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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민 Feb 25. 2016

연애의 갑과 을에 관한 명상

‘갑의 시대’에, 을의 연애를 예찬한다

“서로에게 홀딱 반한 두 연인이 욕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라도, 언제나 그들 중 한 사람은 더 침착하고 덜 몰두해 있는 법이다. 그 사람이 남자이건 여자이건, 수술집도의 또는 사형집행인의 역할이고 나머지 사람이 환자이며 희생자가 된다.” (보들레르, 『벌거벗은 내 마음』)



보들레르의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직감했다. 보들레르도 ‘을’이었음을. 언제나는 아니었을지언정 숱한 수술 집도와 형 집행을 당해왔던 것만은 분명하다. 관계의 권력 문제에 깊이 천착하는 이는 언제나 약자이기 때문이다. 고통이 깊었던지, 연애의 갑과 을을 수술집도의와 환자, 사형집행인과 사형수에 빗댄 보들레르의 통찰은 그야말로 탁월하다. 이 둘을 가르는 게 선택권의 유무라는 사실을 보들레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살고자 하는 환자는 의사가 내린 수술 결정에 선택권이 없다. 사형집행인에 대해서라면 사형수는 살고자 할 수조차 없다. 갑은 선택하고 결정하지만, 을은 그에 대해 호소할 수 있을 뿐 결국은 받아들여야 한다. 


연애의 갑을관계


사랑은 권력게임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것 같지만, 다른 모든 관계와 마찬가지로 연인 사이에도 갑과 을은 존재한다. 더 좋아하는 사람, 더 간절한 사람이 을이다. 연애의 권력차 문제를 갑을관계로 보는 건 새로운 관점은 아니어서 포털 검색만으로도 이 문제를 논한 다양한 글들을 찾을 수 있다. 상대의 도를 넘어선 갑질에 심신이 피폐해진 을의 사연도 나오고, 늘 을의 연애만 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을 꼽아놓은 글도 나온다. 여자는 자기가 갑인 연애/결혼을 해야 편하다는 이야기도 단골 레퍼토리다.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갑을의 비유는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갑이 될 것인가, 을이 될 것인가’ 혹은 ‘이 연애에서 나는 갑인가, 을인가’ 같은 물음은 이제 연애의 주요한 문제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좋아서 하는 연애에서 좋아하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더 좋아하면 불행해진다는 관계의 아이러니가 사람들로 하여금 갑을 문제에 더욱 핏대 높이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연애 갑을론의 통설은 ‘을이 되면 고생한다’다. 보들레르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 같은 자유인(?)들에게 선택권의 박탈은 너무나 큰 고통이다. 나는 없는 선택권을, 나를 상대로 양껏 누리는 그/그녀를 지켜보며 선처를 호소하는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건 거의 모욕적이라 우리는 매 순간 상대뿐만 아니라 우리를 막아서는 자존심과도 협상해야 한다. ‘그렇게까지 해야 해?’ 여기에 답하지 못하면 관계는 끝인데, 막상 끝내자니 뭔가 분하고 그 사람이 아쉬운 것도 나여서 더 분하다. 하지만 자존심을 죽이고 스스로를 다독여 한 번 더 호소해보기로 하더라도 결과는 알 수 없다. 긴 호소 끝에 남겨지면 오히려 더 비참하다. 


진퇴양난(進退兩難). 을은 언제나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그에 대한 사랑(“어쨌거나 그를 원한다”)과 자신에 대한 사랑(“그러나 나를 보호하고 싶다”)을 저울질해야 한다. 그래서 시중엔 갑이 되는 비법을 알려준다는 상품들이 넘쳐난다. 연애고수들의 책과 강의가 그렇게 팔린다. 


시중에 유통되는 이 갑이 되는 기술 가운데, 가장 ‘과학적’이고 효과가 ‘검증’된 것이 픽업 아트일 것이다. 픽업 아트(Pickup Arts)는 여성들을 유혹하는 전문적인 기술을 일컫는데, 이 기술을 갖춘 이들은 스스로를 픽업 아티스트라 칭한다. 2010년대 이후 대중화되며 일반적인 연애기술 정도로 통용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픽업 아트의 목표는 연애가 아니라 유혹한 여성과 자는 것이기에 엄밀히는 같을 수 없다.


1980년대 미국에서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구축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이른 이 기술들은 일종의 남성-대중지성의 산물(?)이다. 많은 남성들이 침대까지 여성을 유혹할 법칙을 세우고 입증하여 이론화하는 데 자발적으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제공했고, 덕분에 픽업은 최면술과 여성심리학, 진화심리학 등 여러 진지한 학문분야들을 자원 삼을 수 있었다. 개인의 경험에 기댄 보통의 연애기술들에 비하면 객관적 토대를 가진 진짜 비법인 것이다. 잘 훈련된 픽업 아티스트들은 여성들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능란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상대를 움직이게 하는 데도, 끝내 마음과 몸을 얻는 데도 능숙하다. 이름을 날리는 픽업 아티스트들은 그야말로 갑 중 갑이라 할 수 있다. 


