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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정의를 실현하기 전에 포용이 가능할까?

미로슬라브 볼프_배제와 포용 5장 억압과 정의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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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슬로브 볼프의 글은 어려운 듯하지만, 사실 사색을 매우 많이 해야만 보이는 글귀들이 있다. 이번에 스터디에 참여하면서 볼프가 고민하는 부분에서 나도 멈춰섰던 부분이 많다. 지난번에는 성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하나님께 인간의 관계를 투사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부터 내려오는 정체성으로 성을 보자고 했던 게 기억난다. 이번에 볼프는 5장을 관통하는 핵심 전제로 억압(Oppression)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억압은 단순한 개인적 차원의 가해나 순간적인 폭력 행위를 넘어서, 한 집단이 다른 집단의 존재 방식, 정체성, 그리고 문화적 서사까지 조직적으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구조적이고 제도화된 악이다.


억압은 피해자들을 '존재할 가치가 없는 타자'로 규정하며, 그들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영혼에 영구적인 상흔을 남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포용(Embrace)을 요구하는 것은 억압의 고통을 외면하고 가해자에게만 유리한 가짜 화해를 강요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포용의 윤리는 반드시 이 근본적인 억압의 현실에 대한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응답, 즉 정의(Justice)를 소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정의는 억압의 구조를 해체하는 데 있어 두 가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 정의는 억압의 불평등한 제도적 기반을 허물어뜨리고 사회적 환경을 변화시킨다. 둘째, 정의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빼앗긴 권리와 손상된 존엄성을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재확립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니깐 정의는 사회적인 변화와 개인의 변화를 수반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볼프가 정의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포용은 곧 부당함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될 수 있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이 부분을 잘 못 읽으면 니그렌의 ‘고전주의적 아가페주의‘의 하나로 포용을 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과거의 잘못을 계산하고 보상하는 데 집중하는 '수단적 이성'의 영역에 머물기 때문에, 깨어진 관계의 심연과 고통스러운 기억을 완전히 치유할 수는 없다. 정의는 화해와 평화라는 최종적인 목표를 위한 필수적인 준비 단계이지, 그 자체가 최종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정의의 달성이 바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평화와 화해라는 목표를 잊은 정의는 수 많은 폭력과 복수를 불러올 것이다. 오늘은 이러한 볼프의 주장에 대해서 조금 더 들어가보는 시간을 가진다. 억압과 정의라는 주제로 다 같이 들어가보자.




1. 정의의 충돌, 문화적 특수성, 그리고 이중적 보기


볼프는 인도의 과부 순장(Sati) 금지 사례를 통해 정의의 개념이 얼마나 문화적으로 갇혀 있으며(Captive) 충돌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정의의 특수성에 집중하면 정의는 보편성을 잃어 버리고 부당하고 불합리한 제도나 문화를 합리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인도의 최고 권력층이자 카스트제도의 상위에 있는 브라만들은 과부 순장제도인 사티를 전통적인 정의이자 심지어 종교적 축복으로 보았다. 자신들의 문화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자신들도 정의를 어기면서 부당하게 제국주의를 실현한 영국인들은 이를 야만적 불의로 규정하고 제국의 힘으로 금지시켰다. 정의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정의는 그 뒤에 큰 칼을 준비하고 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힘, 공권력, 폭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보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공동체주의라는 상이한 정의의 틀이 충돌할 때, 결국 지배적인 권력을 가진 집단의 정의가 승리하거나 강요되는 비극적 현실을 드러낸다. 따라서 볼프는 단일한 완벽한 정의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논쟁 이전에 타자를 포용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어렵게도 볼프는 항상 이런 방식의 장기적인 목표를 잡고 기존의 관념과 관점들을 해체해 나간다. 사티의 사례만이 아니라도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은 정의에 대한 인간의 판단이 유한성(Finitude)과 문화적 특수성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볼프는 신이 아닌 인간이 하나님처럼 무한하고 완전한 정의를 내릴 수 없으며, 모든 판단은 그가 속한 문화적 전통과 관심사에 의해 형성되고 왜곡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볼프는 현대 사회에서 단일하고 일관된 정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시도는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대신, 기독교 신학자는 성경적 계시에서 도출된 기본적인 헌신들(사랑, 공의, 진실)을 무장하고, 다원적이고 변화하는 문화 속으로 들어가 그 헌신들을 실천하고 문화적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제시한다. 배제와 포용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은 결국 기본적인 근원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이 배제가 아니라 포용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볼프가 제시하는 억압의 상황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데 필수적인 윤리적 실천은 "이중적 보기(Double Vision)"이다. 이는 단순히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관점(여기)과 억압받는 타자의 관점(거기)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며 동시에 바라보려는 지속적인 자기 투쟁이다.


