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 때문에 우리는 만났다. 처음 만났던 때를 이야기하려면 이제는 8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10월의 마지막 날, 잘 지내고 계신가요?”였던가.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흔한 단체 문자 한 통이 2014년 10월 31일 오후, 내게 도착했다. 그때의 나는 단체 문자를 다 읽는 사람이 아니었고, 답장을 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답을 했고, 답장을 주고받다 만날 약속까지 잡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발신인은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10월의 마지막 날이면 자연스레 저 노래를 떠올리고,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내며 안부를 챙기던 사람. 그때의 그가 어떤 마음으로 나를 떠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문자는 내게 잊혀진 그의 존재를 떠오르게 했다.
대학 본부에서 유학생 관리를 담당하던 내게 그는 ‘거래처 직원’이었다. 외국인 유학생 보험 담당자로 1, 2주에 한 번 우리 사무실을 찾았던 그와는 대화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 오셨어요.” 인사 정도만 건넬 뿐, 사람이 오는지 가는지 쳐다보지도 않는 쌀쌀 맞은 담당자였다나. 매일 허덕이며 일하던 시기였다. 하루 종일 이메일을 쓰고 전화를 받고 학생들을 만나고 나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고, 사무실 문이 닫히고서야 그날 아침에 계획한 일들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연애 따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나 자신조차도 제대로 마주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일에 압도된 사람에게 가장 먼저 없어지는 건 친구와 저녁이었고, 그곳에서 3년을 일하며 ‘균형’이라는 두 글자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사직서를 내고 2013년 10월 31일 자로 퇴사가 결정되었을 때, ‘거래처 직원’이 밥을 먹자고 했다. “일할 때 밥 먹자고 하면 보험 가입해 달라는 말로 오해하실 것 같아서” 한 번도 이야기를 못 했다고, 퇴사하게 됐으니 밥이라도 한번 먹자고. 그러고 보니 우리는 페이스북 친구였다. 실제로는 업무 전화만 겨우 나누는 사이였지만, 온라인에서는 서로의 글을 읽고 있었다. 나는 국제교류 업무를 하며 만나는 학생들 이야기나 출장 사진을,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쓴 글이나 여행 사진을 종종 올렸다. 보면서 무심코 생각했다. ‘이 사람 참 건강하게 사네.’ 몇 년 후 그와 결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채로, 내 이상형은 언제나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로.
퇴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북적대는 버스터미널 안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대화에 집중하기 힘든 분위기였지만 신기하게 대화는 이어졌다. 2011년부터였으니 일로 만난 지 어느새 3년째, 나는 그를 ‘나보다 나이가 많은 유부남, 여행을 좋아하는 거래처 직원’ 정도로 알고 있었다. 나보다 두 살이 어리고, 결혼한 적 없으며, 우리가 같은 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은 퇴사 후에야 알았다. 책을 자주 선물하는 나는 그날도 책 한 권을 들고 갔는데, 그가 책을 좋아하고 선물로 책을 주는 사람은 더 좋아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연인이 된 후에야 알았다. 이날의 만남은 ‘이 사람 생각보다 재미있네’ 정도로 끝이 났다. 함께 밥을 먹고 며칠 후 나는 유럽행 비행기를 탔고, 그 후로 1년 동안 나는 그를 잊고 지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옛 거래처 직원’과는 2014년 11월 초에 다시 만났다. 1년 만이었다. 식당 유리창 밖으로 다급하게 뛰어오는 그가 보였다. 약속 시간은 저녁 7시였는데, 시계는 이미 7시 30분을 향해가고 있었다. 몸에 맞지 않는 헐렁한 은갈치 색 양복에, 끈을 지나치게 길게 뺀 가방, 삐죽하게 솟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나보다 어리다는 건 아무래도 거짓말 같았다. 하필 오늘 회사의 주차 타워가 고장 났고, 택시도 잘 안 잡혀 퇴근하는 선배 차를 얻어 타고 왔다는데, 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30분이나 기다렸지만 이상하게 괜찮았다. 마침 바쁜 일이 없었고, 그날따라 날씨가 포근했으며, 오랜만에 외출한 터라 약속 장소 주변을 걷는 게 좋았으니까.
퇴사 후 두 번째 만남이었고 3시간이 넘도록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퇴사 후 혼자 다녀온 유럽 이야기를 꺼냈고, 그는 마침 20대 초반에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사람이었다. 그것도 6개월 동안이나, 히치하이킹과 카우치서핑으로만. 얼마 전 친구를 만나러 뉴질랜드에 다녀왔는데 거기서 사 온 목걸이 하나를 선물하고 싶다며, 그가 십자가 모양의 그린스톤 목걸이를 내게 건넸다. 이게 무슨 의미지, 잠시 생각했지만 별 뜻 없이 그냥 받았다.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로 이해했다.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였으니까.
그때까지도 몰랐다. 즐거운 대화가 한 사람의 오랜 믿음 같은 걸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핑하면 퐁하고 날아오던 신나고 따뜻한 대화 덕에 몇 년 후 나는 ‘절대로’ 하지 않던 일들을 ‘기꺼이’ 하게 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