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밑줄 :: 소설가의 일 中 (김연수 지음)
그렇게 어머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매일 뭔가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맛이 획기적으로 나아지거나
갑자기 나빠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중략)
스무 살의 내가 역전 근방에서 매일 몇 편씩,
때로는 몇 십 편씩의 시를 노트에 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를 비롯한 동네 가기 주인들의 세계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획기적으로 나아지지도, 그렇다고
갑자기 나빠지지도 않는 세계 속에서.
어떤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이.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일하는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을 읽다가 이 문장을 접하고, 주말에도 불구하고 어김없이 새벽 출근길에 올라 집에 없는 아빠 삼진 씨, 남편을 출근 시키고 새벽 다섯시 반이면 어김없이 요가를 하고 영어 단어를 외우는 엄마 정숙 씨가 떠올랐다.
매일 새벽 반복적으로 가게 문의 셔터를 올렸다던 김연수 작가의 동네 상인들처럼, 삼진 씨도 매일 새벽 반복적으로 출근길에 올랐다. 마치 가게 셔터를 올리듯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그만의 셔터인 포크레인 문을 열었다. 일이 있는 날이든 혹은 일이 없는 날이든 별 상관이 없었다. 새벽 출근은 늘 그의 삶을 차지해버린 유일한 루틴이었다. 그렇게 40년이 훌쩍 넘어 버렸고 그는 그렇게 하루키를 능가하는 성실함으로 아내와 하나뿐인 딸을 건실히 먹여 살렸다. 정숙 씨는 더 한 사람이었다. 마음먹은 것은 무조건 루틴으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무언가를 묵묵하게, 꾸준히 해내가는 성실함이 주는 놀라운 복리의 혜택을, 나는 엄마를 통해 봐왔다. 그런데 어떻게 나같은 딸이 나왔을까. 꾸준함과 거리가 먼 나는, 나의 게으름이라는 무능을 무기력하며 바라보면서도 늘 나의 부모가 자랑스러웠다.
한가지 너무 신기했던 사실은 아빠가 평생 지금 하는 일 이외에 다른 일로 눈을 돌려본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랬을 것이고, 내가 태어나 자라며 봐왔던 모든 시간들 속에서도 그랬다. 아빠는 아무리 힘들고 위협적인 순간이 와도 다른 일을 할까 고민해 본 적이 단 한순간도 없었다. 아빠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어 보였던 순간은 언젠가 정부의 정책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일감이 반으로 줄어들며 집에서 쉬는 날이 많아졌을 때였다.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장인 정신으로 평생을 버텨오던 그는 쉬는 날이 생겨도 무얼 하며 쉬어야 할지 몰라 늘 불안해했다. 그리곤 다시 현장으로 나갔다. 그에게 스스로가 가장 가치있게 느껴지는 장소였던 그 일터로. 마치 그 일을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마치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엄청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하는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업(業)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달고 사는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몸도 마음도 너무 아팠던 시절, 내 자존감이 언제 바닥을 치는지에 대해 깊게 들여다 보기 위해 매일 새벽마다 종이 위에 떠오르는 감정들을 쏟아냈던 적이 있다. 결국은 일과 사랑이었다. 영화 인턴에 첫 등장한 프로이트의 문장처럼, 사실 사람의 삶이란 '사랑하고 일하고 일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전부'인건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내가 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무렵 찾아왔던 극도의 스트레스에 이별의 상실감까지 더해져 무너져 버렸을 때, 그걸 딛고 수면 위로 올라와야 했을 때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나의 가치는 내가 정하고 나의 내면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은 사실 모순이고 자만이라는걸. 내가 일로서 찾는 자존감에는 누가 알아 주지 않아도 내가 공을 들였다는 자기 만족과 더불어 여기에 대한 타인의 피드백과 반응도 무시할 수만은 없는 요소였다. 이 두가지가 적절히 조화를 이룰때 일로서의 자존감은 충족된다. 타인의 인정과 반응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것이 그저 예민한 것이 아니라 정상이라는걸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나의 자존감은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 뒤로는 나의 문제점을 하나씩 공들여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만져지지도 않는 글의 문장들을 다듬고 고치고를 반복하며 내 앞의 일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허세 잔뜩 들어간 의미 부여는 접어 두고 그냥 머슴처럼 돌을 굴려 올렸고 하루하루 시간을 보냈다. 아빠를 생각하면서. 우리 아빠처럼 되고 싶어서. 마치 이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김연수의 책 <소설가의 일>은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들만이 아닌, 무언가를 너무 잘하고 싶은데 내가 재능이 있을까 없을까 고민만 하며 아무런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다. 김연수 작가가 '매일 글을 쓴다'라는 행위와 '한순간 작가가 된다'사이에 남 모르게 쌓아왔을 수많은 반복의 시간들을 존경한다. 그저 그 일을 하려고 태어난 사람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묵묵히 제 할일을 하는 작가님 동네 상인들의 가게 셔터, 작가님네 어머니의 팥빙수, 우리 가족을 풍족하게 먹여 살렸던 성실한 아빠의 포크레인. 내가 소름돋게 애정하는 가치들이다. 이 책의 문장들이 가르쳐준것처럼 뭐든 시작이라도 해보자. 그리고 쌓아 가자. 그 시간들이 쌓여가는 과정을 풍경처럼 즐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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