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드러낸 '세계화의 민낯'에 대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 지난한 코로나와의 ‘싸움’ 속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함께’의 수사들이 강조되었다. 지난 여름, 지하철에서 보았던 어느 광고판에서는 (아마도 ‘국민’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그래프를 밧줄 삼아 줄다리기를 하듯 힘껏 당겨 그래프를 완만하게 만드는 이미지가 재생되고 있었다. 코로나 초기의 ‘위드(with)’는 코로나를 대적(against)하여 ‘국민’이라는 방역 공동체를 ‘우리’로 묶어내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완만해지는 법을 모르고 출렁이는 그래프 속에서 어느새 함께의 ‘위드’는 코로나를 개개인의 일상으로 묶어내는 수사(With-Corona)로 수정되었다. 바이러스와의 불편한 공존에 먼저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일상, 즉 뉴노멀을 정의할 수 있는 우선권 역시 주어지기 시작했다.
방역이라는 국제사회의 공동의 목표 하에 팬데믹은 ‘국민국가’를 다시 단일하고 독립적인 행위주체의 위치로 올려놓는 데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다시 국적에 종속되며, 각국의 방역방침과 그 성과에 따라 여권은 개인의 국경을 넘는 이동을 제약하는 실질적 수단으로서 개인의 안전성(또는 위험성)을 입증하는 준거가 되었다. 국가는 다시 거대해지고, 국경은 봉쇄되며, 국제적 분업은 중단되었다. 이같은 탈세계화의 거대한 흐름을 초래한 판데믹이라는 재난과 트럼프라는 내셔널리스트 지도자라는 재난의 유사성과 둘의 상호연계성 안에서 우리는 모종의 '세계화의 역설'을 발견한다.
세계화가 만들어낸 글로벌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인구는 따로 있다. 세계화의 역설은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세계시민을 조건적으로 구성한다.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양극화 속에서 부자들은 글로벌 시민이 되지만, 난민은 빈자가 된다. ‘경계 없는 세계’는 인터넷에서나 적용되는 말이다. 빈자들에게는 도처가 철조망인 세계다. 따라서 난민들은 발리바르의 말마따나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보이지 않는 경계”의 목격자들인 셈이다. 트럼프는 코로나를 계기로 미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난민과 이주민에 대한 배타성을 노골화했다. 특히, 기득권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설파된 ‘정치적 올바름’을 옳고 그름의 가치에 대한 독점으로 간주하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목소리들을 세력화했다. ‘차별’이라는 정치투쟁의 대상을 문화투쟁의 영역으로 도착(倒錯)시킨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을 지적한 지젝과는 달리 트럼피즘으로 대표되는 반동적 움직임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혐오 자체를 또다른 정치의 도구로 삼았다.
우리가 갈망하는 노멀이 ‘누구의 정상상태인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부재한 노멀은, 재난의 토양이 되었던 이전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구(舊)노멀에 다름없을 것이다.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재난의 인과성에 대한 단절적인 이해를 보여주며, 우리가 세상과 관계맺고 있는 상호의존성을 외면한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분법과 생태사회의 관계성에 대한 몰이해는 코로나라는 예견된 재난을 초래했으며, 이미 기후위기라는 더 큰 재앙으로 우리 앞에 섰다. 코로나와 트럼프라는 재난의 단초를 제공한 ‘파괴’는 재난 이전부터 일찍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그 일상’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이유이자, 앞으로의 뉴노멀을 성찰적으로 재구축해야하는 이유이다. 뉴노멀에 대한 상상은 다음을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 일상’이 누군가의 비상상태를 전제로 유지되었듯, 우리가 재난이라 일컫는 오늘에야 비로소 빼앗겼던 일상을 되찾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
*2022년 3월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