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텐리하우어어스 1~3장까지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현대 기독교 윤리학과 신학에서 중요한 목소리로 평가받는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독특한 배경과 철학은 공동체 중심의 윤리와 비폭력, 덕 윤리를 강조하며, 기독교 신앙을 윤리적 삶으로 연결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 매우 필요한 학자 중에 하나이다. 그의 사상은 특히 평화주의적 관점과 신앙적 실천을 강조하는 아나뱁티스트 전통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독특함을 가진다. 함께 기독교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책을 읽고 있다. 이번달에는 내가 발제를 담당하게 되었다. 스텐리하우어워스의 '하나님의 나그내된 백성'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나는 스텐리하우어워스가 말하는 '구별된 교회'보다는 조금 더 진보적이여서 '변화시키는 교회'와 같은 '대안교회론'을 더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기독교가 한번 쓸고간 미국에서 교회는 무엇인가를 묻는 책이라서 요즘의 한국교회에 주는 메세지가 크다는 생각을 한다. 조금은 촘촘하게 그리고 과거의 정리했던 내용들까지 해서 정리해보려고 한다.
성장 배경
하우어워스는 1940년 텍사스 주 댈러스의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벽돌공이었으며, 하우어워스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성장했다.
이러한 배경은 그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평생을 기독교적 윤리와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우어워스는 이 경험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그의 윤리학에서 ‘함께 일하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학문적 배경
하우어워스는 베일러 대학교(Baylor University)에서 철학과 영어를 전공하며 학부 과정을 마쳤고, 이후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에서 철학 석사(M.A.)와 신학 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예일에서 그는 기독교 윤리와 신학을 체계적으로 배우며, 철학적 신학과 윤리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와 아나뱁티스트 전통에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이러한 학문적 배경이 그의 기독교 윤리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하우어워스는 노트르담 대학교(University of Notre Dame)에서 강의하며 학문적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가, 이후 1983년 듀크 대학교(Duke University)로 자리를 옮겼다. 듀크 대학교 디비니티 스쿨에서 그는 기독교 윤리와 신학을 가르치며 40년 넘게 연구와 저술 활동을 이어왔다. 그의 연구는 비폭력, 공동체 윤리, 덕 윤리 등을 중심으로 하며,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의 관점을 현대 사회와 기독교 공동체에 맞게 재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주요 사상
공동체로서의 교회 : 하우어워스는 교회를 세상 속에서 독립적이며 독특한 윤리적 공동체로 보았다. 그는 기독교인이 단순히 개인적인 구원과 도덕적 규범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관계 속에서 신앙적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교회는 세속적 사회와 구별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폭력과 평화주의 : 하우어워스는 아나뱁티스트 전통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폭력에 반대하며 비폭력적인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비폭력과 평화를 실천하는 것이 신앙적 의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비폭력 평화주의는 그의 윤리학의 핵심 중 하나로, 국가의 폭력적인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덕 윤리 :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윤리가 특정한 규칙에 얽매이기보다는 덕성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성품이 공동체 속에서 형성되며, 그리스도 중심의 덕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구현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덕 윤리적 접근은 전통적인 규범 윤리와 차별화되며, 구체적 상황과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윤리가 실천된다고 보았다.
이야기와 정체성 : 그는 ‘이야기(story)’라는 개념을 통해 신앙적 삶과 공동체의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다. 하우어워스에 따르면, 기독교인은 예수의 이야기 안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며, 자신의 삶을 해석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고, 신앙적 가치를 공유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요 저작
Resident Aliens (1989) : 하우어워스가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과 공동 저술한 이 책은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과 구별된 윤리적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교회가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의 대안적 공동체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A Community of Character (1981) : 이 책에서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공동체의 덕성과 성품 형성을 강조했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제로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독교 윤리가 개인적인 도덕 규범이 아닌 공동체적인 윤리임을 보여준다.
