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불안을 감당하는 일이다
왜 섹스가 그토록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다. 나의 연인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다른 누군가와 한 섹스. 이런 섹스가 있었다는 사실은 관계에 되돌리기 어려운 균열을 만든다. 상대가 누구인지, 상황이 어땠는지, 그 무게가 얼마나 가볍고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 알면 어떻게든 봉합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을 납득시켜줄 연인의 설명을 구하지만, 균열은 메워지지 않는다. 이미지는 느닷없이 틈입하고, 연인의 진심어린 참회도 그 틈입을 막을 수는 없다.
드라마 <이번 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JTBC)는 아내의 바람을 알게 된 한 남자의 분투기다. 그는 극 내내 분투하는데,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잤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기 위해서다. 사실 자신들의 결혼생활이 위태로웠음을, 그 위태로운 안정 상태를 유지해온 것이 아내의 노동이었음을 직시하고 그가 무심한 동안 자라났던 아내의 고독과 욕망, 선택을 이해하고자 그야말로 피나게 노력한다. 그러나 아내와 새 출발을 약속하는 결정적인 순간, 이미지가 틈입한다. 그가 없는 곳에서 벌어졌던, 온통 상상에 맡겨져 도무지 통제할 수 없이 뻗어나가는 정사(情事)의 이미지가. 연인의 섹스에 대해 알게 되는 일이란, 당사자가 아무리 용서를 빌어도, 수백 번 그 의미의 하찮음을 설명해도 그런 조리 있는 언어로는 닿을 수 없는 심연을 갖는 일이다.
그런데 왜일까. 내가 빠진 연인의 섹스는 왜 이토록 우리에게 치명적으로 타격을 입힐까. 배신감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신뢰를 저버리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 섹스에는 있다. 나의 연인이 다른 수컷의 아이를 배거나, 내 아이를 돌보지 않고 다른 암컷들에게 떠나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라는 진화심리학의 설명도 뭔가 충분하지 않다. 그 본능은 지나치게 실용적으로 느껴진다. 보다 더 근본적인 관계의 불안이 그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면, 연인이 다른 누군가와 했을 섹스란 모든 것이 자명하고 우리가 서로에게 더 없이 투명한 것 같은 순간에도 사실은 그 내면을 알 수 없는 타인이라는 진실을 가장 명백하게 상기시키는 기호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분리되어 있듯이 우리의 욕망 또한 분리되어 있어 우리는 결코 서로를 완전히 그러잡을 수 없다. 살 부비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과거를 샅샅이 털어놓고 미래를 아무리 굳게 약속해도 우리가 타인인 한 마지막 한 겹은 절대 투명해지지 않고, 이로써 사랑은 결정적으로 불안해진다. 내가 참여하지 않은 섹스란 그의 가장 내밀한 영역의 은유다. 나는 그 섹스의 의미를 영원히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그의 해명으로는 해명되지 않으며, 홀로 무한히 증폭되는 것이다. 그 섹스는 그간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상대의 모든 것들을 다시 물음에 부친다. 그는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이 맞는가? 확신할 수 있는가?
섹스는 어느 순간 가시화되는 극단적인 기호일 뿐, 사랑의 기본적인 세팅이 이와 같다. 사랑의 바꿀 수 없는 조건은 사랑에 참여하는 주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모두 시간 속에서 흔들리는 존재들이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듯 그의 마음도 흔들린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불투명한 타인이라는 것, 그러나 우리가 사랑으로 약속한 것은 흔들리지 않는 안정이라는 상호모순된 상황이 우리의 사랑을 힘들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불안을 감당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