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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듬 Sep 13. 2019

오키나와 평화기행

오키나와에서 한반도 읽기


왜 하필, 굳이, ‘이 시국’에 일본을 가느냐 했다. 오키나와 평화기행을 준비하던 당시까지만 해도 잠잠했던 한일관계가 기행 일정이 다가오는 무렵 급격히 악화되어 나는 일본 불매가 한창이던 시국에 주변의 핀잔을 들어가며 비밀스럽게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출국 날 텅 빈 비행기에서 나는 일본 불매의 현실을 실감했다. 그러나 내가 왜 이번 기행에 있어 이런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가에 대한 불편함, 막연하게 일본을 ‘반대’하고 일본의 딱지가 붙은 모든 것을 보이콧하는 방식으로 저항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안고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번 기행을 통해 이러한 불편함을 모두 떨쳐내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한일관계를 모색해 나아가야 할지 그 갈 바를 깨우칠 수 있었다.


비루한 운명의 연속인 한반도와 제주만큼이나 오키나와는 침략과 약탈, 살육과 전쟁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땅이다. 이것이 비단 과거의 일로만 그치지 않고 오늘날 미군 기지라는 가시적 실체로 그 복잡한 역사와 정치‧경제‧사회적 폭력이 응축되어 드러나 보이고 있다. 나는 미군기지로 군데군데 구멍 뚫린 오키나와 위성지도를 덤덤하게 바라보며 여행 계획을 짜곤 했다. “74%의 주일본 미군기지가 일본 전체 영토의 0.6%에 불과한 오키나와 땅에 밀집….” 오키나와 관련 서적에서 무수히 마주한 이 문장의 참담함은 ‘오키나와는 미군기지 때문에 지하철이 없어 교통비가 비싸다’는 투정으로, ‘직선거리로 빨리 갈 수 있는 길을 미군 기지를 빙- 둘러 멀리 가야 한다’는 불평으로 우회되곤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모종의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다. 난도질당한 오키나와의 어제와 오늘을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피부로 받아들일, 그런 마음의 준비 말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의 준비’가 무색해질 만큼, 단단히 먹은 마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만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피부로 ‘직접’ 느낀 오키나와는 너무나 천진하게 아름다웠다. 여행하는 열흘 내내 비가 오거나 천둥 치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고, 나지막한 집들 너머로 탁 트인 하늘은 푸르고 청량했다. 오키나와의 비극이란 그런 것이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잔혹함과 다른 의미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서로 모순적으로 상충하며 만들어내는 비극이었다. 오키나와를 상징하는 꽃이 데이고라고 했다. 이 빨갛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날이면 태풍이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데이고 꽃이 만발하면 바람이 불고 폭풍이 왔다.” <시마우타(島唄)>라는 노래의 가사이기도하다. 태풍이 재앙, 사쓰마의 침략, 오키나와 전쟁 등으로도 비유되었던 것을 감안하면,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비극이 얼마나 일상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초여름 여느 때와 같이 빨갛게 만개한 데이고를 보며 아름답다 말하지 못하고 다가올 환란을 점쳤을 오키나와 주민들의 참담한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나의 오키나와 기행은 길가에 만개한 데이고를 바라보며 비극의 내러티브를 읽는 일 같은 것이었으며, 무수히 하늘을 가르는 여객기들 사이에서 이따금 날아가는 미공군기를 발견하는 일 같은 것이었다. 그 과정은 분명히 쉽지 않았다. 오키나와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역사적 진실’들은 때로 누군가는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들, ‘듣고 싶지 않다’, ‘입에 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들이었고, 나는 이러한 진실들을 불편하게 마주하며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고민했다. 기행 중에 느꼈던 감정들, 생각들, 고민들을 위주로 다소 정리되지 않은 언어이지만 이 자리에 풀어보고자 한다.