이 실천은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권력자들은 자신의 불의한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자신의 관점이 곧 절대 진리라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누구나 쉽게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면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기 쉬워진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가해자보다 더 가해자다운 정체성을 얻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모두가 가해자가 되는 방식을 넘어서려면 이중적 보기가 필요하다. 이중적 보기는 힘을 가진 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타자의 눈으로 보아 회개하고 입장을 재조정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결을 조금 다르게 월터스토프의 정의 개념은 정의가 실현되고 나서 그 다음에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을 낸다.


비교_월터스토프 정의 개념

권리의 내재성: 그는 인간이 사회적 지위, 공로, 혹은 상호 합의에 의해 권리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마땅히 가져야 할 권리를 본질적으로, 그리고 내재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고 강조합니다. 이 권리는 인간의 '종류가 가지는 가치(Worth of Kind)'에서 비롯됩니다.

고전적 정의 개념과의 단절: 월터스토프는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심지어 롤스(Rawls)의 정의론 중 일부가 채택하는 '사회 전체의 조화로운 질서'나 '각 부분에 그에 합당한 것을 배분하는 올바른 비례'로서의 정의 개념을 거부합니다. 그는 정의를 권리 침해에 대한 저항과 회복의 문제로 파악합니다. 즉, 정의는 사회적 질서가 아니라 개인에 대한 존중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그는 세속적 관점(예: 사회 계약론)으로는 모든 인간이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할 권리를 가지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월터스토프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사랑하고 그들을 무한히 소중한 존재로 여긴다는 믿음이야말로 인간의 타고난 권리의 궁극적인 원천이라고 역설합니다.

가치 부여: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에게 '고귀한 가치(Worth)'를 부여하며, 이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곧 정의의 출발점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정의는 창조주가 부여한 가치를 반영하고 실현하는 행위인 것이다.

구약의 정의: 그는 구약성경이 말하는 정의, 즉 체데크(Tzedek)가 단순히 법 집행의 공정성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자, 가난한 자, 과부와 고아와 같이 권리를 침해당한 약자들의 권리를 회복시키고 그들의 고난을 없애는 행동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사회의 불의한 구조에 대한 능동적인 저항을 포함합니다.

정의와 샬롬의 관계: 월터스토프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의는 샬롬(Shalom), 즉 단순한 평화가 아닌, 온전한 관계와 전인적인 번영이 회복된 상태입니다. 정의는 샬롬을 파괴하는 불의를 제거하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샬롬에 이르게 하는 필수적인 경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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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진노와 복수심으로부터의 해방


정의가 실현되면 인간은 자연스럽게 복수를 생각한다. 내가 당한만큼은 아니더라도 누군가 이 불편하고 억울한 심정을 해소해줘야 한다. 그래서 이 부분에서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이 나오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정의의 실현은 복수이다. 복수는 나의 것이다. 그러나 볼프는 하나님의 진노(God's Wrath)에 대해 전통적인 복수 개념을 넘어선 신학적 재해석을 시도한다. 다시 어려운 길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감정적이고 파괴적인 보복이 아니라, 억압과 불의, 그리고 악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롭고 의지적인 'No'이다. 만일 하나님이 이 세상의 불의와 악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수수방관한다면,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그 악의 공범이 되고 만다. 따라서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그분의 창조 세계를 파괴하려는 악을 향해 표출하는 적극적인 의지인 것이다.


인간의 진노에 대한 발현으로 정의가 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노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오히려 자신의 고유성과 감정 그리고 존재감을 지킬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심리적, 영적 구원을 제공한다. 억압받는 이들이 정의의 실현을 자신들의 손에 맡기려 할 때, 그들은 복수심의 악순환과 증오의 짐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볼프는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정당한 요구와 복수 심판을 하나님께 위탁하라고 부탁한다. 하나님이 공의롭게 심판할 것임을 신뢰할 때, 그들은 비로소 증오의 속박에서 벗어나 용서와 포용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내면의 자유를 얻게 된다.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은 사실 자력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또 다른 가해자가 되려는 사람들을 막는 법이었다.