The Peaceable Kingdom (1983) : 하우어워스는 이 책에서 그의 평화주의적 윤리를 본격적으로 제시했다. 비폭력과 평화가 기독교 윤리의 중심에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통해 인간 사회가 평화의 공동체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Hannah's Child: A Theologian’s Memoir (2010) : 자서전인 이 책에서 하우어워스는 개인적인 신앙 여정과 첫 번째 아내 앤 클레라 라지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솔직하게 고백한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신앙과 학문적 성장을 이야기하며, 앤과의 결혼 생활에서 겪은 어려움이 자신의 윤리적, 신학적 통찰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미국에서의 위치와 영향력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미국에서 현대 기독교 윤리학과 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학자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그는 급진적인 비폭력 평화주의, 공동체 중심의 윤리, 덕 윤리를 강조하면서, 전통적인 기독교 윤리를 현대적이고 실천적인 방식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사상은 많은 신학자와 기독교 윤리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독창적인 사상과 글은 미국 교회와 신학계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었다.
하우어워스는 또한 미국 사회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며 기독교 윤리가 세속적 가치에 타협한다고 비판했다. 그의 사상은 특히 미국의 복음주의 및 메인라인 교단에 대안적인 목소리를 제공했으며, 기독교 신앙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교회의 역할을 재고하게 했다. 그의 영향력은 듀크 대학교에서의 오랜 교수 경력과 그의 저술 활동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현재도 미국과 세계의 기독교 윤리학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접하는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적인 교회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와 국가가 너무 깊은 동맹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아서 문제가 된다. 특히 한국교회에 대해서 국가와 국민들의 인식은 매우 싸늘하다. 교회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교회는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은 오히려 우리가 '서구문화에서 빈번한 정교통합'이라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음을 말한다. 기독교가 독점하던 시기의 '크리스천돔'은 하나의 기획이었지만, 그것이 진리였는지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히려 기독교가 점유하던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아니라 '대항문화'적인 태도로 살아야 한다라는 것이 하우어워스의 관점이다.
문제의식, 원심력과 구심력
지금까지 교회의 사회전략은 '교회가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원심적 전략이다. 중앙에서 밖으로 뻗어나가는 전략이다. 교회에서 세상으로 파송을 받아서 세상을 바꾸자는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세상에 동화된 기독교는 '주화입마'를 격게 되었다. 세상을 바꾸려고 했는데 오히려 세상처럼 바뀌었다는 것이 '칼바르트-요더-하우어워스'로 이어지는 주장이다. 이러한 문제제기에서의 대안은 '교회가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라는 것이다. 교회의 존재론에 있어서 'being'의 완정성을 먼저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심적 전략'이다. 흩어진 교회의 개념을 하나로 묶어서 먼저 교회됨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탈자유주의
하우어워스의 전반적인 방향은 '탈자유주의'이다. 자유주의의 노선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관점을 비판적으로 개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근본주의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장소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시카고 학파와 예일학파로 구분이 된다. 시카고 학파에서는 교회의 유일성을 너무 강조하게 되면 세상에서 너무 폭력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오히려 '소통과 이해'를 중시한다. 예일 학파는 성서를 붙들고 성서로 돌아가서 원래 의미를 찾아보자고 말한다. 기독교 신학이 보편이성에 채널을 맞추다 보니깐 기독교 고유의 정체성을 놓쳐 버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하우어워스는 예일학파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보통 기독교인들은 두 가지로 나누어졌다. 우리는 두가지로 나누어진 해석들을 그대로 놓는가 혹은 새롭게 할 것인가라는 기로에 서 있다.