#마침내 도착  #습도 높음


무척이나 길었던 오키나와 여행 준비 끝에, 마침내 오키나와 땅에 발을 디뎠던 순간을 기억한다. 여행 준비가 길었던 탓인지, 오키나와에 대해 너무 ‘많이’ 공부한 탓인지, 나도 모르는 새에 ‘그래도 오키나와에 대해 좀 안다’라는 자만이 마음속에 자리했던 모양이다. 오키나와가 ‘아름답다’는 것을 글자로만 알았던 나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오키나와의 주황빛 하늘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어쩌면 실외로 나가는 순간 내 목을 턱 죄는 습기에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일 수도…. 머리로 아는 지식을 몸의 감각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이런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내가 이번 기행을 통해 전환하게 될 감각이 단지 오키나와의 아름다움 뿐만은 아니라는 것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가카즈 고대공원  #嘉数高台公園  #최초의 오키나와 전투


첫 행선지, 가카즈 고대공원에 갔다. 기노완 시의 북부에 위치한 가카즈는 최초의 오키나와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 중부에 상륙한 미군은 4월 8일 남하하며 가카즈 언덕에서 대규모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일본군을 맞닥뜨린다. 이 작은 가카즈 언덕에서 한 달 동안 일본군 6만 4천여 명, 미군 1만 2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일본의 육탄 폭탄 공격 희생자의 대다수는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가카즈 고대공원은 이러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언덕의 꼭대기에는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지구본 모양의 전망대가, 그리고 그 주변에는 희생자를 추모하는 각종 탑과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실제 전투에 사용되었던 진지들이나 토치카 또한 고스란히 남겨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탑과 비석들  #청구의 탑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가카즈 공원에 있던 수많은 탑과 비석들 중 주목해서 보았던 것은 바로 청구의 탑이다. 청구의 탑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조선인―더 구체화하자면, 한민족 출신 군인 및 군속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로, 우익단체인 일본민주동지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오키나와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가거나 ‘위안부’로 동원되어 숨진 사람들이 통틀어 만 명 이상으로 추산됨을 감안했을 때, 청구의 탑이 기리고 있는 386명의 영은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다. 단순한 숫자의 문제를 넘어 이 탑이 이들을 추모하는 ‘뉘앙스’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다 희생된 조선인’을 치하하는 청구의 탑은 조선인 군부로 강제 징용되어 ‘버리는 목숨’으로 최전방에 서야만 했던 맥락과, 식민지배와 권력관계의 문제를 지운다. 단순히 추모할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를 떠나 ‘어떻게’ 추모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들을 기억하는 방식, 그들을 오늘의 기억으로 소환해내는 논리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기록될 수 있다. 



 #지구본 전망대  #세계평화  #처음 만난 미군기지  #후텐마 비행장


가카즈 언덕 꼭대기에 있는 지구본 형상을 한 전망대에 올라가면 기노완 시가 한눈에 보인다. 절경에 감탄도 잠시, 나의 감탄을 한 순간에 경악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은 마을 한가운데에 비집고 들어 차 있는 거대한 미군기지의 모습이었다. 마치 마을에 구멍이 뚫린 듯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후텐마 비행장 안에는 군용 지프차가 바쁘게 오가고 무시무시하게 생긴 오스프레이(V-22 Ospery) 비행기 십 수대가 정차되어 있었다.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미군기지는 나의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고, 그 존재감은 훨씬 더 묵직했다. 오키나와의 모든 미군기지 안에는 일본, 미국, UN 세 개의 깃발이 걸려있다고 한다. 오키나와의 미군은 한국전쟁에 참여한 UN군의 이름으로 주둔하고 있다. 바로 이곳에서 한국, 베트남, 중국, 중동의 전쟁 현장으로 비행기가 출발한다. 오키나와는 미군의 전략 기지화됨으로써 피해자가 됨과 동시에 전쟁에 가담한 가해자의 위치를 점한다. 이것이 주 오키나와 미군기지 문제가 세계 평화의 문제인 이유이자, 후텐마 기지가 한눈에 보이는 가카즈 언덕에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지구본 모양의 전망대가 세워진 이유이다. 오키나와 기지 문제의 해소는 곧 한반도 평화실현의 문제이며, 한반도의 평화 통일은 오키나와의 평화에 기여한다. 



#조선인 위안소  #기지를 일상적으로 지켜보는 삶  #올라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


언덕을 내려와서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았던 마을 속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조선인 위안소 터이다. 이는 오키나와 전쟁 당시 7개의 위안소 중 4개가 가카즈에 위치하고 있던 까닭이고, 그중 한 곳이 조선인 위안소였다는 정보를 접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 위안소는 말 그대로 ‘터’ 뿐이었으며, 누가 집어서 알려주기 전까지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마을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자리하고 있었다. 기지도 비슷했다. 고지에 올라서면 선명하게 보였던 기지는 고요한 마을 속에 들어오니 ‘없는 듯’ 느껴졌다. 전쟁과 기지가 마을과 같은 수평선상에 침입해 들어온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나는 기지를 일상적으로 지켜보는 삶이 어떤 것인지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 전투기를 발견하는 일상을 감히 알지 못한다. 



