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최선을 비웃을 자격은 없다, 그것이 설령 잘못된 최선일지라도.
나는 이 작가를 만나고 싶지 않다.
이 책에 관심 가지게 된 것은 이 심사평 때문이었다. 심상치 않은 심사평과, 제목에서, 그리고 푸른색의 표지와 검은 옆모습에서,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꽉 쥐고 있는 주먹에서. 나는 깊고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듯 한 절박함을 느꼈고 솔직히 그 절박함에 다가서기가 싫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이 심사평 한 줄과, 이 표지 한 장으로 인해 이 이야기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이나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살짝 눈이 내리고 살얼음이 핀 아침, 임솔아 작가의 <최선의 삶>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중학교 시절 한 반이었던 몇몇 아이들의 얼굴이, 몇 년 동안 기억에서 사라졌던 이름까지도 생각이 났다. 우리는 달랐지만, 나쁘지 않게 지냈다. 스승의 날이라던가 담임 생일 땐 함께 깔깔대며 장난 섞인 축하파티를 기획하기도 했고 소풍이며 수련회 때면 너나 할 것 없이 어떻게 술을 숨겨 들어갈 것인가를 함께 궁리했다. 체육대회 같은 타이틀 걸린 행사라도 있을 때면 우리는 하나로 똘똘 뭉쳐 운동장을 내달렸다. 그 아이들은 간혹 같은 반이라는 이유로 다른 반 아이들의 괴롭힘으로부터 우리 반 아이들을 지켜내 주기도 했고, 간혹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같은 반 아이를 다른 반 아이들의 힘까지 빌려 괴롭히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 아이들과, 결코 나쁘지 않게 지냈다.
나쁘지 않게 지냈다는 말을 그러나 잘 지냈다는 말로 바꿀 순 없을 것이다. 어린 나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었다. 학교를 벗어난 일상을 그들과 함께 하려 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학교 밖에선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들은, 나와는 다르고, 다른 세계 속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고, 다른 삶을 살아갈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성적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소심한 모범생이었고 그 아이들은 소위 노는 애들,이었다. 그 아이들과 나는 달랐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얌전히 집으로 돌아와 TV 속의 아이돌에 환호하고 책을 읽고 숙제를 하고 아주 가끔은 공부를 하다가 잠들었고, 그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패싸움을 하고 남자들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가출을 하고 아주 가끔은 남자들과 몸을 섞다가 잠들었을 것이다.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그 아이들의 그런 일련의 일탈들이 참으로 별 것 아니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땐 정말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고 사실 지금도 이러한 삶을 이해하기엔 내 삶이 너무 안온했기에 솔직히 그들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다.
어렸을 때도 지금도 그 아이들처럼, 강이 처럼 이렇게 내던지는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기에 나는 왜 이렇게밖에 최선의 삶을 살지 못하는 걸까 하고 의아했다. 정말 이것이 최선일까, 왜 이다지도 잘못된 최선을 하는 걸까. 과연 최선이란, 무엇일까. 계속되는 물음을 안고 책을 읽었다. 좀 더 '제대로' 살 수 있을 텐데 '저렇게' 살지 않을 수 있을 텐데,라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책을 읽고 한 가지를 깨달았다. 나는 겪어보지 않았던 그 정글 같은 세계에서 그들은, 강이는. '좀 더 나아지기'위해서 최선을 다해 '기꺼이 나빠지고(p174)'있었던 것이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최선이 나의 최선과는 기준이 달랐을지언정. 절박했던 것이다. 강이도, 소영도 아람도. 변방으로 내쳐지지 않기 위해서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최선밖에 할 수 없었던 강이 앞의 현실의 벽이 갑작스레 내 눈 앞을 가로막아, 나는 숨이 막혀왔다. 이런 최선밖에 할 수 없는 삶은 어떤 삶인 것인가. 하는 생각에 아득해지는 한편, 안심했다,라고 말하면 너무 비겁한 걸까. 이런 정글을 겪지 않고 자라온 안온했던 내 삶에 솔직히 나는 안심했던 것 같다.
임솔아 작가가 그려낸 이 난폭한 정글의 모습에 대한 충격은 꽤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 같다. 최선을 다해 기꺼이 나빠진 그녀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