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숲 Dec 18. 2016

기꺼이 수고하는 삶,

정리할 것이 많은 삶을 살고 싶어 졌다.


먹고 마시고, 블라블라. 힐링 라이프를 겨냥하는 이 문구가 사실 별로였다. 책도 영화도 보지 않았으면서 나는 그러니까 이유 없이 그냥, 싫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까 그러니까 왜 '먹고, 마시고' 가 먼저 등장하는지, 사랑을 하던, 그릇을 하던, 음악을 하던, 그림을 그리던, 그러니까 왜 먹고 마시는 것이 먼저 나오는 것이지 깨달았다. 참, 늦은 깨달음이기도 하다. (...) 먹고 마시는 것, 그러니까 의, 식, 주, 중 '식'은 그 무엇보다도 원초적인 것, 그 무엇보다도 살기 위해 먼저 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너무나도 일상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소홀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소홀해진 일상에 조금만 기꺼이 신경을 쓴다면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한 매일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사실 진즉 알고야 있었지만 귀찮다고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좋은 그릇에 담는다고 길거리 김밥이
직접 지은 밥만큼 맛과 영양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철마다 어떤 과일과 어떤 채소의 맛이 좋은지,
그리고 어떤 고기와 어떤 생선이 좋은지를 모르면서,
좋은 그릇부터 들일 필요는 없다.

내가 나를 위해 대접하는 한 끼 식사에서, 그릇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좋은 그릇보다 좋은 음식이 언제나 먼저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얼른 그릇 사야지. 파스타 그릇 사고 샐러드 볼 사고 그릇, 그릇 사야지. 하며 쇼핑 욕구 100%로 가득 찼을 때 작가는 그럴 줄 알았어, 라는 듯이 그릇보다 우선 해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안목'과 '좋은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좋은 취향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사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고 역사와 철학, 예술을 멀리하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열심히 받아들이려 해야 한다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책이라고는 퇴마록과 슬램덩크밖에 몰랐던 내가 처음 책에 다가설 때만 해도 정말 조급해했었던 것 같다. 누가 뭐가 좋다 하면 다 읽어야 할 것 같고, 서울대생이 읽은 100권이라고 하니 또 다 읽어야 할 것 같고. 그런데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보니 내 취향이 생기고, 더 이상 누군가의 말에 팔랑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릇이며, 음식, 영화, 패션, 음악 같은 것들도 다 그런 게 아닐까. 지금은 조급하게 총총, 뒤를 쫓아갈 수밖에 없지만 꾸준히 쫓아가다 보면 나만의 샛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될 테다. 


오래간만에 나를 뒤돌아 보게 만드는 책을 만난 것 같다. 사실 지난 1년 동안의 나는 한심했던 것 같다.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고, 이것저것 많이 했지만 결국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무거나 먹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여행이며 독서, 영화 관람 등 쫓기듯 많이 했지만 제대로 기록하고 정리하지 못해서 그냥 안 하느니만 못한 상태가 되어버린 것 같고, 아무거나 생각 없이 많이 먹어댄 탓에 살이 무럭무럭 쪘다. 이 책 덕분에 다시 '좋은 음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초고도비만이었던 시절부터 지난해까지, 살을 빼기 위해 내 입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고민을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올해. 이제야 좀 정상체중에 범위에 들어오자마다 나는 맵고, 짜고, 자극적이고 맛있는(!) 것들을 다시 탐해왔다. 혀는 다시 둔해졌다. 그런 나에게 저자는 말한다. 기꺼이, 수고스러워지자고. 한참 다이어트를 할 땐 정말이지 매일 저녁 기꺼이 수고스럽게 채소를 다듬었고, 도시락을 쌌었다. 그래. 다시 수고를 하자고. 그리고- 몇 해 전부터 전혀 손대지 못했던 여행들을 정리하자고. 그런 다짐을 했다. 정리할 것이 많은 삶을 살아가자고. 그러니까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부터 정리해 내자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최선이란 무엇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