기독교 narrative의 힘
하우어워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매킨타이어의 '덕이후'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매킨타이어는 본격적인 공동체주의자로서 성품윤리를 강조하기 때문에 하우어워스도 이에 기반을 두고 공동체와 성품, 본질에 대해서 고민한다. 기독교에서 우리가 강조되어야할 부분은 '이야기'narrative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이야기와 신약에서의 그리스도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을 스텐리 하우어워스가 계승해서 계속해서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교회 본질의 회복
식민지로 살아가는 일이 교회의 본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기독교 문화가 세상 속에서 식민지로 살고 있다고 본다.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의 관점이다. 이 책은 원제목이 Resident Aliens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낯선 곳이라고 하는 것이 담겨 있다. 그럼 왜 낯선 곳일까?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법과 제도, 질서와 문화가 세상에서 만들어진 제도와 문화와 다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세상에 적용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교회다움'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지향과 가정은 그 자체로 이방인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교회 변증과 대안
기독교는 지금까지 세상에 복음을 설명하려고 했다. 슐라이허마흐에서부터 시작해서 틸리히까지 '계시'가 아니라 이성의 합리성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거의 100년을 이렇게 썼었지만 그것이 성공적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기독교다움의 독특성과 정체성'을 삭감시키고 혼합된 모습 자체로 파편화되었다. 실용주의적인 태도로 접근해서 기독교 변증은 오히려 아무것도 안 남게 되었다. 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내용이지 믿음의 적용이 세상의 방식과 맞을 것인가의 문제가 이나라는 것이다. 성경 자체는 그렇다. 그런데 우리의 삶 자체는 그렇지는 않다. 그런데 이것을 바꾸는 방식은 성경을 잘 해석해서 제시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제대로 성경을 믿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과 창조성의 발현이 자연스럽게 경로를 만들어 갈 것이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도 (진보교회와 마찬가지로) 정치참여에 뛰어들었다. 따라서 정치참여는 진보, 정교분리는 보수로 구분하여, 보수교회와 진보(자유주의 liberal)교회로 나누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둘 다 교회와 국가의 협력과 일치, 조화를 꾀하는 콘스탄틴적 기독교에 속해 있다.
두 교회의 도덕적 전제는 무엇인가?: 오늘의 미국이라는 민주주의 사회는 무엇에 의해, 어떤 동력과 동인(motif)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가?
교회의 사명은 영혼구원이라는 사적인 종교영역에 관여하는 것이다
보수 복음주의자들
제리 포웰(리버티대학교, 텔레반젤리스트, 근본주의적 보수복음주의자, 도덕적 다수 운동)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의제(agenda)를 가지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현실 사회안에서 구조 변혁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자유주의 기독교인들)
라인홀드 니버(기독교현실주의)
현대사회의 기본동인은 <개인의 자유>인데, 이 자유란 사실상 그 사회의 전통과 공동체의 규범과 상관없이 개개인의 욕망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권리를 말한다.
“우리 현대인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개인의 권력을 소중히 여긴다. 간단히 말해, 우리 사회는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의 독재자로 살아가게 해주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전제위에 세워져 있다”(55).
오늘의 교회 역시 소비자 지향적인 조직체가 됨으로써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선택할 개인의 자유의 권리를 붙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신앙을 (교회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독특한 가르침에 따라 기독교적인 삶의 원칙을 설교하고 가르치는 구원의 기관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시장 원리에 맡겨 버리고 있다.
국가는 시민이 최고의 충성을 바치는 대상이다. 모든 시민은 국가에 충성한다. 이제 국가는 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들은 도덕적인 통합을 이루기 위해 전쟁에 의존한다: 이는 마치 국가가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나를 위해 죽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잘못된 기독교 정치: 기독교 사회운동
자유주의 교회: 기독교교회협의회(NCC) - 정의로운 평화를 위해 제한적인 범위의 군사력 사용을 제안하여 전쟁을 지지하기도 한다.
보수주의 교회: 제리 폴웰 – 거듭난 기독교인들이 정치권력을 점유해야 하며, 세속적 휴머니즘에 맞서기 위해 공립학교에서 기도소리가 울려 퍼져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과제는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상을 더욱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첫째 가는 과제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바르게 해석하거나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이 고백 자체가 평화와 정의를 함축하고 있는, 대단히 정치적인 고백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정치든, 평화든, 정치적 실천에 참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우리 신앙의 기준이 되며, 우리 신앙이 제도로 구체화된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또 우리에게, 하나님 없이도 자신이 진리가 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강령들을 믿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쳐 주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다
하우어워스는 변혁주의적 사회전략을 매우 비판한다.