#점심시간  #뜻밖의 수확(?)  #내부 식민주의(?)


첫 기지 목격의 여운을 가득 안고 허기진 배를 채우러 타코라이스 식당에 갔다가 아주 ‘이상한’ 일을 경험했다. 식당 내부에 성조기가 커다랗게 걸려있었고 팝송이 크게 틀어져 있었는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손 세정제에 ‘I love USA’라고 적혀있는 것과, ‘The United State of Okinawa’라는 문구의 스티커를 굿즈로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고, 급기야 식당 입구에 자랑스레 내걸린 미군으로부터 받은 표창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 당당하게 미국을 ‘사랑하는’ 이 식당의 태도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식당에서 소비를 했다는 것에 불쾌감이 들었다. 미군기지 인근의 마을에서 노골적인 친미국을 컨셉으로 장사를 해도 되는 것인가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인근 주민들은 모두 미군기지를 탐탁지 않아할 것이라 여겼던 나의 오산이었는지도 모른다. 오키나와에는 미군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 미군기지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있고, 진정 오키나와와 미국이 ‘화합’하기를, 혹은 오키나와가 미국의 52번째 주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다소 충격적으로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타코라이스 논쟁


사실 애초에 타코라이스라는 음식 자체가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들의 입맛에 맞춰 ‘타코’라는 서구 음식을 현지 생산물인 쌀과 융합시켜 현지화한 오키나와만의 ‘특산품(?)’이다. 처음부터 오키나와 내 미군을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반드시 미군만을 타깃 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 쌀을 활용함으로써 현지인의 입맛에도 맞췄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코라이스로부터 타코라이스가 생겨나기까지의 역사사회학적 맥락과 타코라이스 속의 문화사회학적 권력관계를 동시에 읽을 수 있다. 타코라이스는 ‘오키나와적’인가? 얼핏 보면 오키나와적인 것과 거리가 있지만 결국에는 오키나와적이기도 하다. 무엇이 ‘오키나와적’인가? ‘오키나와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본래, 오키나와다운 것’은 존재하는가?



#사키마 미술관  #전쟁을 기억하는 미술


사키마 미술관은 마루키 이리, 마루키 토시의 ‘오키나와전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사키마 마치오 관장이 설립한 미술관으로 후텐마 기지 한 구석을 파고들 듯 위치하고 있다. 이는 토지반환 운동의 일환으로 후텐마 기지 내 일부 토지를 반환받아 미술관을 세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술관의 삼면은 미군기지의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옥상으로 올라가면 마치 기지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코앞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기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키마 미술관은 오키나와전에서 희생된 생명들을 추도할 목적으로 건축가 마키시 요시카즈에 의해 의도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오키나와전 종전일인 6월 23일에 정확하게 23계단을 올라 다다르는 꼭대기의 정중앙으로 석양이 비쳐 들어오는 것이 가장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사키마 미술관은 이렇듯 예술의 언어를 통해 오키나와 지상전의 아픈 기억을 추모함과 동시에 미군기지 점령에 문제 제기함으로써 방문객으로 하여금 오키나와의 어제와 오늘을 비판적으로 재사유할 생각의 ‘녹음(綠陰)’을 제공해주고 있다. 



