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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멜리 Amelie Jun 27. 2024

12. 아이 어휘력이 떨어져요. 예상치 못한 교사의

언어 너머 어딘가, 이중언어 쓰는 아이가 엄마인 내게 열어준 또다른 세상

지난해 9월, 둘째 아이는 유치원에 입학하며 초등학생 누나와 노란 스쿨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주(State) 혹은 타운(town)에 따라 만 6세에 시작하는 유치원이 정규 초등과정에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 동네가 그러하다.


마냥 아기 같은 둘째가 제 덩치만 한 가방을 메고 스쿨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은 여전히 생경하다. 씩씩하게 스쿨버스의 높은 계단을 올라 버스 좌석에 앉고서 창밖을 향해 손 흔드는 아이를 보며 우리 집에 더 이상 ‘아기’는 없다는 생각과 함께 ‘한 시절이 이렇게 저무는구나’하는 감상에 빠지기도 한다.


터울이 있는 아이를 키우는 집이 그러하듯, 둘째는 큰아이보다 ‘대충’ 키웠다. 아이가 수월한 기질을 타고나기도 했지만, 큰아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기 바빴던 내가 소홀한 틈을 타 아이가 알아서 성장한 느낌이 들 때가 더 많다.


미국에서 둘째의 유치원 입학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아이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학교를 오가는 누나의 모습을 몇 개월 동안 지켜봤고, 학교를 편하게 느끼도록 도와주기 위해 굳이 학교 놀이터까지 가서 놀았던 주말들도 많았기에 마음의 준비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아이의 인생 전체라 할 수 있는 지난 4년을 싱가포르에서 지냈으니, 영어에 대한 어려움도 없어 보였다.


'네이티브 스피커'라 생각한 아이의 영어가 부족하다니


아이는 머릿속에 생각이 많은 사람을 그렸다. 요즘 아이는 머릿속에 생각이 많은가 보다.


입학 두 달 후, 둘째 아이 담임 선생님과 첫 번째 면담이 있었다. 선생님은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활발하고 유쾌한 모습이 표정과 손짓에서부터 느껴지는 분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학교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친구들과도 곧잘 어울리고, 선생님들과도 관계가 좋다며 ‘아름다운 아이’라며 칭찬했다. 아이에 대한 선생님의 긍정적인 피드백은 엄마인 나의 어깨를 으쓱하게 할 정도로 기분 좋은 칭찬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의 ‘국어’라 할 수 있는 영어 수업의 커리큘럼에 관해 설명했고, 현재 아이의 언어 이해 상태도 짚어줬다.


“혹시 아이가 영어를 사용할 때 어려움이 느끼는 것을 본 적이 없나요? 아이가 또래 친구들보다 어휘력이 떨어져요. 사물을 인지하지만, 영어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런 경우 한국어로 어떻게 표현하냐고 물어보면 한국어로 무언가 답을 해요. 그 말을 내가 못 알아듣는 게 문제지만요.”


아이의 언어에 대한 선생님의 평가는 생각지도 못했다. 태어난 지 두 달 무렵 싱가포르에서 살기 시작한 둘째 아이는 그때부터 영어에 노출되었다. 그렇기에 네 식구 중 유일한 ‘네이티브 스피커’라 생각한 아이의 영어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말 자체가 충격이었다. 집에서는 대부분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었고, 내가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기에 부족한 영어를 눈치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선생님은 아이의 인지력, 공감 능력 등에 문제가 없고, 어휘력이 다소 낮은 것뿐이니 개별 영어 수업을 보충하며 상황을 살펴보자고 했다. 이미 학교에서는 아이에게 추가 개별 수업이 진행 중이었고, 언어 담당 선생님과도 짧게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참고로 미국 초등학교의 경우 입학 또는 전학 후 영어 능력을 테스트하고, 학생의 영어 레벨에 따라 추가 수업 필요 유무를 양육자에게 알려준다. 이민자의 나라인 만큼 학생들이 가정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를 확인하고, 정규 교과 과정을 따라갈 수 있는 영어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면밀히 살피는 과정이 공교육 내 시스템으로 마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밤마다 악몽 꾸며 어린이집 가기 싫다 떼쓰던 아이


둘째의 언어에 대한 피드백을 듣고 집에 오는 길, 아이가 이유 없이 불편해했던 일상의 단편들이 떠올랐다. 싱가포르에서 한동안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기 싫어했고, 밤마다 악몽을 꿨다.


