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아파커플 Jul 26. 2023

엄마가 암에 걸린 나에게 너는 결혼하자고 했다

내가 당신과 결혼하기로 결심한 이유

나는 만으로 스물여덟, 너는 만으로 스물일곱. 한국 나이로 서른, 그리고 스물여덟 살.


결혼을 마음먹은 우리에게 많은 이들이 하는 질문, "어떻게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어?"




우리가 만난 지 2년 5개월 정도 되는 시점에 엄마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사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2차 병원에서 엄마가 검사를 받고 그에 대한 결과를 기다리던 일주일이었다.


혹시나 가슴에 있는 석회로 보이던 것들이 진짜 암일까 봐 두려워서 나는 인터넷에 '유방암'이라는 글자를 검색도 못했다.


나는 분명 하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미신이 떠올랐다. 옛날 어른들이 '부정 탄다'라고 하지 않는가. '암'을 검색창에 입력하면 꼭 엄마가 '암'이라는 진단을 받을 것만 같아 너무 두려웠다. 입에 '암'이라는 글자를 올리지도 못해 입술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다.


'암'에 대해 내가 가지는 이미지는 드라마에서 가련한 여주인공이 얼굴에 빛을 잃고 대머리로 시들어가는 모습뿐인데... '암'환자가 어떤 하루를 보내는지 어떻게 치료받는지 등등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얻으면 좀 더 나았겠지만, 나는 검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탄 듯 오르내렸고, 밤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방문을 꼭 닫고 울다가 잠들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남자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러면 바로 혼인신고할 거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래야 너의 법적인 보호자가 될 수 있잖아. 네가 입원하려고 해도, 수술하려고 해도 보호자 동의가 필요한데 내가 마음껏 너를 돌보기 위해서 그렇게 할 거야."

"......."


아주 예전에, 아마 초등학생일 때, 티비에서 본 건지 뮤직비디오에서 본 건지 뉴스 한구석에서 본건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때 어린이었던 나보다 오래 산 어른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하고 유명한 클리셰같은 이야기일 수 있으나 어린이었던 나는 살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남들에게 클리셰일지라도 처음 듣는 이에겐 클리셰가 아니다!) 그렇기에 적잖게 충격이었던 내용: 어떤 연예인이 암에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오랫동안 교제하던 남자친구는 시한부인 그녀와 결혼을 했다. 그녀를 간병하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하늘나라로 갔다.


수많은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이 되면 나도 그렇게 똑같이 할 수 있을까? 그녀가 죽고 나서 그는 어떻게 살아갔을까? 다른 사람을 만나 또 결혼을 했을까? 그 뒤에 삶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어린 나는 질문은 많았으나 정말로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질문을 하고 또 하고 파헤치는 건 답이 나올 것 같은 희망이나 실마리가 있을 때나 그렇게 하는 거지. 어른이 된다는 것, 책임 진다는 것,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는 정말 1도 답을 모르겠어서 잠시 질문 자체를 묻어 두기로 했다. (물음표 살인마인 ENTP가 질문을 멈출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정말 슬픈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의 대답이 방아쇠가 되어서 잊혀졌던 내 기억 속의 질문들을 헤집어 놓았다.


그의 대답에 담겨 있던 진심이 벼르고 벼른 날카로운 칼처럼 내 마음을 헤집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아, 어렸을 때 접했던 그 이야기가 진짜일 수도 있겠다. 세상에 정말 존재하는 이야기일 수 있겠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손 잡으면 손자까지 본다'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했다. 나는 그런 말이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땐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이해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사귀기로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도, 만날 때마다 그는 '우리의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결혼, ' 더 나아가서 정말 '아이'에 대한 이야기까지.

한국 나이로 스물네 살의 그와 스물여섯 살의 나. 어쩌면 나보다 그가 더 성숙했던 것 같다.


'결혼'이든 '출산'이든 언젠가는 하겠지만 당장은 생각이 없던 나는 그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결혼에 대한 이야기 금지. 나 스트레스받으니까 내가 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말 꺼내지 않기."


그때 남자친구는 정말 상처받은 눈으로 꼭 울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강했다. 상처받았지만, 꿋꿋이 내 곁에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의 벼르고 벼르던 그 진심이 통하는 날이 온 거다.


진심은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공기를 가르는 화살처럼 그냥 막을 새도 없이 빠르게 날아들어서 박힌다.

 



내가 만약 죽을병에 걸리면, 나를 마음껏 간병하기 위한 법적 보호자가 되기 위해 혼인신고부터 하겠다는 그의 말에 그냥 내가 그의 마음에 갇혀버렸다. (I was locked in his heart). 철커덕하고. 그리고 그와 진짜로 미래를 함께 꿈꿀 수 있는 '결혼'이 하고 싶어졌다.


이 사람이라면,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가 없어져도 내 곁에 있겠구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들과 상관없이 나도 그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그날 다짐했다.


원치 않지만, 설사 엄마가 암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 곁에 이렇게 든든한 네가 버티고 있으니, 정신을 바로잡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시가 떠올랐다.

출처: 작가 본인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 베르톨트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이 시에서처럼, 정말 비가 쏟아지면 그 빗방울에 내 마음도 같이 휩쓸려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네가 나를 붙잡아주었다.

빗방울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눈물을 닦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겠다는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나는 오늘 하루도 정신을 차리고 걷는다.

내가 사랑하는 네가 나를 필요로 하기에.



p.s.

사실 오늘 이 글은, 우리의 4주년이 되던 날에 내게 깜짝 프러포즈를 하며 읽어준 너의 편지에 대한 화답이야.

그때 네게 직접 주지 못했지만 늘 내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내 프러포즈 편지이기도 해. 몇일 전에 스드메 계약까지 하고 왔지만, 정식으로 나도 말할게. 우리 결혼하자. 이제 나와 남은 평생을 함께 하자.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가 건너온 수많은 '우연'과 '만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