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유란과 중국철학의 법고창신_처음읽는중국현대철학
중국현대철학을 일요일 아침마다 강의하고 토론하면서 수 없이 생각하게 된다. 만약 공산당이 아니라 국민당이 1949년에 승기를 잡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문화대혁명으로 죽은 사람들이 2500만명이고, 천안문사태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를 셀 수가 없다. 국가의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짓을 안해도 되는 시대였다면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다채로웠을까? 그들의 자손들은 또 얼마나 새로운 삶을 살아갔을까? 역사에는 만약이 없지만 역사 속에서 알려지지 않은 중국 현대 철학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쉬운 마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시간까지는 '마음'을 중심으로 '유심론'의 전통을 만든 슝스리, 쉬푸관, 탕쥔이의 철학을 알아보았다.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모든 보편인 '양지'가 들어 있고, 이를 실현하도록 돕는 제도와 국가, 사회론을 도출했던 것에 비해서 오늘 우리 알아볼 펑유란은 오히려 근본원리가 마음에 있는게 아니라 '리'인 정신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500년동안 주구장창 살펴본 주희의 이기론을 중심으로 보다가 '기'에서 2가지로 나누어지는 '그릇'에 대한 논의도 하게 될 것이다. 중국철학의 시작은 언제나 1840년이지만 근 100년동안 근대를 적응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방향성들이 제시되었다. 오늘은 중국현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펑유란의 철학에 대해서 아라보자.
펑유란의 초기 학문적 여정은 서양 철학의 영향 속에서 중국 철학의 보편성을 확립하려는 목표를 가졌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 존 듀이의 실용주의와 신실재론을 접하며 현대적 분석 방법론을 습득하였다. 실용주의는 유기체를 근본에 두어 이성보다 실재를 중시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반면, 신실재론은 논리적 엄밀함과 객관적 인식을 중시하여 그의 철학적 토대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철학적 경향을 종합하려는 시도는 그의 평생의 철학적 숙제가 되었다. 그는 서양의 분석적 도구를 이용하여 중국의 전통 철학을 재조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러한 배경은 그가 중국 철학을 세계 철학의 보편적 담론으로 끌어올리려는 야심을 갖게 만들었다. 그는 초기부터 철학사를 단순한 역사 서술이 아닌 철학적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보았다.
평유란은 박사학위 논문을 통해 이미 명가(名家)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능력을 선보였다. 그는 명가를 유명론(Nominalism)을 대표하는 혜시(惠施)와 실재론(Realism)을 대표하는 공손룡(公孫龍)으로 체계적으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중국 고대 철학에도 서양과 같은 보편적인 논리적 문제가 존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로써 중국 철학의 논리적 엄밀성을 세계 학계에 증명하는 기초 작업을 수행하였다. 명가에 대한 분석은 훗날 그의 신이학(新理學)에서 보편과 특수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중요한 준거틀이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이미 중국 철학을 현대적 논리 구조 속에서 이해하려는 방법론을 구상하였다. 그의 학문적 탐구는 중국 사상을 지혜의 영역에서 체계적인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이러한 초기 연구는 이후 '중국철학사' 저술의 핵심적인 토대가 되었다.
펑유란은 학문적 연구 외에도 당시 중국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1920~30년대의 중국은 서구 문명과의 충돌 속에서 전통의 가치를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통해 중국의 전통 철학이 현대 세계에도 유효한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음을 보여주려 하였다. 이 목표는 그의 철학을 단순한 학술적 작업이 아닌, 민족적 자긍심과 연결하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혁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하였다. 이처럼 펑유란의 초년은 철학적 기반을 다지고 자신의 학문적 소명을 확립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서양의 분석적 엄밀함과 동양의 형이상학적 깊이를 결합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철학은 동서양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게 되었다.
초기 철학적 사고는 주로 보편과 특수의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서양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논한 철학자는 플라톤이었으며, 펑유란은 중국 철학에서도 고대에 공손룡이, 근세에 주희가 이 문제를 다루었음에 주목하였다. 이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라는 그의 확신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그는 서양의 문제의식을 단순히 중국 철학에 투영한 것이 아니라, 동서양 철학이 공유하는 보편적 난제를 발굴하려 했다. 이 문제의식은 훗날 '신이학'에서 리(理)를 보편으로 규정하고 기(氣)를 특수로 연결하는 핵심 동력이 된다. 그의 초기 연구는 주희의 성리학이 보편과 특수의 관계를 가장 깊이 있게 논의했음을 입증하려 했다. 이러한 접근은 중국 철학의 독자적인 '철학'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려 한 시도이다.