“비록 니부어는 자유주의자들을 ”문화에 속한 그리스도“(Christ of Culture) 진영에 포함하지만, 미국의 주류 자유주의 개신교회가 되고 싶어 했던 교회는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Christ as the Transformer of Culture)였다. ‘문화를 변혁하는 그리스도’는 문화에 굴복하지 않았으며 또 문화에 담을 쌓고 무책임하게 도피하지도 않았다. 변혁주의적 견해를 따르는 교회는 미국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사회를 예수가 인정할만한 곳으로 변혁하기 위해 분주히 일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문화』 만큼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평가하는데 방해가 된 책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니부어의 ‘문화를 변혁하는 교회’는 사실은) 콘스탄틴주의의 사회전략을 승인해 주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 니부어가 전개하는 논증방식을 보면, 변혁주의 유형이 가장 좋은 것으로 보이도록 유도하고 있다”
변혁유형의 교회들은 교회가 세상을 바꾸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세상이 교회를 길들여 버렸다. 교회가 세상에서 사회적 책임과 역할을 강조하면서 쉽게 “문화”를 승인하고 타협하면서 교회만의 독특성을 억누르게 되었다.
분파적이라는 오해: 이것은 분파주의(sectarianism)인가?
교회만이 세상에 알려줄 수 있는 그런 정치적인 대안을 들고 세상과 만나게 될 때, 이것을 분파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재세례파 사람들은 도피한 것이 아니라 칼뱅파, 루터파, 로마 가톨릭파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쫒겨난 것이다.
사회전략인 교회
하우어워스는 교회야말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최선의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교회는 사회전략을 갖지 않는다. 교회 자체가 사회 전략이다”
교회가 세상 속에 있어야 하느냐, 세상 밖에 있어야 하는가 하는 논쟁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교회가 세상에 봉사하려면, 세상 속에 존재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가 지나치게 자발적으로 세상에 봉사하려고 한데서 우리의 심각한 비극들이 생겨났다.. 교회가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일은 어떤 식으로, 즉 어떤 형태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세상안에 있어야 하느냐의 문제다”
a). 행동주의 교회(activist church): 교회를 개혁하는 일보다는 좀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인다. 이 교회는 사회의 구조악을 개선하고 인간화된 사회를 건설하는데 주력한다.
b). 회심주의 교회(conversionist church): 사회의 구조는 결국 인간의 죄로부터 발생하므로 이 교회는 사회구조의 변혁으로부터 개인의 영혼 구원의 문제로 바꿔 버린다. 교회는 오직 인간의 내적 변화를 위해서 일한다.
c). 고백적 교회(confessional church): 고백적 교회는 회심주의자들의 개인주의와 행동주의자들의 세속주의를 거부하는 입장이다. 고백적 교회의 사회변혁 입장은 개인의 정신을 바꾸거나 사회를 변혁하는데 있지 않고 먼저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결단하는데 초점을 두고자 한다.
고백적 교회도 회심을 말하는데, 여기서 회심이란 “세례를 받아 새로운 백성, 즉 대안적인 폴리스(polis)이자 교회라 불리는 대항문화적인 사회조직에 접붙혀지는 긴 과정을 의미한다”(71).
고백교회는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있어서 실용성이나 효율성보다 신실함에 강조점을 둔다.
고백적 교회는 이를 위해 사회속에서 가시적인 공동체, 즉 세상과 구별된 대조사회가 되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적인 교회란,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 약속에 충실하며, 원수를 사랑하고 진리를 말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의로운 일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사는 것, 이러한 일을 통해 놀라운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하면서, 세상을 향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장소다”
고백교회도 행동주의 교회처럼 세속의 운동들에 동참할 수 있으나, 그것은 교회의 필수적인 선포행위의 한 부분으로 볼 뿐이다. 고백교회는 교회의 증언 중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것(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은 살아있고, 생기 넘치며 가시적인 신앙 공동체를 실제로 이루어 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 나라의 울타리는 카이사르 나라의 경계선을 초월하고, 교회의 주된 정치적 과제는 제자도에 따르는 희생을 분명히 알고 기꺼이 그 값을 치를 수 있는 사람들을 세우는 것임을 다시 선언하는 교회,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교회다”
5. 왜 구원이 모험인가?
