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르면 떠나야 할 시간

여행이란

by 오종호

-다시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날 날들을 기다리며-



‘똑똑똑.’ 창 밖에서 선글라스를 쓴 젊은 여인이 문을 두드린다. 어디에서든 모든 남자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 것이 틀림없을 눈부신 미모. 창문은 망설임 없이 내려가고 심장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쿵쾅거린다. 차 안으로 훅 밀려드는 향수 내음에, 고였던 침은 목구멍을 넘지 못하고 걸려 버린다. 숨이 막힌다. 선글라스를 벗은 여인의 나안이 햇빛보다 강렬한 시선을 내 눈 안으로 꽂아 넣는다. 눈앞이 아득해진다. 한때는 시간조차 얼어붙게 했을지 모를 여인의 입술이 열린 순간 차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방향을 바꾼다. “어디로든 같이 떠날래요?”


그래, 이런 날이라면 어디든 상관없겠지. 가기로 되어 있는 그곳만 아니라면.



여행, 낯선 여인의 치명적인 유혹처럼


밖에서 하루 종일 서성이던 바람이 조금 전부터 창문에 달라붙어 손짓을 한다. 매혹적인 여인의 긴 손가락을 닮았다.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돌아와 앉는다. 녀석의 손톱이 일으킨 진동이 유리를 타고 벽을 파르르 흔들며 나의 손끝으로 전해진다.


책상을 훑고 가는 바람의 숨결에 여인의 향수가 배어있다. 나는 안다. 나의 후각은 저주받은 것임을.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날이면 결코 혼자 오는 법이 없다는 것을. 산토리니의 햇볕 한 움큼, 짤츠부르크의 음악 한 소절, 밀라노의 커피 향 한 방울, 동해의 생선 비린내 한 줌, 그리고 남해의 유채꽃 향기 한 송이... 집 앞 숲 속에서 마지막 가을과 노닐다 단풍 내음까지 고스란히 싣고 책상 위에 앉아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 바람이 말하고 있다. “어때, 배겨낼 수 있겠어?”


나는 유혹에 강한 사람이 아니다. 미인계에 걸리면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바람은 언제부턴가 나를 완벽하게 해부해 놓고 있다. 여행은 은밀한 유혹이다. 낯선 여인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처럼.



여행, 첫눈이 내리면 찾아오는 사랑처럼


골목이 있다. 들어설 것인가, 지나칠 것인가. 넘기지 않은 페이지가 남아 있는 책처럼, 끝나지 않은 골목은 어디론가 이어져 있는 이야기를 숨겨두고 있다. 바람이 미처 찾아 들지 못한 좁은 그 길의 끝으로 아마도 취기 오른 듯 흥청거리는 시장이 서 있을 것이다. 긴 수염을 휘날리는 노인이 장인의 풍모로 거친 손을 움직이며 이름 모를 악기를 연주하고 있겠지. 약삭빠른 관광객들의 흥정에 넌더리가 난 주전부리 가게의 청년이 잠시 땀을 훔치며 노인이 읊는 가락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도.


길섶의 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어루만지던 마음 착한 바람은 떠났다. 이제 이름 모를 오래된 골목 안으로도 혹독한 겨울이 파고들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그 골목으로도 첫눈은 바람을 따라 살랑거리며 내려앉을 것이다. 언제고 첫눈이 흩날리는 골목을 마주하면 나는 어둠 내린 그 골목 어귀에서 키스를 나누던 가난한 연인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설 것이다. 골목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들으러 좁은 길을 따라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여행은 애틋한 사랑이다.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첫눈 나리는 어느 골목에서 헤어지지 못하고 선 젊은 연인의 긴 입맞춤처럼.



여행, 나를 만나러 달려오는 사람처럼


낯선 길에서 만나는 익명의 사람들. 건넨 만큼은 반드시 돌려주는 그들의 미소는 어쩌면 이방인을 향해 보내는 약속된 신호인지도 모른다. “거리를 유지하라고, 친구. 그러는 한 나는 자네의 길을 축복할 테니 말이야.”


고개를 쳐들면 어느 하늘이든 사람들의 미소처럼 무심한 구름들이 떠 있다. 구름은 사람의 삶이 서로 얼마나 닮아있는 것인가를 깨우친다. 내가 사는 도시 사람들의 시선이 내 것과 엇갈리는 이유와 타지인들이 나를 향해 짧은 눈웃음을 던지는 까닭은 궁극적으로 같은 것임을 알게 한다. 저마다의 삶을 살아내느라 각자의 방식으로 분주해 온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서 거리를 두고 서는 방법을 익힌 것이다.


하지만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서로에게 진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뜨겁게 한 몸으로 불붙지 못하는 사랑은 가짜다.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나의 모습이 조작되어 갈 때, 참 나로 서게 하는 사람이 있다. 여행은 고마운 사람이다. 진짜 나를 보기 위해 가던 길을 돌려 먼 길을 계산 없이 거슬러오는 그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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