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아이와 성에 대해 열린 대화를 시작하자 안도감이 들었다
큰아이가 네 살 때 일이었다.
재활용 쓰레기를 아파트 수거함에 버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1층에서 쉬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23층까지 올라오게 해두고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네 살 딸아이가 폴짝 뛰어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재활용 쓰레기봉투를 옮기려는 찰나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문 열림 버튼을 서너 번 눌렀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엘리베이터는 쏜살같이 1층을 향해 내려갔다.
아파트 지붕 바로 아래인 23층에서 만삭의 몸으로 계단으로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가 다시 올라오기만 기다려야 했다.
바닥에 떨어진 공이 튀어 오르듯 23층에 올라온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다행히도 같은 통로에 사는 큰아이의 어린이집 친구 아빠가 아이를 알아보고는 동행해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하는 내 뒤통수를 보며 아이가 한마디 했다.
“엄마, 아저씨가 내 짬지 안 만지고 우리집까지 데려다줬어.”
아이의 친구 아빠가 이 말을 못 들었기를 바라며 서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이 1초라도 빨리 닫히기를 바라면서 차가운 엘리베이터 문을 쓰다듬듯 연신 밀었다.
그즈음 유아 성폭행 사건이 연일 뉴스를 도배했고, 아이를 씻길 때마다 세뇌 교육하듯 읊조렸던 말이 있었다.
“아무도 너 허락 없이 네 몸을 만지면 안 돼. 특히나 팬티, 짬지 이런 곳은 아무나 만질 수 없어. 누가 만지려고 하면 안 돼요! 싫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해. 알았지?”
샤워할 때마다 이 말을 해주면서 아이가 꼭 잘 알아듣고 기억하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맥락 없이 불쑥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아기가 어디로 나오는지는 알지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는 아이
그랬던 아이가 아홉 살이 되었다. 미국에 이사오면서 어찌하다 아이는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아이들과 같은 학년이 되었다. 친구들의 성장이 아이보다 더 빠르다 보니 벌써 브래지어를 하는 친구도 있고, 얼굴에 빨간 여드름이 올라오는 친구도 있다.
미국 학제로 4학년이고, 5학년이 지나면 중학생이 되기에 ‘성’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지난 몇 달간 하고 있었다. ‘성’에 대해 아이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은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 지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저녁밥을 준비하다 문득, 아이가 어디까지 아는지 궁금했다. 곁에서 숙제하는 큰아이에게 두서없이 질문을 던졌다.
“아기가 어디로 태어나는지 알아”
“알지, 엄마처럼 배를 칼로 찢어서 아기를 꺼내기도 하고, 이모처럼 아기가 짬지로 나오기도 하지.”
(아이들은 내 배꼽 아래 수술 자국을 통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 그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야.”
“여자 짬지에 있는 난자가 남자 꼬추에 있는 정자를 만나면 아기가 되는 거야.”
“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알게 되었어?”
“지난번에 대구 할머니가 설명해 줬어.”
(여기서 대구 할머니는 나의 친정 엄마이다.)
”그럼 엄마 짬지에 있는 난자랑 아빠 꼬추에 있는 정자는 어떻게 만났을까?“
이 질문에 아이는 답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우리 이야기를 풀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시작된 성에 대한 대화
마침 일곱 살 둘째가 아빠와 외출을 하고 큰아이와 단둘이 마주하는 시간이 생겼다. 하얀 종이 한 장과 연필 한 자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자와 남자가 가지고 있는 생식기의 내부와 외부를 설명하고, 여자인 내가 소변을 보는 곳과 생리를 하는 곳이 다르다는 것부터 알려줬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아이의 미간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생식기 외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 나머지 머리를 숙이고 또 숙여 들여다보려 했지만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는 경험담도 재미 삼아 곁들였다.
남자인 아빠의 경우, 소변을 보는 곳과 정자가 나오는 구멍은 같지만 두 갈래 다른 길이 꼬추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인체의 신비를 파헤친듯 신기해했다. 난자와 정자가 만나 자궁에 자리를 잡고 아기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하기 전, 아이에게 물어봤다.
“그럼 엄마 자궁에 있던 난자랑 아빠 꼬추에 있는 정자는 어떻게 만날까?”
“음, 엄마랑 아빠는 늘 같이 자니까 밤에 아빠 정자가 나와서 침대 위를 걸어서 엄마 짬지를 통해 자궁 속에 들어가는 것 아냐?”
어쩌면 나 어릴 적과 똑 같은 상상을 하다니! 이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줄 때가 왔다.
“아빠 꼬추가 엄마 짬지에 들어가서 물총을 쏘듯 정자를 몸 밖으로 내보내. 그때 마중 나와 있던 엄마 난자를 만나서 합체를 하게 되는데 이걸 수정이라고 해. 하나의 난자와 하나의 정자가 잘 만나 수정이 되고, 자궁에 꼭 들어붙어 앉아 커나가면 아기가 되는 거야. 그리고 그런 전반적인 몸의 움직임을 네가 알고 있는 단어, 섹스라도 해.“
아이는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난 듯 입을 뗐다.