주류 기독교가 이해한 구원관은 예수 믿고 내 영혼의 평안을 추구하며 살다가, 죽은 다음 영혼의 영생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나 구원이란 모험이다. 즉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는 행동이다.
그리스도인은 불신앙의 사회 속에서 나그네 된 거류민으로 살고 있다. 세상(문화)은 우리의 영구적으로 머물 정박지가 아니라 식민지다. 우리는 지금 불신앙의 세계에서 다른 가치와 지향점을 가지고 세속 문화와 충돌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현대 사회의 특징: 자기중심주의, 고독, 피상성, 소비자중심주의
무신론적 문화에서 우리는 낯선 거주자로 살면서 기독교적인 미덕에 끈질기게 공격과 비난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으며,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기독교 식민지에서 세상(문화)의 도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교회는 하나의 식민지다. 식민지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한 곳에 정착하고 자기 소유권을 주장하고 울타리를 치고 자기의 영역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적대적인 세상에서 온갖 교활한 방식으로 믿음에 공격을 가해 오는 이 세상 속에서 식미지가 전투태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79).
교회가 식민지란 의미는 , 예수를 따라가고자 애쓰면서 이동하는 백성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식민지는 모험이다
구원이란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일종의 중간 지점에서 출발하는 시작이다.
신앙이란 이야기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예수 안에서 창조하신 새 백성의 사역에 동참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초청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구원받는 다는 것은,
1) 온 세상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인 그 모험(새로운 삶의 방식에 뛰어 들라는)에 참여하는 것을 말한다.
2) 교회 공동체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일치시키는 훈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다. 구원이란 우리의 새로운 자기이해에 도달하는 것을 말한다. 구원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며, 한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를 말한다.
하우어워스가 말하는 구원이란
1). 믿음을 고백한 즉시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사영리식의 구원도 아니며(구원은 완료형이 아니다),
2). 먼 미래에 들어갈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사는 것도 아니며(구원은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다),
3). 불신앙의 세계에서 식민지 백성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예수적 윤리(십자가와 평화주의)를 따르는 제자도의 공동체, 즉 새로운 이야기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1).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전적으로 따른 다는 것을 말한다. 믿는다는 것은 제자도다(To Believe is to Follow).
그리스도인은 매일의 삶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삶을 인격적으로 본받고 따르는 제자도를 의미한다..
2). 속죄신앙을 넘어 모범신앙을 강조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 용서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속죄의 은총을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Savior)만이 아니라 삶속에서 본받아야 할 주님(Lord)도 되신다.
3).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삶의 새로운, 그리고 전적인(total) 변화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전적으로 새로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며, 보라 새로운 창조(new creation)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세상이로다”(고후 5:16-17). 그리스도인은 세상질서에서 새로운 질서로 들어 온 사람이다. 이제 옛 세상, 옛 가치와 삶의 원리에 포박되어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적 가르침, 하나님나라의 가치, 그런 삶의 원리로 살아가야 한다.
4).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즉 제자도의 삶은 구체적으로 보여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제자로 산다는 것은 우리안에 만연된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이겨내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외로운 개인으로, 익명으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하며 지낸다. 주안에서 부름받은 형제 자매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우리의 삶의 방식을 개인주의적으로, 탐욕적으로 만들어 가는 자본주의와 소비주의를 경계하며 살아가는 삶일 수 밖에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구별된 대조사회(contrast society)로서 교회를 세우며 세상속에 빛과 소금이 되고자 힘쓴다.