다행히도, 볼프는 하나님의 정의가 종종 인간의 공정성 개념과 충돌함을 지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정의는 추상적인 원리나 무지의 베일 뒤에 가려진 중립이 아니라,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하나님은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가장 취약한 자들의 편에 서는 편파성(Partiality)을 지니신다. 이는 인간 사회의 정의가 동등함과 추상성을 강조하다가 정작 가장 고통받는 이들의 구체적인 필요를 외면하는 불의를 저지를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참된 신적 정의는 추상적 원리 이전에 관계의 회복과 약자의 편에 서는 행동을 통해 실현된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래서 불공평하다. 오히려 가장 작은 자에게, 연약한 자에게 한없이 관대한 정의이다. 반대로 높은 곳에 있는 자들, 살만한 사람들, 누군가보다 더 가진 이들에게는 정의의 잣대가 더 엄격하다. 존롤스의 차등의 원칙이 생각나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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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의의 한계, 용서의 창조성, 그리고 포용적 공동체


이런 생각은 평소에 잘 하기 힘든 것 같다. 정의가 가진 문제점들 말이다. 그런데 볼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하나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볼프는 이렇게 주장한다. 정의는 억압의 과거적 문제를 다루는 데 본질적인 한계를 가진다. 특히 죽은 자들의 억울함이나 과거의 극심한 폭력으로 인한 깨진 관계의 상처는 아무리 완벽한 보상을 한다 해도 해결될 수 없다. 볼프는 이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용서(Forgiveness)가 필요다고 주장한다. 아니 용서 밖에는 나갈 길이 없다고 선언한다. 용서는 과거의 잘못을 덮는 것이 아니라, 깨어진 미래의 관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행위임을 역설한다. 용서 없이는 정의가 끝없는 보복의 고리에 갇혀 미래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영원히 단절된다. 미래에도 그 관계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미래에 그 사람과의 관계가 열리는 길은 용서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니 포용의 은총(Grace of Embrace)은 정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를 완성하는 도구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볼프는 이 책의 마지막으로 넘어가면서 자신이 주장하는 '포용'의 효용을 주장한다. 포용은 정의가 다루지 못하는 관계의 차원, 고통의 기억, 그리고 미래의 연합을 치유한다. 볼프는 진정한 포용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억압받던 사람이 억압자에게 자리(space)를 내어주고 환대할 수 있는 용서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이는 곧 자신의 정체성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풍성해지는 새로운 차원으로의 성숙을 의미한다. 그래서 가해자는 영원히 가해자가 되고, 그 가해자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은 회개하고 포용하지 않는 한 정의의 실현이라는 제안에 현혹되어 그 역시도 가해자가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신의 정체성도 바뀌어 버리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에 빠지지 않는 길은 포용을 선택하는 길이다. 억압자에게 권력을 다루는 방식으로 계속 '지옥'을 경험하는 것을 넘겨주고 '천국'으로 가기 위한 발걸음을 떼는 일이다.


더 나아가 볼프는 오순절 사건을 포용적 공동체의 궁극적인 신학적 비전으로 제시한다. 이것은 인류가 시작한 모든 재앙의 시작을 되돌리는 일이다. 제국 건설을 위해 단일 언어와 폭력적인 일치를 추구했던 바벨탑 사건의 완벽한 역전이다. 오순절의 성령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게 함으로써, 문화적 이질성(차이)이 보존되는 동시에 완전한 이해와 연합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창조한다. 이 공동체는 지배가 아닌 상호 이해와 사랑에 기반하여 서로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풍성하게 하는 영원한 화해의 비전을 제시한다. 초대교회의 전통은 일치와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포용의 문화였다. 그것은 인간적인 정서의 일치가 아니라 성령으로 하나된, 서로에게 거리를 두되 서로에게 더 깊이 관여하는 포용의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었다.


용서에 관한 다른 신학자별 관점

존 하워드 요더 (John Howard Yoder): 비폭력적 윤리와 공동체적 용서를 보자. 존 하워드 요더는 재세례파(Anabaptist) 신학자로서, 용서를 기독교인의 비폭력적 삶과 공동체 윤리의 핵심으로 봅니다. 그는 용서를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해방으로 국한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실천해야 할 정치적 행위로 해석합니다. 요더에게 용서는 복수심을 거부하고 정의의 실행을 하나님께 맡기며, 심지어 극심한 폭력 상황에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화해를 시도하는 급진적인 윤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제시하는 새로운 질서, 즉 폭력의 순환을 끊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따르는 것이다.

