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였던 친가와 다르게 전형적인 시골집였던 외갓집을 나는 어려서부터 정말 좋아했다. 명절 말고도 방학 때면 종종 외갓집에 가서 일주일 정도씩 있다 오곤 했어서 크고 작은 추억들이 많다.
몇 가지 기억나는 장면들.
여름에 가면 외갓집 대문 곁에 심어둔 봉숭아 꽃과 잎사귀를 따다 외할머니한테 봉숭아 물을 들여달라 졸랐었다. 외할머니는 '눈도 잘 안보이는 할머니 성가시게 한다, 내년엔 해 달라고 하지 마라'하며 갖은 구박을 하셨지만 백반과 봉숭아를 함께 절구에 빻아 손녀의 손가락에 소담스레 올리고, 비닐로 감싸 하얀 실로 솜씨 좋게 둘둘 감아주셨다. 자고 일어나면 빨갛게 물들은 손가락과, 잠버릇에 중간에 빠져버려 덜 물든 손가락에 속상해하던 장면.
겨울이면 추운 북서풍이 서해바다를 지나올 때 습기 가득한 눈을 정읍에 뿌린다. 집 마당에 야트막한 경사가 있어서 눈 쌓인 경사면에 물을 뿌리면 순식간에 빙판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외할아버지가 비료포대 봉투에 노끈을 달아 만들어 준 썰매를 타고 신나게 내려오면 그렇게 꿀잼였는데 당연히 빙판이 생기면 미끄러우니까 외할머니가 매우 싫어하셨다. 내가 신나서 바가지에 물을 담아 경사면에 뿌릴 때 할머니가 어디선가 등장해서 '찌끌지마!!'라고 해서 '이게 무슨소린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옆에서 엄마가 깔깔대고 웃으며 '찌끄리다'는 물 따위를 '뿌리다/흘리다'는 전라도 사투리라고 설명해주던 장면.
엄마가 7남매 중 막내셨어서 나랑 언니는 16명의 손주들 중 끝에서 두 번째, 네 번째였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미 사촌 언니,오빠들은 중/고등학생였는데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잘 놀아줬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언니 오빠들이랑 뒷산으로 가서 신나게 썰매를 타고 오곤 했다. 다녀와서 방전된 체력으로 돌아와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언 몸을 지지고 있으면 할머니가 김이 모락모락나는 하얀 가래떡과 달달한 조청을 쟁반에 받쳐 가져다 주셨다. 쩝쩝거리며 가래떡을 씹으며 같이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티비를 보던 장면.
아마도 추석였지 싶다. 밤에 앞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온 식구가 모여 앉아 부르스타와 후라이팬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외갓집에서 오래 기르던 개 검순이가 외할아버지에게 졸졸졸 다가와 할아버지 발가락을 핥고 그 모습을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면.
여름 밤 너무 더워서 돗자리와 동심원이 무한 반복되는 모기향을 들고 제각 앞 마당으로 나갔다. 외할머니, 나, 엄마가 함께 누워 밤 하늘을 바라보니 별이 정말, 말 그대로 쏟아질듯 많았던 장면.
겨울 밤 정지방 (부엌이 전라도 사투리로 정지인데, 부엌 옆에 붙은 방을 정지방이라 불렀다.)에 나, 할머니, 언니 이렇게 셋이 이불 속에 쏙 들어가 TV에 나오는 주말의 명화를 같이 봤었다. 오드리 햅번이 나오는 영화였던 것 같은데, 정확히 제목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외할머니가 본인 젊을 적 영화를 즐겨보았던 이야기를 해 주어서 할머니가 영화라니! 하고 내심 놀라했던 장면.
외할아버지는 꽃을 참 좋아하셨다. 집 마당 곳곳에 계절마다 다른 꽃을 피우는 꽃들을 심어두셨는데 같이 마당을 돌 때면 꽃 이름을 종종 알려주셨다. 기억나는 이름이 꽃잔디밖에 없는게 죄송하고 아쉬울 뿐.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겨울방학, 수험생이 되면 명절에 외갓집에 가지 않던게 약간 관습(?) 같았던 때라 일 년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못 볼게 너무 아쉬워서 훌쩍, 혼자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외갓집에 갔었다. 늦은 밤, 전화도 없이 불쑥 들이닥친 손녀를 보고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맞아주시던 두 노인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번 주말에 외갓집에 다녀왔다. 아흔 여섯의 외할머니는 당장 내일 돌아가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시지만 여전히 정신이 또렷하시고, 손녀를 사랑으로 대해주신다. 3년 전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이제 집에 안 계시지만 그래도 집 곳곳에 외할아버지의 흔적에서 외할아버지를 느끼고 기억한다. 엄마를 키운 엄마의 부모님과 엄마가 자라왔을 집을 보며 꿈 많은 소녀였을 그 시절 엄마를 상상하고, 미소짓는다.
내가 정말 사랑해 마지않고 나를 설명할 때 절대 빼 놓을 수 없는 외갓집이라는 공간과,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두 분 모두 모두 엄마가 아녔다면 없었을 것들. 내가 이만한 기쁨과 사랑을 엄마에게 되갚아 줄 수 있을까. 언제나 그랬지만 엄마는 갚을 수 없을 것 같은 커다란 선물들을 내 인생에 아로새겨주었다.
예쁜 유빈에게
여름이구나.
여름과 함께 녹음이 짙은
나무들을 보면 자연은
참 약속을 잘 지키는 진실한
사람같다는 걸 느낀다.
어쩌면 그렇게 어김없이 계절과
나무는 같이오는지.
봄-꽃
여름-푸르름
가을-단풍
겨울-나겹만 나멋다.
이번 여름방학 때는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어 보자
그럼 이따 보자
2000년 6월 21일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