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벨리에서 일하는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회사가 인수합병이 되어 나를 포함 모든 디자인 팀, 그리고 가까이 일하던 프로덕트 매니저와 엔지니어들도 대량 해고가 되었다. 몇 달 전부터 인수합병이 되리란 건 알았지만, 이렇게 회사의 50% 이상을 정리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이탈리아 회사가 인수를 했고, 다니던 회사는 인력비가 많이 드는 실리콘벨리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말이 안 되는 결정은 아니었다. 다만, 말이 된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일날 슬랙에 "오늘 메일을 받는다면 layoff가 된 것입니다"라는 메세지를 받고, 디자인팀 전원이 "i'm laid off" "me too"라는 레이오프 파티(?)가 열린 뒤, 그다음 날이 우리의 마지막 날이었다.
충격이었다. 모두가 해고됐기에 혼자된 것보다야 덜 외로웠지만 (ex 동료들과 함께 슬랙채널도 만들고 이직 준비도 같이 하고 서로 돕는 묘한 상황이었다). 당시 여러 회사에서 layoff를 하는 분위기도 뒤숭숭했다. 주변에서도 해고당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만큼 채용하는 회사도 없었기에, 직장인으로서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코로나가 시작하기 한 달 전, 2020년 1월 처음 실리콘벨리에 왔다. 그 이후로 3년간 코로나와 겹쳐진 정신적 어려움, 직장 내 인종차별, 교통사고, 입원도 해보고 개인적인 사건사고도 모자라 이제 해고까지 겪는 게 억울했다. 게다가 퍼포먼스 이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내가 잘못한 선택을 한 것만 같은 죄책감까지 들었다. 정말이지 다사다난한 지난 3년의 피날레 같았다.
시장 분위기도 안 좋고, 심적으로도 많이 지친 탓에 한국을 잠시 가기로 했다. 다행히 난 비자문제가 없어서 조금 쉬어가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물론 쉬러 갔지만, 집에서만 칩거생활도 해보고, 일본도 여행가보고, 지친 심심을 recover 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주변의 응원 덕분에 다시 미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여러 인터뷰도 하고, 여러 번의 리젝을 받았지만 그런 과정에서 하나씩 진전해 나감을 알 수 있었다. 포트폴리오도 많이 개선되었고 무엇보다 나의 경력과 스킬을 설명함에 있어서 자연스러워졌다. 여러 번 인터뷰를 보다 보니 인터뷰어의 표정이나 단어만으로 다음 단계로 갈지 안 갈지까지 예상할 수 있는 경지에 다 달았다. 매일 일어나 침대 옆에서 인터뷰를 준비하는데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답답할 때가 많았다.
첫 오퍼를 받았다! 대기업에서 받았는데, 여러 가지로 나와 맞지 않아 포기해야 했다. 이 달에 오퍼를 2개 더 받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 내키지 않았다. 배부른 소리일 수 있겠지만, 지난 커리어 미스초이스로 몇 년을 고생한 걸 생각하면, 오히려 더 급할수록 천천히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러 가지 고민 끝에 career decision matrix를 자체개발(?)해서 정리해 보았다.
우선 경험을 바탕으로 (나 자신을 알라는 이야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기준으로, 이전 회사를 평가 매겼다. 최대한 객관적이고 혹독하게 분석한 뒤 내가 오퍼를 받은 회사들도 스코어를 매겼다. 이 스코어를 위해 follow-up interview를 신청하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점수를 매겼다. (오퍼를 받은 뒤 매니저나 팀원과 더 깊게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요청하면 대부분 오케이를 해준다.) 물론 객관적인 점수가 높더라도 감정적으로 정이 가는 회사가 있다. 이것을 감안하기 위해 "weighted score" 도 매겼는데, 각 항목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만큼의 스코어를 매겼다 (예를 들어, 난 'positive culture'이 중요해서 5점인 반면, in office (출근을 하고 싶었지만 어떤 회사들은 재택근무 옵션만 있었다)는 2점 정도로 크게 중요하진 않은 요소였다.
결국 이 매트릭스를 통해 '전체 스코어'를 매겨서 이전 회사에 비해 높은 스코어를 받은 회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퍼 받은 회사들이 이전의 회사에 비해 전체 스코어가 크게 높지 않다는 걸 깨닫고, 엄청난 잠 못 이루는 고민 끝에 2달 정도는 더 투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오퍼를 거절했다.
이 달이 심적으로 가장 힘들었다. 내가 오퍼를 거절하는 게 잘한 선택이었는지 의심이 드는 날들도 있고 일단 일을 시작하고 더 구직활동을 했어야 하는 건가?라는 후회가 드는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 회사에 집중하기 바빴을 것이기에, 돌아와 생각해 보면, 스스로를 믿고 나의 gut feeling ( 건 결과가 어떻든 잘한 선택이었다.
결국 원하던 헬스케어 분야에서 오퍼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career decision matrix에서도 스코어를 패스했고, 10점은 아니지만 이전 회사들보다 더 배울 것들과 성향이 잘 맞을 것 같았다. 물론 어느 정도의 risk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헬스케어인 점, hiring manager (직장 상사)가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점, 스타트업임에 있어 새로운 경험이라는 점이 와닿았다. 스타트업에 있어 많은 조사를 했고 또 배웠다.
다사다난한 2023년이었다. 30대에 진입함에 있어 굉장히 많은 슬프고도 행복한 날들이 많았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해였다. 일은 일이다, 아직 배우는 중이고 또 스타트업에 적응하기가 아주 익숙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고 배우는 것도 재밌고 결국엔 다 자산이 될 것이라 믿는다. 스스로를 믿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레슨을 준 한 해, 누군가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당시에는 모르지만 지나 보면 다 - 소중해지더라.
" 꽃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겐 어디에나 꽃이 피어있다"
There are always flowers for those who want to see them
- 앙리 마티스 (Henry Matis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