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크리스마스 여행(뉴욕+워싱턴)
여행 Day 5.
애들을 데리고 시티 투어를 다니는 건 생각보다 많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구글맵을 찍어보니 걸어서 10분이 걸린다. 실제로 걸어보면 3-40분 걸린다.
아이들은 앞만 보고 걷지 않는다. 돌멩이가 나오면 발로 차야하고, 나뭇가지가 나오면 주어야 한다. 올라가서 걸어갈 수 있는 돌계단이나 돌덩이가 나오면 죄다 올라야 하고, 오르내리기를 반복할 수도 있다. 아이스크림 트럭을 보고 밥도 먹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사달라는 아이를 달래야 하고, 달래다 혼내야 하고, 아이스크림도 못 먹고 혼나는 바람에 입술이 삐죽 나온 아이를 달래야 하고, 그러다 한번 더 혼내기도 한다. 자로 잰 듯 반듯한 직선 코스의 인도에서는 두어 번 이상 달리기 시합을 벌여야 하고, 그러다 자빠지는 아이의 무르팍을 확인해야 하고(어린이들 바지에 난 구멍은 대부분 자빠져서 생긴 구멍이다), 우는 녀석은 또 달래야 하고,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못 걷겠다고 하면 업어야 한다.
오늘도 유사한 상황은 빈번하게 일어났고, 너무나도 일상적인 풍경이라 이젠 그러려니 하며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워싱턴을 걸어 다녀보니 박물관과 박물관 사이 거리가 상당하고, 한번 박물관에 들어가면 두 시간은 기본으로 돌아다니기에 아이들과 여행하기가 만만치 않다.
오늘은 내셔널 갤러리를 갔다가 흑인 역사박물관에 가는 일정이었는데, 길에서 많은 시간을 사용한 나머지 흑인 역사박물관 예약 시간을 맞춰야 해 내셔널 갤러리는 포기했다.
미국에 살아보니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꽤 중요한 어젠다로 느껴지는 주제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인종, 인종 갈등 관련 문제이다. 내가 사는 타운에는 꽤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데 내가 만나본 주민들은 이를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심지어 내 친구(그녀는 백인이다)는 자신이 어릴 때 백인만 사는 타운에 살았다며 자기 아이들이 다문화 환경에서 지낼 수 있어 다행이라 했다.
주변에 유대인이 많아 가끔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지만, 흑인 친구는 없어서 늘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리하여 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에 갔다.
1400년대부터 흑인이 어떻게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 납치되어 팔려갔는지 기록되어 있었다. 큰아이는 학교에서 배운 게 있어 설명을 보고 들으며 어느 정도 이해를 했지만, 작은 아이는 납치, 노예 등의 단어를 설명해 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서 애를 먹었다. (뭐라도 설명을 하지 않으면 아이가 박물관 투어에 흥미를 못 느낄 테고, 중간에 짜증이라도 내면 급하게 박물관 투어를 종료해야 할 테고, 그러면 내가 너무 아쉬울 것 같아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1800년대 남북전쟁 시기까지 노예의 생활상, 자유를 찾은 흑인들이 커뮤니티를 만드는 과정, 1900년대 흑인 차별 정책, 그 이후 차별 정책을 철폐해 가는 과정, 마지막은 버럭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미국 흑인 역사 500년을 살펴보니 오바마 대통령 당선이 흑인 커뮤니티에 얼마나 큰 변화였을지 실감 났다.
아이들은 흑인 셀러브리티 코너를 아주 좋아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운동선수, 배우, 예술가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일단 전시 공간에 들어가면 재즈가 흘러나오고, 힙합의 탄생 배경을 알 수 있고,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 오프라 윈프리, 윌 스미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박물관이 리뉴얼을 한다면 버락 오바마 대통령 이후 미국 사람들은 어떤 장면들로 흑인 박물관을 업데이트할까? 아프리카에서 잘 살던 사람들이 납치 당해 아메리카 대륙에 와서는 노예로 팔려나간 사람들의 역사 기록물을 보며 아시안에 대한 인식은 어떨까 궁금했다. (인근에 아시안 박물관도 있으나 다음 기회에…)
박물관 내에서 밥 먹은 시간 포함 4시간을 머무르고 나오니 곧 해가 질 시간이었다. 큰아이는 생각해 볼 게 많았다며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했고, 작은아이는 이제 어디 가냐며 다음 행선지를 묻기 바빴다.
백악관 인근까지 걸어 철조망 너머 백악관 건물과 철조망에 붙어 백악관을 사진에 담는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경찰들을 봤다. 큰아이는 조바이든이 방에서 쉬고 있을 거라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침부터 밀크티가 마시고 싶다는 아이들을 위해 공차를 찾아 밀크티를 한잔 마셨다.
여행 중 꼭 한 번은 수영을 하고 싶어 수영장이 있는 호텔을 골랐었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싱가포르에서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즐긴 수영을 상상하며 작은 호텔 수영장을 전세 낸 듯 2시간 신나게 놀았다.
큰아이가 작은아이에게 물에서 뜨는 법을 가르쳐줬다. 나보다 훨씬 나긋나긋하게 설명도 잘하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북돋워주고, 작은아이가 뭔가 해낼 때마다 칭찬도 잘한다.
용기를 내어 물속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아이들처럼 하루에 조금씩 매일 해서 365일이 흐르면 훌쩍 커있을 거라고… 다짐하듯 말이다.
집에 돌아가면 흑인 관련 책을 찾아 아이들과 읽어보기로 했고, 수영장도 자주 가기로 했다. 여행을 하면서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을 찾아보는 건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