#오키나와전 그림  #전쟁도(戰爭圖)  #상처와 응시


난생처음으로 ‘전쟁도’라는 것을 접해본 나에게 <오키나와전 그림>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내가 접해온 예술의 언어는 A를 A라 말하지 않고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A를 마구 흩뜨려놓음으로써 보는 이들의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았다. 그러나 <오키나와전 그림>은 달랐다. 일그러진 사람들의 표정, 뒤틀린 다리와 상처 입은 몸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전쟁의 참상을 직설적으로 관객들에게 뿜어내고 있었다. 물론 검게 번지듯 흐리는 오키나와 특유의 은근한 화법(畫法)을 사용해 참상을 노골화하지 않음으로써 고통을 전시하거나 희생자가 타자화되는 것을 피했다고는 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전쟁의 현장 앞에 서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역사적 사건을 그대로 재현했다는 측면에서 나는 직설적이라 느꼈고, ‘날것’으로 쏟아지는 메시지들을 어떻게 감당해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문득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언어를 잃어버린, ‘설명할 수 없는’ 전쟁의 참혹함은 전쟁과 평화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평화로운 시기’라고 여겨지는 순간까지도 전쟁의 고통은 계속 이어져 온다. 오키나와 전이 끝난 후 7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미군기지 점령이라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부터 고통받는 오키나와 땅이 바로 “전쟁이 ‘간헐적’ 폭력이라면, 전쟁과 평화의 분리는 우리 삶을 구성하는 일상적 폭력이다.(정희진)”라는 문장의 산 증인이다. 정희진은 “고통에 대한 설명 불가능성에 돌진하는 것, 자기 상처를 응시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이라고 했다. 어쩌면 <오키나와전 그림>과 사키마 미술관이 목적했던 바 또한 관객들이 그림 앞에서 오키나와의 상처를 가만히 응시할 때, 미술관을 걸어 나오는 길에 기지를 맞닥뜨린 우리의 마음속에 그 그림 앞에 섰던 가슴 아린 느낌이 다시금 떠오를 때 진정 성취될는지도 모른다. 



#히메유리 탑  #히메유리 평화기념 자료관


1945년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작전이 시작되자 현립 고등학교 여학생(おとひめ, 오토히메)과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白百合, 시라유리) 200여 명은 육군 병원에 배속되어 부상병의 간호와 밥 짓기, 시신 후송 등의 업무에 동원된다.―명칭 ‘히메유리(姫百合)’는 두 여학교 이름의 일부를 따와 만든 것이다.― 대포 사격이 비처럼 쏟아지던 6월 18일 갑작스러운 해산명령을 받아 절망에 빠진 학생들은 전장을 헤매며 도망가다가 포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오키나와전에서 일본군은 미군이 본토에 상륙하는 것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 잠복하여 시간을 끄는 작전을 취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오키나와 현민을 집단 동원하고, 히메유리와 같은 학도단을 편성하여 학생들을 강제로 전장에 내몰았다. 히메유리 탑은 그 과정에서 희생된 학도생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전쟁의 어리석음과 교육의 문제, 평화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오키나와 평화 기념공원  #위령, 현충, 추모


오키나와 평화 기념공원은 오키나와 전쟁으로 희생당한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위령) 만들어진 공원으로, 전쟁을 기억하고 참상을 반복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세워졌다. 이 곳은 죽은 자에 대한 감사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들의 희생을 기리는 공간도 아니다. 단지 슬픔을 대하는 공간이다.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많은 검은 비석에는 주로 일본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그 밖에도 UN 연합군, 주민, 아이, 조선인 등등 전쟁 희생자의 모든 이름들이 있으나 위안부와 해녀, 근로대 등 조선인 여성의 이름은 없다. 일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비는 그 무수한 숫자가 주는 위압감이 있지만, 반대로 조선인 이름이 새겨진 곳은 텅 비어있는 공간이 주는 책임감이 있었다. 조선인의 이름은 한국 정부 차원에서의 사상자 발굴 시도가 미비했던 까닭에 '홍정필'이라는 개인이 유족을 찾아가 사망자 이름을 발굴하여 3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졌으나 2004년에 이 프로젝트가 끝나버려 현재는 중단된 상태다. 즉 실질적으로 모든 신원이 확인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위안부’의 경우 오키나와현이 사망자 이름을 새기는 데에 반대해서 새겨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이는 ‘위안부’의 이름을 새기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침해한다는 생각 때문인데, 오히려 가족들은 역사적 증언으로서의 의의를 생각해 각명을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익들은 ‘위안부’ 이름을 새기게 되면 이 시설은 평화시설이 아닌 반일 시설이 된다고 주장하며 각명을 적극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 평화 기념공원은 정치적인 시설도 아니고 전쟁을 기억하는 학습 공간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검증된, 유족의 기분을 존중하는 한에서 ‘위안부’의 이름도 새겨야 한다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관련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치비치리 가마  #집단자결과 집단강제사


