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즘
우리 집 오래된 문짝들은 시트지가 떨어져 나가 합판목이 드러나 있다. 합판목 표면에 조각도로 그림을 새기면 예쁜 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중학교 준비물이었던 조각도를 버리지 않고 몇 년째 가지고 있다. 미니멀리즘을 삶에 적용시키고 싶지만 그렇다고 쉽게 버리진 못했다. 그동안 한 번도 조각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변명하자면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퇴근하면 피곤하고 주말에는 여자친구 만나랴 넷플릭스 정주행 하랴 정신없다. 미루고 미루고 미뤄뒀다. 그러다가 최근에 시간이 넘쳐나게 되었다. 지금 나는 일이 없는 자유의 몸으로 약 6주 뒤에 있을 해외여행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문에 조각을 새겨볼까 생각하며 조각도를 꺼냈다.
조각도를 그대로 문에 들이대며 나만의 오리지널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겠지만, 나의 완벽주의는 그런 걸 허용하지 않는다. 문짝에 들어갈 이상적인 그림을 찾아 핀터레스트를 헤맨다. 4B연필로 스케치해보지만 사실 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비율이며 배치며 다 엉망이다. 귀찮아서 다 내팽개친다. 인생의 가장 큰 적은 귀찮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뭔가를 활용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천에는 적지 않은 노력이 들어간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했을 때 내 인생에는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잘 모르겠다. 필요 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나는 결국 조각도를 버리려고 한다.
나라는 인간은 계획을 아주 거창하게 자주 한다. 그러나 행동하는 데에는 젬병이다. 그런 내게 활용 정신이 왜 찾아왔을까?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한정된 자원을 활용하도록 요구된다. 조그만 나사 하나도 언제 사용될지 몰라 모아두지만, 결코 다시 써본 적은 없다. 우리 집 거실에는 그렇게 활용을 위해 대기 중인 물건들이 먼지 쌓인 채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 다리가 부러진 책상, 어떤 옷이 있는지 모르는 옷상자까지.
하지만 활용 정신은 저리 내팽개치고 그냥 버리자. 그리 인생에 치명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것을 제안하는 까닭은 물건은 그 존재만으로도 피곤하기 때문이다. 활용하려는 물건을 볼 때마다 우리는 생각한다. “내가 저걸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데.” 물론 그걸 보고 행동을 위한 신호로 파악할 수 있지만 대개는 그냥 마음 한구석의 어떠한 부채감만 자극하고 스러져버릴 생각들이다. 또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 마음이 심란하다. 뭔가 필요 없어 보이는 것을 쓸모 있게 바꾸어 활용할 때의 기분을 안다. 버려질 위기에 있는 물건에게 자리를 찾아주었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였고, 작은 것 하나까지 소중히 여긴 것 같아 나 스스로 기특해진다. 하지만 내게는 그럴 의지도, 필요도 없고 버렸을 때 홀가분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아간다. 활용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셈이다. 그러니 나는 그 활용 정신을 버린다. 미니멀리즘에 한 발짝 다가갔을까?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