‘연애고자’가 된 연애고수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명 픽업 아티스트들 중에는 ‘을의 상처’를 가진 이들이 많다고 한다. 순정을 바쳤던 오랜 연인으로부터 처참하게 배신당하거나, 못 생긴 외모나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진심이 번번이  무시당하고  조롱받는 걸 지켜봐야 했거나, 과거 연애의 ‘을’로서 크게  상처받은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픽업에 매진하게 하는 기제는 르상티망(원한)이다. 가난 때문에  상처받은 이가 자신을 깔보았던 사람들을 짓밟아주겠다고 성공에 절치부심하듯, 이들은 픽업을 배움으로써  상처받고 남겨지는 을이 아니라 상처 주고 떠나는 갑이 되기로 작심한 것이다. 절대로 을이 되지 않겠다는 것, 그것이 이들의 다짐이다. 이 르상티망이 뿌리 깊을수록 복수도 처절해진다. 동시에 여러 명을 만나며 섹스에 몰두하기도 하고, 열심히 마음을 얻은 뒤에는 상처주기 위해 헤어지기도 한다. ‘갑질’의 향연이다. 


그러나 르상티망으로 시작된 일들이 대개 그렇듯이 복수는 성공적인데 완전한 해방감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다. 처음엔 카타르시스가 있지만 곧 가신다. 타인에게 똑같은 상처를 준다고 내가 받은 상처가 절로 치유되는 건 아닌 까닭이다.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 오히려 공허감이 엄습한다. 그래서 많은 픽업 아티스트들이 갑질의 대장정 끝에는 전향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던 고향은 내가 떠나온 고향이 아니라더니, 픽업식 연애법에 익숙해진 이들은 돌아가기로 결심하고도 이전의 평범한 연애로 잘 돌아오지 못한다. 가장 과학적이고 효과적인 연애 기술을 마스터하였으니 연애고수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어쩐 일인지 ‘연애고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더 사랑하는’ 을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만, 비교급을 떼고 보면 을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강렬하게 열망하는 일은 그 좌절까지도 감당하는 일이기에 원래 고통스럽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픽업의 길로 접어든 이들은 섹스와 분풀이는 했을지 몰라도 결국 제자리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는 일, 그리하여 또 다른 상처를 감내하는 일이 그들은 여전히 두렵다. 상처와 마주하지 않기 위해 이들은 열망을 줄여왔다. 그 사람이어야 할 이유가 없고, 여자는 널렸다고 스스로를 다잡아왔다. 문제는 그런 자세로 강자의 위치에서 상처 주기를 반복하는 사이  상처받는 일은 더 두려워진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이 두려움을 솔직히 고백할 수도 없다. 그런 고백은 자신을 다시 을로 만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건 오히려 후퇴다. 이들은 권력의 우위에 서는 법을 익히는 대신 권력의 우열이 사라지는 깊은 관계로 들어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갑은 갑이 아니고 을은 을이 아닌 관계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관계가 무르익으면 갑을관계는 무화된다는 사실이다. 끈끈한 연인관계를 오래도록 건강히 유지해온 이들은 안다. 어느 순간을 넘어서면 갑이니 을이니 하는 게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걸. 권력차를 기준으로 한다면 그들 사이에도 갑과 을은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성찰하는 갑’과 ‘비굴하지 않은 을’이란 점이 다르다. 이 관계에서도 때로 갑질이나 주도권 다툼, 자존심 싸움은 일어나지만 금세 자정 작용이 일어난다. 


갑은 상대를 중심에 놓고 자신으로 인한 그의 고통을 상상하기에 스스로 갑질에 제동을 건다. 을은 갑질하는 상대의 내밀한 두려움이나 사정을 이해하므로 자신이 을이 되어 주기로 한다. 그러니 사실 이 갑은 갑이 아니고 을 역시 을이 아닌데, 일상에서의 권력차와는 별개로 서로에게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둘은 같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순간에도 관계를 건 도박은 하지 않는다. 어차피 함께 할 것이기에 서로에게 좋은 방향으로 협상이 쉽다. 을은 갑의 성찰을 믿고 갑은 을의 비굴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까 연애의 을들에게 진짜 필요한 건 픽업 같은 갑을 모방하는 전략이 아니라 갑과 을이 무화되는 상태까지 관계를 끌어갈 방법에 대한 고민이다. 이런 관계의 진전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건 역설적이게도 갑이 아니라 을이다. 갑이야 관계에 딱히 불만이 있겠는가. 을만이 더 나은 관계를 소망하고 실현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을의 자리를 벗어나려 애쓰는 대신 더 철저히 을이 됨으로써 관계를 질적으로 전환시킬 계기를 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을이라 고생인데 더 철저한 을이라니 호구라도 되라는 건가 싶겠지만, 을을 호구라 여기는 그 생각을 바꾸는 게 가장 먼저 할 일이다. 그런 이들은 자신이 더 사랑해서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진짜 그들을 괴롭히는 건 내가 준만큼 돌려받아야 호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주면서 이미 받을 생각이니 늘 빼앗기는 기분이고,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돌려받지 못하면 자존심은 스크래치로 쓰라리다. 이런 대차대조표적인 태도는 더 사랑하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다.