교회는 예수 윤리를 본받아 자유주의적 세상 문화를 거절하고, 거스르며, 세상문화와 대조적인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체류자들(sojourners)이며, 제자도 공동체이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이라는 개념은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윌리엄 윌리몬이 저술한 Resident Aliens에서 제시된 것으로, 기독교인이 세속 사회에서 어떤 정체성과 역할을 지녀야 하는지를 깊이 있게 설명하고 있다. 그가 가진 이 개념은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속하지 않은 "외국인"이자 "나그네"로서,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은 세속 사회와 다르게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따라 사는 공동체를 형성하며, 그 속에서 참된 신앙의 정체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존재들로 이해된다. 우리는 오늘 스텐리하우어워스의 교회론과 구원론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다시 한번 교회론의 의미와 목적을 정리하고 마치자.
스텐리하우어워스에게 교회의 의미와 목적
세속 사회와의 단절된 소속감 :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이라는 표현은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 독특한 정체성을 지녔음을 강조한다. 이들은 세속적인 규범이나 이념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지향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우어워스는 이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가 주류 문화와 사회 구조에 동화되기보다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독립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 나라의 미리 보기로서의 역할 :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다. 세속적 환경 속에서 이들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사랑, 평화, 정의, 자비를 구현하며 살아야 하며, 이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삶은 단순한 도덕적 규범을 넘어, 영적 변화와 깊은 신앙적 헌신을 요구한다.
세상 권력과의 거리 두기 :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은 기독교인들이 세속 권력 구조와 지나치게 결탁하거나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은 세속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오히려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이들은 세상 권력이 제공하는 권위나 지위에 의존하기보다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비폭력과 겸손한 태도로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전하는 존재들로 묘사된다.
공동체적 구원의 추구 :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이라는 개념은 개인적 구원이 아닌 공동체적 구원을 지향한다. 이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이나 도덕적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에서 서로의 믿음을 강화하고, 함께 성숙해가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러한 공동체적 삶을 통해 이들은 서로의 신앙을 지지하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일상 속에서 구현되도록 돕는다. 이러한 공동체는 세상의 가치와 구별된 삶을 실천하며, 세속적 영향에 저항하는 데 필요한 신앙적 지원을 제공하는 대안 공동체로서 기능한다.
정체성 형성과 성품의 변화 :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은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 신앙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부름받았다. 하우어워스는 기독교인이 단순히 도덕적 규범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인격과 성품의 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일종의 덕 윤리적 접근으로, 기독교인이 하나님 나라의 덕목을 성품으로 채워나가는 과정 속에서 세상과 다른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삶 :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본받아 사는 존재들로서, 예수의 삶을 그대로 재현하려 한다. 이들은 겸손과 섬김, 용서와 사랑을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며,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속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지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미래적 소망과 현재적 실천 :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면서도, 현재 속한 세상에서 그 소망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실현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현재의 삶 속에서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고 평화를 추구한다. 이러한 삶은 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기독교적 윤리관을 반영한다.
세속적 유혹에 대한 비판적 태도 :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은 세속적 유혹과 가치 체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이를 단순히 따르지 않고 신앙에 기초한 삶을 살려고 한다.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공동체가 주류 사회의 물질주의, 경쟁적 사고방식, 이기적 가치관에 물들지 않도록 신앙적 각성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러한 세속적 가치관과 타협하지 않고, 신앙적 이상에 맞추어 자신들의 삶을 재조정해 나가는 데 집중한다.
미국 기독교와의 차별성
이 개념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일원으로 살면서도 세상의 흐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일종의 대안적 생활 방식을 제시했다. 미국의 주류 교회와는 다르게 하우어워스는 세속 사회와 기독교 공동체의 단절을 강조하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현하는 독립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역할을 부각했다.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은 국가, 정치, 문화와 같은 세속적 권력에 종속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하며 살도록 요청받았다.
하우어워스와 윌리몬이 제시한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은 단순히 교회의 역할을 강화하자는 주장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세속적 가치와는 구별된 독특한 윤리적 삶을 살며, 하나님 나라의 증거로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이상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