펑유란의 초년은 그의 역사 철학적 방법론이 형성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는 이전의 철학사들이 보여준 단편적이거나 비체계적인 서술 방식을 지양하였다. 그는 '중국철학사'를 통해 중국 철학 전체를 하나의 일관된 논리적 흐름으로 엮어내려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그의 주체적인 철학적 입장이 확고히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중국 철학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철학적 체계를 검증하고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의 초기 작업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설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결국 그의 초년은 학자로서의 명성을 얻는 동시에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위한 청사진을 완성한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확립된 체계는 이후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핵심 구조가 되었다.
펑유란이 존 듀이의 실용주의(Pragmatism)에 받은 영향
실천적 문제 해결 및 수양론적 태도의 도입 : 듀이는 철학이 추상적인 논쟁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경험과 삶의 문제 해결에 기여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펑유란은 이러한 실용주의적 문제의식에 공감하여, 서양 철학에 결여된 인생 교훈과 수양론적 전통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그는 철학을 삶의 네 단계로 나눈 경계론(境界論)을 자신의 체계에 포함시켜 철학의 실천적 가치를 극대화하게 된다.
이성(理性) 중심주의에 대한 균형 감각의 확립 : 듀이는 이성적 사유를 유기체(Organism)가 환경에 반응하는 양상 중 하나로 보았으며, 이성보다 유기체를 근본에 놓는 입장이었다. 이는 펑유란이 자신의 신실재론에 지나치게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듀이의 이러한 태도는 펑유란이 객관적 보편(리) 외에 유기체적 경험과 물질성을 중시하는 관점을 견지하도록 도왔으며, 이는 그의 철학적 종합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리(理)의 추상화 과정에 대한 인식의 변화 : 듀이의 실용주의는 경험과 사물을 근본에 두는 경향이 있어, 펑유란의 만년 철학적 입장 변화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펑유란이 나중에 "리가 사물 속에 있다"는 입장으로 전환하며, 리는 사람이 구체적 사물로부터 추상화(Abstraction)하여 사유 속에 두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는 보편을 추상적 관념으로 보는 관점에 일정 부분 근접하는 것으로, 이성(리)을 사물에 앞세우기보다는 사물(경험/유기체)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는 실용주의적/유물론적 시각의 영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추측된다.
명가철학의 특징
명(名)과 실(實)의 관계 해명에 집중한 논리학적 성격 : 명가 철학은 사물의 이름(名)**과 그 이름이 지칭하는 실재(實)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들은 정의(定義)와 언어의 사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 논리적 모순이나 역설을 제시하며, 언어의 한계와 실재의 본질을 밝히려 한 고대 중국의 논리학파이다.
유명론(惠施)과 실재론(公孫龍)의 두 축으로 구분되는 대립 구조 : 펑유란은 명가 내부를 두 개의 상반된 철학적 입장으로 체계화하여 분석하였다. 하나는 혜시(惠施)로 대표되는 유명론(Nominalism)의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공손룡(公孫龍)으로 대표되는 실재론(Realism)의 경향이다. 이러한 대립 구조는 명가가 서양 철학의 주요 문제인 보편자 문제를 이미 논의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보편과 특수의 문제를 다룬 형이상학적 탐구의 시초 : 명가는 언어 분석을 통해 개별적인 사물(특수)과 그것을 묶는 개념(보편) 간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이는 펑유란의 신이학의 핵심 주제인 리(理)와 사(事)의 관계 논의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명가 철학은 중국에서 형이상학적이고 논리적인 탐구가 시작되는 시초를 보여주며, 중국 철학의 논리적 깊이를 증명하는 근거가 된 것이다.
유명론의 핵심 요약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은 철학에서 보편자(Universals)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오직 개별자(Particulars)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실재의 범위: 오직 경험 가능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물만이 실제로 존재한다.
보편자의 본질: '인간성'이나 '붉음'과 같은 보편자는 실재가 없으며, 인간이 개별자들을 묶어 부르기 위해 만든 이름(名)이나 언어적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대립 개념: 보편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실재론(Realism)과는 정반대의 견해이다.