“그럼 엄마 아빠도 섹스를 한 거야? 그리고 나랑 동생을 낳은 거야?“
”그럼, 섹스를 해야 아이를 만들 수 있으니까. 물론 자연스러운 섹스로는 임신이 어려워서 몸밖으로 정자와 난자를 꺼내어 수정을 시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도대체 어떻게 꼬추를 짬지에 넣는 거야?”
“지금은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어. 근데 우리 예전에 자주 보던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면 수컷 사자가 암컷 사자 몸 위에 앉기도 하고, 고추잠자리 두 마리가 딱 붙어서 날기도 하잖아. 그런 모습과 비슷해.”
뭔가 상상하는 아이를 헛기침으로 깨워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전했다.
“언젠가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섹스를 하게 되는 날이 올 거야. 그때에는 지금처럼 섹스가 이상하거나 싫지 않고 그저 하고 싶고 좋아하게 될 수도 있어. 여기서 꼭 한 가지 기억할 게 있어. 네가 좋아하는 사람과 안전한 환경에서 해야 하는 게 섹스야. 싫어하는 사람과 하는 섹스, 억지로 하는 섹스, 폭력이 동반되는 섹스는 네 인생에 있어서는 안되는 거야. 특히나 섹스를 하면 임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즐거운 일일 수 있지만 원하지 않는 때나 원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임신한다면 네 인생에서 아주 큰 사건이 될 테니 꼭 신경을 써야하는 거지.”
아이는 조용히 내 눈을 바라보고 들어주었다.
“우리는 우리 몸을 더 잘 이해하고 알아나갈 필요가 있어. 그래서 섹스에 대한 이야기를 너한테 꼭 해주고 싶었어. 네가 첫 생리를 하면 엄마는 커다란 케이크에 초를 켜고 생일처럼 축하할 거야. 그때 임신을 막을 수 있는 콘돔과 피임약을 사줄게. 그리고 엄마의 생리가 끝나는 날 이별 파티도 같이 하자. 태어나는 난자와 저물어가는 우리의 난자를 위해서.”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내 속은 후련해졌고, 아이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자기 전 양치를 하는 나에게 다가와 아이가 묻는다.
“엄마, 엄마는 아빠랑 얼만큼 자주 섹스해?”
내가 나의 엄마에게 열아홉 살에 했던 질문을 열한 살 딸아이에게 받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는데 기어코 이 질문을 받고야 말았다.
“엄마는 한 달에 서너 번 하지.”
아이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나를 바라본다.
“엄마, 최근에는 언제 아빠랑 섹스했어?”
아이의 질문을 듣자마자 치약을 뱉을 뻔했다.
“요즘 네 동생이 아파서 엄마가 동생이랑 자느라 아빠랑 못 잤잖아. 최근에는 섹스를 못했어”
“아 그랬구나, 오늘은 아빠랑 같이 자니까 오늘 섹스하면 되겠네.”
아이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 지 잠깐 망설이다 좋은 생각인 것 같다는 말을 건네며 웃었다.
섹스 이야기가 어색하지 않았으면
며칠이 지나 학교를 다녀온 아이가 간식을 먹으며 한숨을 푹 내쉰다.
“엄마, 우리 체육 선생님이 임신했다고 하더라고. 그럼 체육 선생님도 섹스한 거잖아. 그리고 내 친구는 형제자매가 열두 명이야. 그럼 내 친구 엄마 아빠는 섹스를 열세 번 한 거잖아. 요즘 어른들만 보면 저 사람들이 모두 섹스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한때 나에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섹스를 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간이 분류되던 때가 있었다. 그런 때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 시기가 아무렇지 않게, 감출 필요도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소소한 일상으로 찾아오기를 바랐다. 성과 관련된 고민이 생겼을 때 양육자인 나와 더 긴밀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머리를 맞대고 생각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내가 살아온 세상과 딸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천지개벽이 일어난 듯 다를 것이고, 내가 어린 시절 교육받은 대로 성과 관련된 이슈를 드러내지 않고 어두운 곳에서만 쉬쉬하며 다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았다.
그래서일까, 두서없이 나눈 이번 대화에서 나는 해방감까지 느낀다. 나는 이제 섹스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를 언제 어디서나 아이와 나눌 수 있다. 저녁밥을 준비하다가도, 차를 마시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굳이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지 않고, 흘러가는 구름 따라 내리쬐는 햇살 따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아이의 첫 생리와 나의 마지막 생리를 축하하고 이별할 때, 여성으로 살아갈 여자와 여성으로 살아온 여자가 마주 앉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벌써 그날이 기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