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향한 눈빛이 변하는 순간.
오래간만에 만나는 옛 연인을 기다리는 설레임에 달뜬 눈빛은 지나치게 눈치없고 예의까지 없는 개저씨의 반열에 오른 옛 연인을 목도한 뒤 차갑게 식어가고, 그렇게 진도가 빠르더니 여행을 떠난 뒤엔 단 한번의 연락도 하지 않았던 남자를 바라보던 실망과 서운함으로 가득찬 차가운 눈빛은 여행지에서도 계속 자신을 생각해주었음을 알게된 후 눈 녹듯 녹아 따스하게 살짝 웃음을 머금는다.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이 그저 비즈니스로 만나 플라스틱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각자의 사정을 알게된 뒤 연민을 품은 인자한 눈빛으로 웃음을 나누고, 아직도 미련이 남아있는 두 연인의 아슬아슬하게 마주치던 갈망의 눈빛은 결국 마지막 한 걸음마저 뒷걸음질치고 마는 남자로 인해 체념의 눈빛으로 변한다. 영화 <더 테이블>은 그 감정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배우들의 눈빛연기를 읽어내는 재미가 있는 영화였다.
영상미가 뛰어난 영화를 좋아한다. (영상미만, 뛰어나다면 문제가 있겠지만) 김종관 감독님의 전작, <최악의 하루> 때문에 <더 테이블>도 영상미가 뛰어나면서 이야깃거리도 많은 좋은 영화일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지켜졌다. 누군가는 영화가 다소 가볍다는 인상을 받았을수도, 기승전결이 확실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다소 심심할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더 테이블>은 두 사람간의 대화와 눈빛, 작은 행동만으로 감정의 파도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배우들의 연기의 힘을 느끼게 해 준, 어떤 영화보다 긴장을 놓을수 없는 그런 영화였다. 대사와 대사 사이, 아주 잠깐 예상하지 못했던 침묵의 순간. 혹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다음 대사가 뛰어들어오는 그 순간. 마음과는 다른 말을 뱉을 때의 사소한 행동들. 손과 발의 작은 움직임들. 이 영화는 그러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발견하는 순간 꽤나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사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나는 이 영화를 미리 만나보았었다. 처음 보았을 땐 글쎄. 그 즈음 사랑이 고파서였을까. 오후 두시반, 경진의 이야기가 참 좋았었다. 어떤 사랑의 시작을 바라본 느낌. 엇갈릴뻔한 사랑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참 기분이 좋았었다. 여행지에서 누군가의 선물을 사 온다는 것의 의미를, 특히나 4~5개월이나 되는 장기여행중에- 인도, 독일, 체코. 지나치는 여행지 곳곳에서 누군가를 위한 선물을 저만큼이나 쟁여왔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경진이어서, 다행이었다. 여행지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누군가를 위해 선물을 골라본 사람들이라면 이 오후 두시의 에피소드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작년, 영화관을 나설땐 이 두번째 에피소드의 설레임 때문에 사실 다른 에피소드들은 머릿속에 별로 남아있질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브런치무비패스 시사회로 한 번, 그리고 연인과 손 잡고 한 번 더. (연인이 생기면 꼭 두번째 에피소드를 함께 보고싶었다. 불행히 섬세하지 못한 사람이라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를 알아채지 못한듯 하지만. (한숨)) 총 세 번을 보고나니, 그동안 놓쳤던- 배우들의 작은 움직임, 작은 머뭇거림같은 것들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더랬다. 그리고 그 작은 것들덕분에 나는 <더 테이블>이 참 좋았다. <최악의 하루>도 그랬다. 김종관감독이 포착해내는 그 작은 디테일이 좋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미세한 떨림을 포착할 줄 아는 김종관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폭력, 살인, 사기, 복수. 남성배우들만으로 범벅이 되어 판에 찍어낸듯한 엉성한 범죄 스릴러물만 판치는 한국영화계에 이토록 섬세하게 아름다운 영화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특히나, 남자 배우들에 비해 설 자리가 적은 여자 배우들이 이끌어가는 영화의 존재는, 소중하기 그지 없다. <더 테이블>,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섬세한 영상속에 빠져들어, 각자의 사랑의 순간을 되돌아보는 경험을 해 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