폴 리쾨르 (Paul Ricœur): 기억의 정화와 선물로서의 용서. 철학자이지만 신학적 주제에 깊이 천착한 폴 리쾨르는 용서를 기억(Memory)의 문제와 연결하여 논합니다. 그는 과거의 상처와 불의의 기억이 현재를 지배하는 것을 경계하며, 진정한 용서는 '상처 입은 기억'을 정화(Purification)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리쾨르에게 용서는 인간의 논리나 도덕적 계산으로 완전히 이해될 수 없는 '선물(Gift)'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Grace)을 반영하며, 용서를 통해 피해자와 가해자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미래를 재구성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유르겐 몰트만 (Jürgen Moltmann): 희망과 미래지향적 용서. 유르겐 몰트만은 그의 희망의 신학(Theology of Hope) 관점에서 용서를 미래지향적이고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그는 용서를 과거의 죄를 덮어버리는 행위가 아니라, 죄인에게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행위로 봅니다. 몰트만에게 용서는 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시작(New Beginning)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약속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한 미래의 완성된 정의와 평화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용서는 현재의 불완전함 속에서도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죄인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인 것이다.

미로슬라브 볼프 (Miroslav Volf): 화해와 포용으로서의 용서. 미로슬라브 볼프는 용서를 궁극적으로 화해(Reconciliation)와 포용(Embracing)의 과정으로 봅니다. 그는 특히 대규모 폭력과 집단적 불의의 맥락에서 용서를 논하며, 용서란 가해자와 피해자가 하나님 안에서 관계를 재정립하고 서로를 다시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그의 관점에서, 용서는 단순히 채무를 탕감하는 것을 넘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Making Space)' 행위이며, 이는 곧 그리스도가 죄인들에게 보여주신 포용적 사랑을 반영합니다. 볼프는 정의와 용서가 상호 보완적이며, 진정한 화해는 불의에 대한 정의로운 대응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루이스 스미데스 (Lewis B. Smedes): 감정적 해방으로서의 용서. 루이스 스미데스는 용서를 주로 개인적이고 심리적인 해방의 과정으로 정의했습니다. 그는 용서를 '나쁜 채무를 탕감해주는 것'으로 표현하며, 특히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분노, 원한, 복수심이라는 감정의 족쇄에서 스스로를 풀어주는 행위임을 강조했습니다. 스미데스의 이론은 용서를 네 단계로 설명하는데, 이는 상처를 입고, 분노를 극복하며, 채무를 탕감하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신학적으로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우리도 감정적 짐을 내려놓고 타인을 용서해야 한다는 기독교적 명령에 근거하고 있다.

마사 누스바움 (Martha Nussbaum): 분노의 극복과 정의로운 전환으로서의 용서. 철학자이지만 신학적 논의에 깊이 영향을 미친 마사 누스바움은 용서를 논하기에 앞서, 분노(Anger)를 윤리적으로 비판합니다. 그녀는 분노를 '지위 비교(Status Comparison)'와 '복수적 염려(Payback Concern)'에서 비롯된 비합리적 감정으로 보고, 이 분노를 공감(Compassion)과 미래지향적인 정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녀의 관점에서 용서는 곧 복수심을 포기하고, 가해자의 행동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합리적인 행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무고한 고난을 통해 보여진, 복수를 초월한 사랑으로 나아가라는 신학적 요구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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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포용 5장은 억압과 불의의 현실에서 출발하여, 정의가 포용을 위한 필수적인 전제임을 명확히 했다. 정의는 억압 구조를 해체하고 피해자의 존엄성을 회복하지만, 그 한계로 인해 궁극적인 화해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위탁과 이중적 보기를 통한 윤리적 실천이 필수적이며, 이는 억압받는 이들을 복수심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한다. 정의로운 사회의 확립은 궁극적으로 용서의 창조적 행위를 통해 포용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볼프가 제시하는 것은 정의를 완전히 품에 안은 포용의 길이다. 인간의 불완전한 정의를 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델로 한 자기 비움과 환대를 통해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지배 없이 사랑으로 하나 되는 오순절적 화해 공동체를 향한 신학적 비전을 선포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불의를 용서하고 미래의 관계를 창조함으로써 영원한 평화를 지향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이제 다시 책을 꺼내서 배제와 포용을 읽어보자. 우리에게 주어진 무한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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