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그러나,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던 것에 대하여.
우리의 말과 글로 우리의 이야기를 적어내려가는 것 만으로도 죽음의 위협을 느껴야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말과 글을 함부로, 서툴게 써 대는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절대 모를 어떠한 간절한 마음을, 그 시절의 사람들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 그러나 실상 제대로 알지는 못했던 시인. 윤동주에 관한 영화, <동주>.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이것으로 여섯번 째. 재미있긴 하지만 베스트는 아닌, 그런 영화들이었다고 생각했다. 천만관객의 신화를 썼던 <왕의 남자>조차도 사실 나는 그렇게 쏙, 마음에 들지는 않았었다. 영화 <동주>는 그런 나에게 있어 한동안은 이준익감독의 최고작, 으로 기억에 남지 않을까 싶다. 경성의 문인들을 좋아하는지라 이 영화의 개봉을 정말 손꼽아 기다렸었고 개봉날 버선발로 달려가 영화를 보았고 그로부터 며칠 후 또, 한번 더 챙겨보았는데도 다시 한 번 보고싶은 영화다. 그 어떠한 감정적인 강요 없이, 담담하게 윤동주와 송몽규의 삶을 그려내고 있는데 바로 그 점이 오히려 더욱 강렬하게 그 시절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느꼈을 폐색감을 더 절절히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전혀 담담하지 않은데, 담담할 수가 없는데, 담담해야만 하는 현실의 벽 앞에서 느껴야 했을 그 무력감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한국영화는 감정과잉이라고 생각될 때가 많다.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르고, 너무 쉽게 화를 내며, 너무 자주 오열한다. 그러한 감정 과잉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항상 피로해지곤했다. 내 감정을 강요당하는 것이 싫었다. <동주>는 울어라, 감동받아라, 막무가내로 강요하지 않지만, 절로 감동에 북받쳐 눈물흘리게 만들었다. '어떤 피해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만큼 세련된 태도는 또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피해자를 옹호하기 위해 만든 영화가 섬세하지 못한 연출로 영화의 의미를 퇴색시길 때가 많았다. (뭐 이런저런 영화의 제목이 떠오르지만 비밀이 부치며...) <동주>는, 그러한 점에서 아주 훌륭했다.
윤동주 시인의 시를 흔히들 '부끄러움의 미학'이라고들 평한다. 영화 <동주>는 그 '부끄러움'의 감정이 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해 조심스레 이야기 하고 있다. 용기가 없어서 혹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어쩌면 그는 사촌형 송몽규의라는, '행동하는 인간'을 눈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기의 존재 자체가 시대에 빚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부책의식에 빠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시대에, 그렇게 어쩔수 없이 생겨나버린 죄책감을 곱씹어가며 한 글자 한 글자 적혀졌을 부끄러움의 시. 하지만 우리 글을 사용하는 것 조차 불법이던 시대에 시인 동주의 시는, 그 자체만으로 저항이었으며,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걸을 우리는 이제 안다. 내가 경성의 문인들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글로, 우리의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지를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좋은 영화였다. 영화관에서 내려가기 전에 한번쯤은 더, 챙겨보아야겠다.
(+) 영상미도 정말 뛰어났던 것 같다. 특히 몽규와 동주가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의 풍경은, 정말이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