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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브러리 Feb 05. 2016

<화양연화>(2000)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스쳐가는 순간들로 사랑의 시간을 인수분해하다.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 <화양연화>를 위와 같이 표현했다. 고등학교 수리시간 이후로 인수분해라는 단어와 연을 끊었던 문과생이었기에 이 한줄평은 왠지 모를 위협처럼 다가왔다. 덕분에 이 작품은 선뜻 재생하기 어려운, 하나의 과제같은 영화로 남겨져있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지금. 나는 이동진 평론가의 짧은 코멘트에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다. 인수분해의 정의 따위는 몰라도 상관없다. <화양연화>는 찰나의 시간들이 켜켜이 쌓이며 사랑이란 감정에 도달하고야 마는 모습을 아름답게 담아낸다. 두 남녀의 순간들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에 적용된 인수분해의 원리를 자연스레 느낄 수가 있다.


영화 <화양연화> 스틸컷.


한날한시에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오게 된 주모운(양조위 분)과 소려진(장만옥 분).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운명적인 둘의 만남은, 오히려 거대한 필연인 것처럼 느껴진다. 각자의 가정이 있었기에 첫만남에서 그들은 서로를 단순한 이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허나,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마작판에서 스쳐가는 둘의 모습이 잡힐 때,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곡인 '유메지의 테마'가 들려온다. 가볍게 눈빛을 교환할 뿐인 찰나의 순간은, 끈적하게 늘어지는 테마곡과 함께 무한의 시간으로 확장되어 간다. 시간의 상대성 이론이 시청각적으로 표현되는 순간이다.


 '유메지의 테마'는 작품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곡이다. 초반부 모운과 려진이 서로를 스쳐가는 장면에서 주로 흘러나오던 이 배경음은 점차 사용범위를 확장해간다. 나중에는 서로를 떠올리는 개인적인 시간이나 두 사람이 함께하는 시간 속에도 유메지의 농염한 멜로디가 울려퍼진다. 이 멜로디는 시간은 물론, 공기의 흐름마저 전혀 다른 성질의 것들로 채우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질적이면서도 적절하다. 일반적인 물리법칙마저 거스르는 '유메지의 테마'는, 마치 모운과 려진의 만남이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이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다.


한 방에서 같이 소설 연재를 하는 모운과 려진. 유난히 거울 속 이미지를 자주 보여준다.


주인공 두 남녀는 사실상 불륜의 피해자들이다. 둘의 눈빛이 찰나동안 스쳐가는 시간에, 그들의 배우자들 사이에서도 또 다른 시선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외도의 주인공들의 심중에도 '유메지의 테마'가 울려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기존의 관계는 허물어지고 전혀 새로운, 다소 비도덕적인 관계가 새로이 생겨난다.


모운과 려진 커플, 그리고 배우자 커플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기껏해야 '속도의 차이'에 불과할 것이다. 모운과 려진은 최초로 배우자의 외도를 짐작했을 때 각자 말 못할 고통 속에서 괴로워한다. 순간의 감정에 잠시 휘청이고 마음속에 '유메지의 테마'가 비집고 흘러나왔을지언정, 그들은 결코 그것을 현실화하지 않았다. 되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이성의 힘으로 본능적인 감각을 억지로 틀어막았던 것이다. 그랬던 그들이었기에 배우자의 불륜에서 비롯된 배신감이 배로 커질  수밖에 없다.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던 려진이 본격적으로 감정에 충실하는 모습.


우린 그들과 다르다 생각했는데.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알고 싶었어요. 이젠 알 것 같아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된 거죠.


하지만 모운의 위 대사처럼 그들은 배우자의 선택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결국 시간의 차이만 존재할 뿐, 결과는 그들이나 자신들이나 동일하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한다. 비록 배신에 대한 복수의 차원에서 이어졌던 만남이었지만,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만약 모운과 려진 사이에서 지펴진 감정의 불씨가 보다 빠르게 커졌더라면, <화양연화>의 주인공은 그들의 배우자들이 도맡게 되었을 수도 있다. 어째보면 임자가 있는 몸을 사랑하게 되어야만 하는 비극적 설정을 부여한 왕가위 감독이 잔인하게도 느껴진다. 


그들의 사랑은 아프다. 감정을 희생한 대가로 돌아온 것은 배신이었다. 그렇다고 지금 곁에 있는 이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도 없다. 그때까지도 자신을 찾아온 잔인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려진이 그렇다. 비교적 쉽게 아내의 외도를 인정해버리는 모운과 달리, 려진은 남편의 외도를 좀체 수용할 수 없다. 얼결에 두 갈래길 앞에 놓인 그녀의 운명은 가혹하다. 결국, 둘은 진심이 담긴 부재중 전화만을 남긴 채 이별하게 된다. 한날 이사를 함으로써 시작된 거대한 필연은 수신자 없이 허공에 퍼지는 전화벨 소리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그들은 마치 꽃처럼, 순간의 아름다움만이 허용되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들인 것이다.


구멍에 자신의 비밀을 속삭이는 모운.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아름다운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아름다움과 순간성은 필히 공존해야만 하는 단어들이며, 혹시나 한 쪽이 누락된다면 나머지 한 쪽의 의미마저 퇴색된다. 시간에 비례해서 아름다움은 점차 힘을 잃어가게 되는 것이다. 꽃이 절정의 순간 후에 문득 져버리듯이, 아름다움은 언제나 유한적이다. 그렇기에 그 찰나의 순간들이 보다 값지고 귀중한 추억이 되는 것이다. 모운과 려진의 사랑이 애절하고 안타까운 이유는, 비단 동정심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공유하는 아름다운 순간들 역시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단순한 기억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게 되리라는 슬픈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해 모든 것을 볼 수 있겠지만 이제는 희미하기만 하다."라는 마지막 자막은 <화양연화>의 전반적인 주제를 관통하는 한줄이기도 하다. 선명하고 뚜렷하기만 했던 그 시절의 감각과 감정은, 오로지 그때에만 허용되던 특권과도 같은 것이다. 순간을 지나온 이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곤 그저 희미한 기억의 편린 뿐이다. 아무리 반추해보아도 그 찰나의 감정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일은 불가능이다. 아름다운 순간은 이리도 잔혹스럽기까지 하다.


작가 김훈은 에세이 <자전거 여행>에서 꽃의 특성을 면밀히 관찰해나간다. 그는 꽃이 피고 화하는 과정까지도 세세히 묘사하고 있다. 꽃에게 허용되는 아름다움의 시간은 짧다. 그 기간의 끝에는 거대한 자연이 시퍼런 낫을 들고 서있다. 그리고 미련없이 아름다움을 앗아가버린다. 영화 <화양연화>는 이 냉정한 자연의 원리를 인간사에 고스란히 적용시킨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결코 길지 않은 화양연화의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김훈의 글귀로 마무리짓고자 한다.


동백은 한 송이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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