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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개미 Nov 27. 2020

선인장 선물하기

오랜만에 맥북 켜서 글 쓰니까 너무 기분이 좋다. 주말 첫날 아침이다. 잠들 때 보다가 영화가 끝나기 전에 세 번이나 잠든..(영화 잘못 아님)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드디어 마저 보고, 왓챠에 별점 남기고, 제주도에서 사 온 <장래희망은, 귀여운 할머니>를 한 장 밖에 안 읽고 인스타그램 보다가 독립서점 사진을 봤다. 중앙에 있는 엄청나게 큰 선인장만 보였다. 내가 선물한 선인장도 저렇게 커질 수 있을까? 고향으로부터 먼 이곳에서?(각자 고향이 어디신지는 모르겠음)


살면서 세 번 선인장을 선물했다. 고등학교 때 한번, 생일인 친구에게 한번, 그리고 이사한 친구에게 한번. 고등학교 때 처음 선물한 계기는 그 당시 즐겨듣던 에피톤프로젝트의 <선인장> 이다. 차세정 버전을 좋아했는지 심규선 버전을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인생의 모토가 가을방학의 <취미는 사랑>이었던 사람이므로, 내가 저 가사의 선인장에 몰입해서 친구한테 선물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언젠가 마음이 다치는 날 있다거나/이유 없는 눈물이 흐를 때면 나를 기억해/그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줄게. 대충 이런 가사인데. 그땐 그렇게 기꺼이 돼 줄 마음이 있을 정도로 넉넉한 인간이었나보다. 암튼 선인장을 에피톤프로젝트 앨범과 함께 선물했다. 그 선물은 왜 인지 우리 사이 꽤 오래 회자됐다. 선인장은 앨범보다 오래 가지 못했다.


그 다음. 동경하던 어떤 친구들의 모임에 내가 팬이 아닌 구성원으로 끼게 됐는데, 이내 그 중 한 명이 생일을 맞았다. 뭘 선물할지 홍대를 다 뒤졌으나(구라임) 이렇다 할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선물에 자부심 있는 편.. 글고 뭔가 내가 그 그룹에 참여하고 나서 맞는 첫 생일이기 때문에...일종의 역량 테스트라고 생각했음) 그때 내가 우연히 풀이 우거진 한 상점에서 만세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만세는...만세 선인장이다. 만세는 좀 너무 잘생겨서 솔직히 사지 않으면 안 되게 생긴 그런 선인장이었다.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손바닥만한 애들보다 이미 좀 자라있었다. 잘생겼다고...만세도 <선인장> 가사처럼 햇볕이 잘 드는, 그 어느 곳이든 잘 놓아두고서, 한달에 한번만 잊지 말아 주면 잘 지내는 애 일 것 같았다.(선물이 부족한 거 같으면 시든 노래든 갖다붙이는 경향이 있음) 그래서 바쁜 친구에게 선물했다. 이름은 만세가 됐다. 친구는 그 자리에서 이름을 지어줬다. 친구는 최선을 다했으나 만세는...웃자랐다. 가늘고 길게 자라기 시작했으나 우리는 친구가 사진을 보낼 때 마다 "와 되게 쑥쑥 자랐다~!"라고 했다. 결국 웃자란 상태라는 걸 깨달았고...암튼 웃자란 만세는 웃자란 채로 다시 잘 자라고 있다.


세 번째 선인장은 만세가 아니라 용신목인가..암튼 그 두꺼운 자다. 막 이사한 친구네 집에 가면서 버스를 갈아타는 곳의 화원에 들러샀다.(뭔가 급할 때 구원투수로 선인장을 사는 경향이 있다는 걸 글 쓰다 깨닫는다) 이 구역에서 식물을 제일 잘 알 것 같은 화원에서 추천받았다. 나는 어쩐지 화원에 들어가면 뻔뻔하게 말을 잘한다. "친구가 이사를 해서요. 근데 아마 식물을 안 키워봤을 거예요. 물은 얼마에 한 번 줘야돼요? 얼마나 줘야돼요? 햇볕에 둬야 하나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꼼꼼히 적어서 친구에게 전해줬다. 지금 난 까먹었다. 아마 그늘에 둬도 괜찮았던 것 같고(이게 젤 헷갈림) 종이컵으로 한 컵만, 한 달에 한번, 까먹다가 애가 죽어가는 거 같으면 주라고. 얘를 들고 도착한 친구네 베란다에는 이미 스투키가 있었는데 나는 못 본 척 했다. 원래 집들이 갈 때 식물 자주 해요? 뭐 가봤어야 알지 짱나게...아무튼 친구는 내가 떠난 뒤 인스타그램에 고맙다고, 매월 14일이 되면 나를 기억하면서 물을 줄 거라고 했는데. 그러고보니 얘도 웃자랄 수도 있겠다 싶다. 근데 웃자라는 정도야...머 어땨용.


나 같은 인간도 방 안에 있는 파란 걸 보면 쟤는 사는 게 괜찮나, 언제 물 줘야 하나, 생각한다.(결국은 엄마가 준다) 엄마가 얘를 내 방 협탁 옆에서 꺼내 베란다 밖에 내어 두면 그래 너도 이제 물 마시고 햇빛 좀 봐야지 하긴 한다. 나처럼 엄마가 뒤치다꺼리 다 해주지 않는 이상, 식물은 루틴에 좋다고 생각한다. 그때그때 살펴봐줘야 하고, 물도 줘야하고, 해가 필요한 친구에게는 햇빛도 맞혀야 하니까. 그리고 난 루틴을 동경한다. 매주 일요일 욕조에 몸을 담근다는 친구의 놀랐고, 매일 요가를 하는 친구를 동경했고, 매일 아침 침대를 돌돌이로 청소하는 친구를 따라한다. 심지어는 일어나자 마자 담배를 한 대 피우는 것도 좋다는 모 작가의 말도 믿는다. 언젠가부터 하루를 시작하기 너무 힘들었던 나에게, 루틴이란 건 그걸 저절로 하게 해주는 힘 같은 거니까 뭐라도 좋다. 그래서 나도 나름 돌돌이를 하고, 기분에 따라 차갑거나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며 아침을 시작한지 조금 되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물론 그걸 다 망치고 오늘처럼 누워서 허리에 나쁜 자세로 노트북 두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러다가 또 기운이 생기면 다시 일어나서 돌돌이 하고, 물 마시고, 홍삼 먹고, 스트레칭 하면 되는 것이니까. 이제는 더이상 앞으로 갈 힘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 세 번째 선인장 엄마가 나타났다. 그 친구를 보며 온 마음을 다해 괜찮아지고 싶어졌다. 뭐가 좋은 건지, 뭐가 나쁜 건지 좀 알게 됐다. 나를 더이상 망치고 싶지 않아졌다. 이제는 기운이 없어서 전반적으로 최선을 다해 나쁜 쪽으로 돌진하는 에너지가 좀 없어진 거 같기도 하지만...다행히 이 생에서 최대한 쓰지 않고 저장해왔던 성실 에너지가 남아서 그를 따라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굴러가다 보면 어디든 가겠지. 그러다 보면 내년에 문신도 하고 그러겠지. 꼭 해야지 진짜. 아 일 생각 안 하고 내 생각이나 잔뜩 하면서 글 쓰니까 너무 좋다!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투머치 토커 버전으로 발행해 버려야지. 모르겠다. 어차피 나중에 나만 혼자 백 번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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