치비치리 가마는 오키나와 전쟁 당시 집단 자결이 벌어졌던 동굴이다. 미군을 피해 동굴로 숨어 들어온 주민들은 “살아서 치욕스럽게 연명하느니 영광스럽게 죽으라”는 일본의 명령에 따라 자결을 택했고, 어머니가 자식을 칼로 찌르거나 돌로 때려죽이는 비극이 자행되었다. 때문에 84명의 사망자 중 48명이 어린아이들이었다고 한다. 차마 죽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 생존한 부모들은 살아남은 후에도 자식을 당신 손으로 죽였다는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치비치리 가마 사건으로부터 사람들은 두 가지 교훈을 떠올린다고 한다. 하나는 군대는 절대 주민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의 중요성이다. 치비치리 가마의 비극은 결국 미국 사람들은 도깨비이며, 미군에게 잡히면 여성들은 강간당하고, 남성들은 갈기갈기 찢겨 죽는다는 교육, 주입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해서, 치비치리 가마의 비극을 ‘집단자결’이 아닌 ‘집단강제사’라 칭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아이들과 그들 스스로의 목을 찌른 손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 투쟁현장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후텐마 기지를 이전하겠다는 명목으로 헤노코에 새로운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기지 이전'이 아닌 '기지 확장'임을 알고 있다. 헤노코 신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은 오키나와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바다 생물과 산호 보존을 위해, 하루에 3번 공사 차량이 드나드는 길목에 앉아 팻말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저항'한다. 이들은 무던히 주저앉고, '치워지기'를 반복한다. 오키나와를 더 이상 망가뜨리지 말라고,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바닷속 생명들을 해하지 말라고 절규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처량하리만큼 무력하나 동시에 무력하지 않다. 나는 이 날 평화를 염원하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강력한 에너지를 느끼고 왔다. 한국인들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이들은 투쟁현장에서 한국어로 노래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나도 목소리 높여 화답했다. 제주 강정마을과 너무나도 닮은 풍경에 놀랐다. 제주와 오키나와는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그들이 모두 '치워진' 길목에 건설 차량 수십대가 줄지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노랫소리가 귓가에 맴돌며 처절한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묘한 기분이다. 사진과 함께 글을 정리하며 오키나와에 있었던 열흘이 아닌, 나의 마음과 생각이 오키나와에 발붙이고 있었던 지난 반년을 정리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 열흘이 어떤 다른 여행보다 ‘알찼던’ 것은, 내가 오키나와에서 ‘장소’를 찾아 바삐 돌아다니지 않고, 오키나와 자체가 나에게 이미 ‘장소’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행지도가 무수한 핀으로 점철될 때 핀과 핀 사이의 사유의 공간은 지워진다. 내가 면허가 없어 렌터카를 이용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 따위는 조금도 없다. 30분이고, 한 시간이고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던 순간들, 도보여행 중 의도치 않게 길을 잃으면서 만났던 ‘우연’의 순간들을 통해 나는 오키나와와 더욱 ‘가까워졌다’ 확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기록’되지 못한 순간들, 편집되고 잘려나간 생각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비록 글로써 활자화되지 못했어도 나의 몸 한 구석 선명한 감각으로 남아 ‘기억’될 것이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기억 하나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기행 중에 내 또래의 일본 현지 활동가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후쿠시마를 비롯한 일본의 핵 문제에 대한 지식정보를 공유하던 중 2020 도쿄 올림픽 후쿠시마 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최근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피폭에 대한 심각성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안전'을 입증하겠다는 명목으로 후쿠시마 쌀을 배급하겠다는 방침에 한국에서 거센 비판 여론이 있는데, 활동가로서 이 이슈를 어떻게 보다 성숙한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을까 질문했더니 꽤나 인상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이 이슈에서 항상 가장자리로 배치되고 비가시화되는 존재들은 후쿠시마 주민들이라는 것이다. 후쿠시마 주민들은 일본 정부의 눈 가리기 정책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한 채 병들어갈 뿐 아니라 '오염된' 존재로서 사회에서 철저하게 차별받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이슈에 대응할 적에 후쿠시마 주민들과의 연대의 자리를 남겨놓는다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단순히 역사적 반성도 없는 오만한 일본이 오염된 후쿠시마 쌀을 배급하여 우리를 피폭시키려 한다고 말하면 감정적인 반일의 비탈길에 미끄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일본 땅 안에서 피해받고 배제당하고 있는 주민들의 목소리와 함께 간다면 우리는 민주와 인권의 이름으로 일본 아베 정부의 부조리, 언론탄압, 사회적 차별을 비판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내가 '이런 시국'임에도 굳이 일본을 와야 했던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던 것 같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바로 보고 우리가 비판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투쟁하려면 일본 내 양심적인 사람들과의 연대의 끈을 놓아서는 절대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국'이니까, '이런 시국'일수록, 그들과 맞잡은 손 안에서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 






photos by Gim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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