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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의개미 May 20. 2020

저가의 빚

오스트리아 빈에는 C가 있다. C는 독한번역가이자 관광가이드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오스트리아로 건너와 자리잡은 지 어언 30년이랬다. 친구의 아버지의 과동기인 C와 내가 함께 산책하게 된 사연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내가 있는 빈으로 친구가 여행을 왔다. 친구와 나는 C가 운영하는 숙소에 일주일간 함께 묵었다. 그동안 C는 우리를 두어 번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했다. 친구가 떠난 뒤에도 C는 혼자 남은 나를 종종 불렀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고 산책을 했다.


하루는 숲을 같이 걷다 C가 역정을 냈다. 여행사 최저가 상품 같은 건 쳐다보지도 말랬다. 여행사들이 가장 먼저 후려치는 게 가이드의 인건비라고 말했다. 적어도 두 명이 해야 할 일을 한 명한테 시킨 다음 적은 임금을 지급한다고. 그러면 가이드는 훌륭한 관광지나 역사유적보다는 힘이 덜 들고 개런티도 받을 수 있는 쇼핑몰로 안내하게 된다고 했다. 그런 건 '여행'이라 부를 수 없으며 결국 고객도 가이드도 손해보는 장사라는 것이다. 모든 것에는 적정한 가격이 있다, 비정상적으로 싼 가격은 결국 누군가의 비정상적인 희생을 의미한다. C는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건 테마파크에서의 아르바이트 경험 때문이다. 교환학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한 학기동안 놀이기구 탑승 안내 일을 했다.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날 수 있는 놀이기구 운행을 직원이 아닌 5~6개월 차의 내 또래 파트타임들이 한다는 걸 알았을 땐 좀 놀랐다. 더구나 내가 입사한 여름엔 인력이 매우 부족해 운행에 3명이 필요한 놀이기구를 혼자 운행하곤 했다. 손님이 적어지는 한 여름이었기 때문에 추가 인력 수급이 없었다. 회사는 온갖 할인 티켓을 뿌려 입장객을 충원하려 했다. 적정 가격을 받지 못해 손해가 난 부분은 우리와 함께 일했을 수도 있는 잠재적 동료의 인건비로 채워진 셈이다. 그 즈음 어린이 놀이기구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놀이기구 원형판 틈 사이에 다섯살 어린이의 손가락이 끼었다. 발견했을 땐 이미 손가락 3개가 잘린 채였다. 운행자가 내부 상황을 시시각각 체크해 가동을 바로 중단했더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지 모른다.


한국행 비행기에서 황정은 소설을 꺼내들었다. 한국만큼 인터넷이 훌륭하지 않은 빈의 기숙사 와이파이가 끊길 때마다 꺼내읽었더니 이미 조금은 지겨워진 책이었다. C 이야기 때문인지 유난히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소설 주인공 무재가 은교에게 자신의 유년 시절을 설명하는 장면이다. 자신의 부모는 ‘필연적으로’ 빚을 졌다고 말한다. 빚이 왜 필연적이냐, 빚을 지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지 않느냐 묻는 은교에게 무재는 말한다.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 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C의 역정이, 아이의 손가락 3개가, 우리 사회가 차곡차곡 후려쳐 온 가격에 대한 대가는 아닐까 생각했다. '최저가'의 빚을 사회가 러시안 룰렛으로 갚는 것이다. 2만 원 짜리를 1만 원에 사면 흐뭇함을 느낄 게 아니라 어디선가 누군가 만 원어치 대가를 치를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만 같아졌다. 최소의 가격을 지불하고 최대의 서비스를 바라는 게 뭔가 이상하다는 감각은 그때부터 생겼다. 비정상적인 효용의 대가는 과거에 치러졌는지, 동시적인지, 미래에 누군가가 치를 것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치러진다. 그래서 나는 어디선가 사고 소식이나 노동자의 사망 소식을 들려오면 내 방으로 차용증이 날아드는 기분이 되고 만다.


*개인적 경험에 기반했으나 사실 관계는 일부 각색했다. 예전에 쓴 작문을 조금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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