라 프로토 페미니즘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 책을 쓴 1965년에는 여성운동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다른 수많은 여성들처럼 숨어서 베터 프리던과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을 읽기는 했지만 내게 예지력은 없었다. 초반부에 여주인공 앞에 놓인 선택의 갈림길이 막판까지 그대로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미래가 없는 직장 생활을 계속할 것인가, 결혼을 탈출구로 삼을 것인가. 하지만 1960년대 초반에 캐나다의 젊은 여성들은 아무리 고학력자라도 이런 고민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일 것이다…(중략)…

1979년 에든버러에서
 마거릿 애트우드

- <먹을 수 있는 여자> 작가 서문 중






<폭풍의 언덕> 은 서른 살에 요절한 에밀리 브론테가 죽기 1년 전 남긴 단 한 편의 소설이다. (그 한편이 3대 비극과 세계 10대 소설의 반열에 오르다니) 제목대로 정말 폭풍 같은(?) 이야기다. 어쩜 이렇게 축축하고 황량하고 음울하고 음산하면서도 격정적인 분위기일까 생각이 든다면...브론테 자매의 생가가 있는 영국 요크셔의 Haworth 영상을 찾아보면 이해가 된다.(꼭 가보고 싶다) 야만적이면서도 열정적이고, 가장 날것의 인간 본능이 느껴지는 이런 작품을 읽으면 ‘그때도?’란 생각. 질투, 사랑, 배신, 복수, 슬픔, 분노...폭풍이 몰아치는 황야에서도 그 많은 감정들이 이어진단 꽤나 두꺼운 책인데 흡입력이 엄청나다. 이게 궁극의 필력인가…


<어른의 어휘력>은 '국어' 공부를 좀 더 해보자는 차원에서 읽었다. (이 책의 저자가 쓴 다른 책들도 12월 독서 목록에 올려놨다.) 글을 쓰다 보면 멋있게 표현하고 싶어도 막상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단어를 잘못 쓰는 경우도 많다. 다 어휘력의 문제다. 우리는 많은 어휘를 알고 있지만, 직접 쓰는 어휘는 한정적이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좋은 어휘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억울하지 않나. 모국어 어휘력도 계속 갈고닦아야 발전한다. 말하기도, 글쓰기도, ‘논리 정연한•창의적인 생각’도 결국 어휘력이 가른다.


<악의 꽃>과 <시간의 빛깔을 한 몽상>은 민음사의 세계 시인선 시리즈다. 한 달에 한 권씩 저번 달부터 읽고 있다. 하루의 끝을 시 한 편으로 보내보자는 야심찬(?) 계획을 실행 중이다.





생각이 많았던 탓일까. 이래저래 주절주절 길게도 써버렸다. 생각들도 붙잡지 않으면 흘러간다는 핑계를 대보면서. 더 열심히 기록해보고자 한다. 이제 2021년이 한 달 남았다. 남은 시간 잘 마무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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