아침마다 등굣길에서 떼를 쓰는 통에 목마를 하고 어린이집에 갔던 날도 수두룩했다. 어디를 가나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내 뒤에 숨던 아이가 가졌던 어려움은 소심한 성격 탓이 아니라 부족한 언어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이가 힘들어한 순간들이 모두 언어에서 시작된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동안 아이의 세상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추가로 진행되는 영어 수업을 아이가 잘 따라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워 줬다. 집에서는 영어와 한국어로 더 많은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영어와 한글 문자에 노출되는 빈도도 더 높이기로 했다. 하나의 언어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니 더디 가더라도 둘 다 골고루 노출하며 언어에 대한 자신감을 쌓아나가는 것이 방법이라 믿었다.


동물 이름에 대해 공부한 날 칠판 모습, 좋아하는 것들의 이름을 먼저 배우기로 했다.


해가 바뀌고 담임 선생님과의 두 번째 면담이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내심 아이의 영어 실력이 늘었기를 기대했고, 선생님의 애정 어린 피드백을 서둘러 듣고 싶었다. 면담을 위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선생님은 나를 안아주며 환영했다.


선생님은 그동안 아이가 해온 활동지와 평가지를 보여주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고 했다. 글자를 익히고 쓰는 일에 아이는 적극적이고, 그만큼 어휘력도 많이 늘었다며 칭찬도 곁들였다. 아이의 성장과 변화에 대한 선생님의 칭찬은 나를 안심시켰고, 살짝 불안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학교를 다녀오면 아이는 친구들 이야기를 곧잘 한다. 친구들과 하는 놀이 이야기도 늘어놓고, 친구에 대해 알게 된 부분을 나에게 들려주기도 한다. 언어에 대한 자신감이 조금 붙어서일까, 아이가 스스로 만들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도 한층 두터워지고 넓어지는 것 같다.  


언어가 닿지 못하는 곳에서 예술이 싹튼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언어 환경에서 아이를 키우면서 예상하지 않은 상황을 맞닥뜨리면 언제나 숙제를 받아 안게 된다. 아이의 이중언어는 그중 하나이다.


처음엔 언어 발달이 늦어질까 봐, 혹은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부터 앞섰다. 하지만 지금은 걱정, 불안과는 다른 방향으로 더듬이가 뻗어간다.


나의 성장 과정과 180도 다른 아이의 세계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려 애쓴다. 자연스레 궁금한 점들이 많아진다. 아이가 한국어로 소통하는 세상과 영어로 소통하는 세상은 어떻게 다르게 생겼는지,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드나들다 놓치는 생각들이 있는지, 한국어나 영어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 제3의 세상이 아이의 머릿속에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학교에서 개미에 대해 배운 아이는 고요히 앉아 땅속 개미집을 그렸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아이가 개미집을 들여다보고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간 예술이 시작된다고 누군가 말했다. 아이에게 아직 두 가지 언어가 닿지 못한 영역이 있다면 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색깔의 예술이 꿈틀거릴 수도 있지 않을까?


부족한 언어를 차곡차곡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과 동시에 지금 당장 손에 쥔 언어로 채울 수 없었던 아이의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언어화’되고 있는지 함께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아이를 내 무릎에 앉혀 놓고 글자를 손으로 짚어가며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좋아하는 장면은 하얀 종이에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단어를 끼적이고, 상상 속 장면을 묘사하기도 한다. 언어 너머에 존재하는 아이의 세상은 부풀어 오르는 풍선껌처럼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커지는 게 느껴진다.


지금 당장 남들 만큼 혹은 남들보다 더 잘하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더디게 가더라도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속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걸어가는 순간마다 아이가 온몸과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고 반응하고 마주하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만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 지금 나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속도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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