더 철저하게 을이 돼라


H의 사례를 보자. H는 서로 호감이 있다는 건 확인했지만, 경력 상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어 그녀가 요구하는 만큼 관계를 살뜰히 돌볼 수 없다고 통보한 남자 때문에 고민이었다. 둘은 잠시 연애에 합의했었지만, 남자는 관계에의 더 많은 헌신에 대한 H의 요구를 매번 난처해했고 남자의 태도에 마음이 상한 H는 그럴 거면 헤어지자고 했다. 그러나 남자도 H도 마음은 남아, 규정상 연애는 아닌데 루틴한 연락만 빼고 연애에서 하는 일은 다 하는 관계에 들어섰던 것이다. H는 남자 편의에 맞춘 헌신 없는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도, 그를 욕망하는 것을 그만두는 일도 쉽지 않아 날로 심신이 피폐해져가고 있었다. H는 그를 애태울 방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H가 원하는 건 남자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남자에게는 당장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있다. 그는 정말 일로 바빴고, H에게 그렇게까지 신경 쓸 수 없다는 말이 그녀를 가볍게 여겨서 하는 변명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H는 그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자기 마음의 누수를 견딜 수 없었다. 당장 그에게  사랑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은 그 마음이, 거꾸로 그 사랑과 위로를 주지 않는 그를 밀어내라고 명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나는 H에게 그가 하자는 대로 해주라고 했다. 어차피 그를 수용하는 것만큼 밀어내는 것도 힘들다면 아예 온전히 수용해버리라고 했다. 그에게 당장 내 마음에 상응하는 것을 돌려받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가 내 곁에 있음으로 인해 내가 기쁘고 행복한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등가교환을 바라면 자꾸 놓치게 되지만, 사실 상대에게 무언가를 주는 행위는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인 동시에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에겐 다시 선택권이 있다. 나는 정말 주기 싫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잃을 수 없어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다가 억지로 주는 게 선택권이 없는 상태였다면 이제 나는 기쁘게 줄 수도 있고, 그 기쁨을 포기하는 대신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을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건 이런 자발성을 스스로 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반 컵 남은 물을 ‘반 밖에 없네’ 하지 말고 ‘반이나 남았네’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사랑이 대상과의 문제라고 착각하지만 많은 경우 사랑은 내 욕망의 문제다. 내 욕망을 성찰할 때 대상과의 문제도 풀 수 있다. 철저히 을이 되라는 건 지금 당장 상대를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사랑의 본질에 집중하라는 의미다. 


을의 연애를 예찬한다 


나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욕망을 성찰하고 사랑의 본질에 집중하는, 말로는 이토록 간명한 일이 실제로 해보면 거의 고행이다. 사랑을 기꺼이 주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면  사랑받고 싶은 것은 사람의 본능인 까닭이다. 게다가 내 욕망의 대상이 눈앞에 있을 때 우리는 자주 어리석어져 아이처럼 굴지 않던가.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이런 고행은 영원히 할 수는 없다.


그래서 H에게 조용히 귀띔했던 건 그렇게 을의 자리에서 그에게 사랑을 주며 그 역시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만들라는 거였다. 그렇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누르며 할 수 있는 데까지 사랑한 후에, 도저히 더 버틸 수 없을 때 그에게 이제는 다 소진되었음을 고하라고 했다. 이 고함은 상황을 바꾸기 위한 협박이어서는 효과가 없다. 이제까지 스스로 주었던 사랑만으로 충분하여 정말로 그를 떠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이후의 일은 상대의 소관이다. 나의 빈자리에 절망하고 붙잡는 것도, 떠난 후에 후회하는 것도. 만약 잡는다면 이제 이 관계는 갑을이 예전만큼 신경 쓰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H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에게로 갔다.  


한편 이렇게 하고도 결국 사랑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게 의지만으로 모든 게 극복되지는 않는 영역인 것이다. 그러나 결과와 무관히 그 시간들은 온전히 나의 것으로 남는다. 실패의 가능성을 끌어안고서 무언가를 뜨겁게 열망하고, 나를 비우며 한계를 시험하고, 사랑의 본질을 체험해보는 그런 기회는 일생에 결코 자주 오지 않는다. 성장과 숙성의 시간들이다. 그래도 고통은 고통이라, 열망하던 것을 잃고 나면 한동안 많이 아플 것이다. 이렇게 닥쳐오는 삶의 고통들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온전히 경험하여 내 삶의 자원으로, 내 삶의 고운 주름으로 삼는 수밖에는.


‘갑에의 명령’들이 시대정신처럼 내걸린 시대에, 고통스럽고 찬란한 ‘을의 연애’를 예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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