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체스터 바이 더 씨> 리뷰
주의: 이 글은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 관한 서사 분석과 결말 해석을 다뤘습니다. 읽고 영화를 보시면 영화의 긴장을 떨어뜨려 감상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고향으로 가서 내가 자란 거리를 둘러본 적이 있다. 저녁놀마다 친구들과 게임을 했던 문방구와 영화를 빌려보곤 했던 비디오방, 좋아했던 아이의 어머니가 하시던 토스트집까지 모두 바뀌었다.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 감정을 작가 레베카 솔닛은 이렇게 설명해줬다.
“우리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는 말이 사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 범죄, 행복, 운명적인 결정이 이루어진 곳으로 되돌아갈 수는 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진 장소는 계속 남아 우리의 소유가 될 수 있으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 묻은 장소가 사라지자 이제는 흐릿한 상상만으로 추억해야 하는 현실이 두려웠다. 하지만 공간과 얽힌 기억에는 꼭 긍정적인 기억만 있진 않다. 잊고 싶은 상처가 깜빡이도 없이 내 기억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런 장소도 있다. 돈이 없어 유희왕 카드를 뺏겼던 골목, 괴롭힘이 있었던 교실, 헤어진 사람과 자주 갔던 카페 모두 다시 가고 싶지 않다.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는 장소에 박힌 기억 때문에 고향에 되돌아갈 수 없는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향을 떠나야 했던 남자가 있다. 보스턴에 사는 잡역부 리 챈들러이다. 그는 형인 조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병원으로 가지만 임종을 지키지 못한다. 조카 패트릭이 사는 맨체스터로 가서 조카에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알리고 장례에 필요한 절차를 치른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리에게는 표정도 감정도 없다. 맨체스터에서 마을 사람들은 ‘그 유명한 리 챈들러’하고 쑥덕인다. 관객은 ‘리가 마을에서 어떤 일이 있었구나’ 추측하고, ‘그 일이 뭘까’하고 극적 의문을 제기한다. 리는 고향인 맨체스터에 오면서 자꾸만 옛 기억이 섬광처럼 스치고, 불쑥 찾아오는 과거가 현재를 옥죈다. 섬광처럼 스치는 과거 회상 연출 기법을 플래시백이라고 부른다. 관객은 반복되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무표정한 리의 과거를 알고 싶어 한다.
형이 죽은 시기는 겨울이다. 겨울이면 맨체스터는 땅이 얼어 묘지를 팔 수 없다. 땅이 녹는 여름이 되기 전까지 생명 없는 육체는 냉동고에 보관된다. 이렇게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완성되지 못한다. 인류학자 반 겐넵은 성인식, 결혼식, 장례식 등과 같은 의식을 ‘통과의례’라고 보았고, ‘분리→전이(轉移)→통합’이라는 단계를 거친다고 하였다. 그중 장례식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이 무기한으로 지속되지 않도록 애도하는 의식이다. 조의 장례는 성당에서 치러졌지만 몸을 묻지 못하니 애도는 끝맺어지지 못했고, 가족인 리와 패트릭은 전이(轉移) 상태에 갇히고 말았다. 패트릭의 밴드가 부르는 노래 속 가사처럼 ‘난 도망쳐야 해'라고 말하고 싶은 상황이다. 도망치고 싶은 슬픔을 등장인물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애도하는 과정과 이제 어떻게 할지를 말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에서 리와 패트릭은 대비된다. 리는 장례를 빨리 마치고 돌아가고 싶지만, 형이 자신을 후견인으로 지정하는 바람에 패트릭을 혼자 두고 고향을 떠날 수 없게 된다. 패트릭은 아버지의 죽음에도 별일 없는 듯이 친구들을 대하지만 냉동된 닭고기 앞에서 무너져 버린다. 리는 유지비가 많이 들고 모터가 곧 고장 날 것 같은 배를 처리해버리고자 하지만, 어부였던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패트릭은 배를 버릴 수 없다. 차마 애도할 수 없었던 사건을 겪었던 리는 자신에 대한 처벌처럼 새로운 인간관계를 거부한다. 패트릭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밤, 친구들과 영화 스타트렉에 관해서 토론하고 여자 친구와 잘 정도로 자신에게 남겨진 인간관계에 의지한다.
그렇게 갈등했던 둘은 리의 제안으로 바뀐다. 리는 자신을 향해 겨눴던 도구인 ‘총'을 팔고 배의 심장인 모터를 바꿔 새 생명을 불어넣어 주면서 패트릭이 추억을 보존할 수 있게 하였다. 패트릭은 여자 친구에게 배를 태워주며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찣긴 리의 심장은 갈아 끼울 수가 없다. 한 올 한 올 다시 꿰매 붙어야 할 것이다. 그랬던 리는 전처 랜디와 만나면서 예전 비극에 대한 애도를 비로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 태어난 그녀의 아들 앞에서 리에게 죽지 말라고 외치는 랜디의 외침은 견디기 힘든 슬픔이라도 작은 생명 앞에서 삶의 길을 믿어달라는 부탁처럼 보인다.
둘은 각자 필요한 애도를 했고, 여름이 되면서 조에 대한 애도는 묘지 이관으로 완성된다. 하지만 리는 후견인을 포기하고 절친이었던 조지가 패트릭을 입양한다. 그는 못 버티겠다며 맨체스터를 떠나지만 그가 죄책감 때문에 억눌렀던 슬픔을 이제야 애도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조카와 배 위에서 낚시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속 리는 회한이 밀어닥치는 섬광을 견뎌내고 비극에 대한 애도를 마친 리이기를 바란다.
모든 일에는 끝맺음이 필요하다. 끝을 맺지 않는다면 우리는 부유한 마음 상태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을 것이다. 끝맺음은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듣기 위해 찾아간 연인의 집에서 시작할 수도, 지금껏 읽지 않았던 친구의 사과 편지를 꺼내서 펼치는 것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매듭짓기 시작하면 우리를 덮쳤던 기억들은 회한의 빛처럼 다가오지 않고 그저 한 때 숲길을 지나다 마주쳤던 고라니 정도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당신이 끝맺지 못한 기억들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