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민 Jan 26. 2016

우리는 그저 다시 사랑할 수 있을 뿐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상실의 풍경


몸속의 무엇인가가 떨어져 나가고 그 자리를 메워줄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채, 그것은 순수한 공동(空洞)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때문에 몸은 부자연스럽게 가벼웠고, 소리는 공허하게 울릴 뿐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나는 오랫동안 이 문장을 상실의 풍경으로 기억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떨어져 나가고,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몸이 이상하게 가벼워 자꾸만 휘청인다. 예기치 못하게 터져 나오는 울음이나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면서 저지르는 이상한 행동들, 아무리 바로 잡아도 다시 엉키는 생각 같은 것들이 다 그래서였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으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질 수밖에


시간이 흐른 후에 베레나 카스트의 문장을 읽고, 하루키의 표현이 단순한 비유가 아님을 알았다. 분석심리학자인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와 함께 죽는다고 말했다. 꼭 죽음이 아니어도 그럴 것이다. 어떤 형태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나의 일부 역시 잃는 일이며, 내 어딘가가 텅 비어버리는 경험이다. 


그러니까 이별에 관한 한 이런 수식이 성립한다. 하나와 하나가 모여 둘이 된다. 너와 나의 합은 2다. (1+1=2) 그런데 거기서 네가 빠지면 내가 남는 게 아니라 나도 사라진다. 둘에서 하나를 뺐는데 0이 된 것이다. (2-1=0) 상실의 순간, 우리는 0의 상태를 경험한다. 네가 떠났으니 다시 나로 돌아가면 될 것 같은데 무엇이 나였는지 알 수 없다. ‘0’은 존재의 흔들림을 상징하는 기호다.


이별의 수식: 2-1=0


하루키의 말대로라면 존재가 흔들린다는 건 내 안에 순수한 공동이 생기는 일이고 그건 몸이 부자연스러워진다는 의미다. 몸이 부자연스러우니 우리는 상대적으로 이상한 일들을 자주 벌이게 된다. 자기 성애, 대체 대상에 대한 집착, 자폐 공간에 은거, 자기 파괴, 조증으로의 폭발 등은 정신분석학이 드는 상실 이후의 증상들이다. 이별한 이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기행동(奇行動)들을 경험한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마음이 비어버렸는데, 기행은 필연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를 상실하는 이야기는 보통 기행동에 관한 이야기다. 인물들은 이상한 일들을 벌이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에서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짐작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상실의 시대』의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잃고 레이코와 동침한다. 기즈키가 죽고 난 뒤 재회한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결합이 자연스러웠듯 나오코의 자살 이후 다시 만난 두 사람 역시 자연스럽게 섹스를 한다. 와타나베에게 레이코는 나오코라는 존재를 공유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남겨진 자들끼리의 결합은 때로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혹은 순간이나마 죽음을 무화시키고 감정을 끊어내기 위한 일이다. 그래서 커티스 시튼펠드의  『퍼스트레이디』에서 앤드류를 잃은 앨리스는 그의 형 피트와 관계를 가진 뒤에 독백한다. “피트 이모프와 함께 누워서, 우리의 맥박과 호흡이 함께 잦아드는 동안, 나는 이것밖엔 없을 거라고, 나의 슬픔보다 더 강력한 것은 오직 이것밖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민음사, 2006)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기행동들의 향연이다. 주인공 오스카는 9/11 테러로 아빠를 잃은 아홉 살 소년이다. 오스카는 아빠의 유품 중에서 ‘Black'이라고 적힌 봉투와 그 속의 열쇠를 발견하고 열쇠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뉴욕시의 모든 블랙 씨를 차례로 방문할 계획을 세운다. 열쇠가 무엇을 의미할지, 결국 찾고자 하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실낱같은 희망으로 아빠의 흔적을 더듬는 일에 매달린다. 한편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한순간에 가족과 연인, 뱃속에 있던 아이를 모두 잃은 인물이다. 할아버지는 폭격 이후 말하지 못하게 된다. 죽은 연인에 대해 말하려 하자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날부터 그는 대신 글로 쓰기 시작한다.


할아버지의 실어(失語)는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말을 잃었을 뿐 글은 쓸 수 있으니 일반적인 실어증과는 다르다. 그는 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게 된 것처럼 보인다. 오스카가 만난 블랙 씨들 중에서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기행을 멈추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오스카네 위층에 사는 블랙 씨는 24년 전에 아내를 잃은 뒤 집 밖으로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 아내와 쓰던 침대에 못을 하나씩 박아 넣어 이제 그 침대는 못 투성이가 됐다. 루스 블랙은 남편이 죽은 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86층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도저히 집에 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상실 후의 기행들은 어쩌면 내게는 너무나 선연한 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발악인지도 모른다. 


