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서 묵상하기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_시편 139편 7~10절(개역한글판)
전세계 종교지도자들의 축제라고 할 수 있는 로잔대회에 와 있다. 1974년부터 벌써 4번째이니 50년의 역사가 쌓였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서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유럽, 미국, 중동에서 5000여명의 친구들이 한국을 찾아왔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강의를 듣고 토론을 하는 가운데 벅찬 감정을 느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선교로 씨름하고 있구나를 깨닫는 순간이다. 다행히 여기에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오게 되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으로 여러가지 영상을 찍고 이야기를 기록한다. 많은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 감동을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새벽에 일어났다.
지나온 날을 되돌아 본다. 그 어느것 하나 붙잡을 것 없이 꽁꽁 얼어붙은 손을 호호 불어가면서 터벅터벅 걸어왔던 인생 같았다. 12살때는 조금 나아질 줄 알았는데 40이 넘어도 나아지지 않는다. 인생의 눈보라는 매일매일 더 악착같이 살결을 스며드는 것 같은 고통이다. 삶이 편했으면, 삶이 조금 더 쉬웠으면 하지만 하나도 쉬운게 없다. 그리고서는 시편을 편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초원 위에 누웠다가 잠에서 깬 다윗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하나님이란 존재를 몰랐을 때는 외로움에 치를 떨면서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지만, 하나님을 경험하고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순간부터는 매번 묻고 답하고 대화하고 생각하는 일상의 반복이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 사람들이 의미없이 죽어 가는 것들, 그것을 보고 있는 나의 모습.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지만 여전히 세계의 비참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깊어지는 모양새다. 언제부터 이런 '세계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마치 세계의 지도자가 된 것처럼 온 세계의 문제를 끌어앉고 씨름하면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떤게 근본원인일까? 어떤 것을 바꿔야 할까? 이러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이 하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의 정점으로 들어가게 된다. 누구나 동일한 인생의 시간을 선물 받는다. 태어난 환경은 다를지라도 우리의 내면에는 자유로운 시간들이 새벽 날개를 치면서 날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인생의 다양한 부분에서 그 날개짓은 때론 바람이 되고, 때론 그들이 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이 없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 때문에 힘들어하고 인간 때문에 기쁘고, 인간들 사이에서 외롭고 인간들 사이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가장 최악일 때도 사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 가장 최선일 때도 사람들의 실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어쩌면 하나님이 이러고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이 다른 설교나 전도가 아니라 성경책 자체였기 때문에 나는 이런 고민이 있으면 다시 성경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성경의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를 돌이켜보고 그들이 느꼈을 감정에 대해서 고민해본다. 자신의 인생을 달리보기 시작하면서 그 바깥을 생각하는 시야가 생기면 비로소 묵상이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새벽에 묵상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의 위치와 나의 존재, 다른 사람들의 의미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성경을 보면 성경인물들이 살았던 삶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로잔대회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친구들을 생각한다. 각자의 인생에서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머나먼 한국땅을 밟았다. 인도, 미국, 영국, 모잠비크, 네팔, 폴란드에서 찾아온 이들이 해주는 이야기들이 새롭고 또 감동이 된다. 인간은 40이 넘으면 얼굴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말한다. 그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비장함과 미소 때론 슬픔과 고통의 기도의 흔적들이 보인다. 세계의 비참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면서 이것을 바꾸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다. 나만 이렇게 고민하던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무엇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들기 때문이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나 낯설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모두 이해받는 느낌이 든다.
지금 내 앞에 놓여져 있는 일들이 제법 큰 단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다윗이 해결해야 했던 문제까지는 아니더라도 미래를 향해서 꿈틀대는 시간들이라서 그런지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다. 40살까지 준비했던 것들을 이제 써야 하는 때가 오는 것도 같다. 매번 가장 좋은 것을 내와야 하는 것 같은 가나의 혼인잔치 같은 느낌도 든다. 국가전체를 바꿀 수 있는 교육체계의 변화의 아이디어라던지,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소망을 회복하기 위한 프로세스라던지, 단체들이 고민하는 전략을 짜는 일에 대한 해결책이라던지, 정당에서 당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커리큘럼을 짜는 일이라던지, 기독교인문학을 전파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스텐리하우어워스의 책의 두께라던지. 나는 사실 문득문득 이렇게 하고 있는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면 한 걸음 물어서고 싶은 마음도 든다. 아직 갖춰지지 않은 것 같은 삶의 질서가 있는데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 같은 애매함이 막막함으로 눈 앞을 가리기 때문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끝에 거할찌라도 거기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는다. 한동대학교에 가까스로 들어갔던 시절부터 아예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는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도움이 필요하면 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만큼의 넓은 아량을 위해서 기도한다. 사람들이 찾을 때 젠체하지 않고 종이 된 듯이 도와주고 밀어주면서 함께 걷기를 원한다. 오늘도 해가 서서히 떠오른다. 아침햇살과 같이 얼굴을 그을릴 때 새벽날개치면서 흠뻑 젖었던 얼굴의 땀들이 빛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 빛나는 영광의 순간은 어쩌면 하나님과 나만 아는 비밀일 것이다. 이렇게 조금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와서 사람들과 만났을 때의 감격처럼 빛나는 순간일 것이다. 다시 이 순간을 뒤로 하고 오늘은 조금 더 깊이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준비를 한다. 또 다시 세계 열방의 사람들과 예배하면서 로잔대회에 참석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