내게는 선연한 이 고통이 환상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발악


상실 후에 가시지 않는 고통을 몸으로 겪어본 이들은 더 이상 가지지 않으려 한다. 무언가를 잃는 일이 이렇게나 고통스럽다면 더는 잃을 것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결심은 기행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는 고통 앞에서 방어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할머니를 떠난다. 그는 언젠가는 잃을 것들을 가지는 일이 두렵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다시 사랑하기를 선택한다. 오스카의 할머니 역시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녀는 남편과 달리 다시 한 번 살아보고자 한다. 할아버지가 떠난 후, 할머니는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운다.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 결혼을 하고 오스카가 태어난다. 9/11 테러로 아들(오스카의 아빠)이 죽었을 때 할머니는 다시 한 번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맛본다. 그러나 오스카의 연극을 보러 갔던 일을 떠올리며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오스카, 낯선 사람들 앞에서 네가 무대에 섰던 일을 기억하고 있단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 저 애는 내 거예요. 일어나서 외치고 싶었어. 저 아름다운 아이가 내 거예요! 내 거라고요! 

 너를 보고 있노라면, 자랑스럽고도 슬펐지.

 세상에. 그의 입술. 네 노래.

 너를 볼 때면, 내 삶이 이해가 되었어. 나쁜 일조차도 다 이해할 수 있었어. 너란 존재를 이 세상에 있게 하기 위해 그 모든 것이 다 필요했던 거야. 

 세상에. 네 노래들.

 내 부모님의 삶도 이해가 되었어.

 조부모님의 삶도.

 언니의 삶까지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인생은 상실의 연속이라, 무언가를 가진다는 건 언젠가는 그것을 잃는다는 의미다. 우리에게 무언가가 소중하다면 그건 언젠가 우리가 그만큼 아프리란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소중한 것이 생기는 순간 예방주사를 맞듯 그것을 잃는 일을 상상하게 된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을, 그들의 죽음을 끊임없이 예감하고 그려 본다. 그리고 예감대로 그들이 떠났을 때 우리는 2-1이 1이 아니라 0이라는 걸 알게 된다. ‘2-1=0’이란 수식의 확인은 상실의 고통 앞에서 내 모든 논리와 이성이 무화되는 경험이다. 몸은 부자연스럽게 가볍고 존재는 뿌리째 흔들린다. 다시는 사랑하지 못할 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애초에 1+1=2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스카의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만나 아이를 낳았고 거기서 다시 오스카가 태어났다. 그녀는 모두를 잃었고, 동시에 전부를 얻었다. 그러니 그녀는 오스카를 보며 모든 것을 이해한다. 느닷없는 아들의 죽음도, 자신의 고통스런 생애도, 폭격으로 재가 된 부모님의 삶도, 아이를 배고 죽은 언니의 삶도.


사랑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어떤 것을 탄생시킨다. 그건 새 생명의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고 때로 살아가야 할 이유이거나 생각지도 못한 다른 삶이기도 하다. 그렇게 무언가가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한 번 사랑하고 나면 그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 상실이 아픈 건 당연하다. 1+1은 2가 아니라 ∞이기 때문이다. (1+1=∞) 그 무한대를 선사한 하나를 상실했으니 그건 곧 전부의 상실일 수밖에. (∞-1=0)


우리는 그저 다시 사랑할 수 있을 뿐 


말하자면 상실의 고통은 우리가 무언가를 진정으로 사랑함으로써 무한대가 되는 순간을 경험했기에 치러야만 하는 대가다. 와타나베의 말처럼 물론 이 사실을 안다 해도 슬픔은 치유되지 않고, 우리는 실컷 슬퍼한 끝에 무언가를 배우는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배운 어떤 것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통과 슬픔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 이후다. 이를테면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 장면, 와타나베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미도리에게 전화를 건다. 나는 오래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서야 나는 와타나베가 어떻게든 다시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음을 이해한다. 


우리는 그저, 다시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랑에 관해 씁니다.

페이스북, 그리고 네이버 블로그에서 더 많은 글을 볼 수 있습니다.

공저로 『내가 연애를 못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인문학 탓이야』(알마, 2014)가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