중국적 맥락: 고대 중국의 명가(名家) 철학자 중 혜시(惠施)의 사상이 이러한 유명론적 경향을 대표하는 것으로 분류된 것이다.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서양 중세 철학에서 유명론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그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이라는 원칙으로 유명하며, 이는 "불필요한 실체는 가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복잡한 보편적 실체(리, 이데아 등)의 존재를 부정하는 데 사용되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근대 철학의 유명론자로 분류되며, 일반 개념은 사물을 표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언어적 기호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는 중국 철학을 세계 철학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역작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중국 철학이 단순한 지혜나 윤리적 교훈의 집합이 아니라, 서양 철학에 버금가는 논리적 체계와 형이상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는 특히 스승이었던 후스(胡適)의 철학사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자신의 저술을 시작하였다. 후스가 가진 서양 중심적 관점을 지양하고, 중국 사상의 독자적인 가치를 부각시키려 노력하였다. 이 책은 후대 학자들에게 중국 철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데 필수적인 교과서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그의 역사 서술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철학적 선언의 성격을 지녔다.
펑유란의 철학사 저술 방법론은 석고(釋古)의
정신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중국 철학의 기원을 의고(疑古) 관점처럼 낮추거나 축소시키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철학적 의미를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철학의 시점을 공자로 설정함으로써 인문주의적 전통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로써 그의 철학사는 유교적 전통을 중심으로 중국 철학사를 재구성하는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고대 문헌을 현대적인 철학 용어로 번역하고 체계화함으로써 서양 학자들도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중국 철학에 대한 국제적인 이해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학문적 태도는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현대적 해석을 가미하는 균형 잡힌 모습이었다.
펑유란은 명가에 대한 분석 외에도 정주이학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제시하였다. 그는 정호(程顥)의 철학을 심학(心學) 계열로, 동생인 정이(程頤)의 철학을 이학(理學) 계열로 구분하여 두 형제의 철학적 차이를 명확히 하였다. 이러한 구분은 당시의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이전까지 모호했던 송대 성리학의 복잡성을 해소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는 정이의 이학을 주희에게로 연결시키며 자신의 신이학이 계승할 정통의 뿌리를 명확히 하였다. 이처럼 '중국철학사'는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그의 후속 철학 체계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한 작업이다. 그의 해석은 후대의 중국 철학사 연구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기준점이 되었다.
'중국철학사'는 전통 사상 내의 보편적인 문제를 발굴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서양 철학의 주요 문제의식, 즉 보편과 특수의 문제를 중국 철학사 전반에 걸쳐 추적하였다. 그는 특히 정주이학이 이 문제에 대해 가장 깊이 있는 논의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그는 중국 철학이 외래 사상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철학'이라 불릴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였다. 그의 역사 서술은 중국 철학의 흐름을 논리적 발전의 과정으로 파악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시각은 중국 철학이 역사적 유물론에 의해 완전히 부정될 수 없다는 논리적 방패막이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의 철학사는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전통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중국철학사'는 펑유란이 자신의 철학적 전반기 여정을 일단락 짓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중국철학사'를 완성함으로써 그는 역사 서술가로서의 역할을 넘어, 이제 자신의 독자적인 체계를 건설할 준비를 마쳤다. 이 책의 내용은 훗날 그가 리(理)와 기(氣) 개념을 재해석하는 데 필요한 모든 학문적 자원을 제공하였다. 그의 역사적 업적은 단순히 과거를 정리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철학적 전개를 위한 청사진이 되었다. 이 책의 성공은 그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중국철학사'는 펑유란의 개인사를 넘어 중국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펑유란이 '중국철학사' 의 주요한 특징
석고(釋古)를 바탕으로 한 학문적 시발점 재정립 : 펑유란은 당시 유행하던 의고(疑古) 관점을 지양하고, 석고(釋古)의 정신에 입각하여 고대 문헌을 해석하였다. 그는 중국 철학의 시발점을 노자가 아닌 공자로 설정함으로써, 인문주의적이고 실천적인 유가(儒家) 전통을 중심에 두어 철학사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는 철학의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닌 현대적 의미를 가진 철학적 문제의 연장선으로 파악하려 한 태도이다.
서양 분석론에 입각한 논리적 체계화 : 그는 서양 유학을 통해 습득한 분석적이고 체계적인 방법론을 중국 철학사에 적용하였다. 특히 명가(名家)를 유명론(혜시)과 실재론(공손룡)으로 명확하게 분류하고, 성리학의 두 거두인 정호와 정이의 철학적 입장을 심학(心學)과 이학(理學)으로 분리하는 등 복잡한 전통 사상을 논리적 구조 속에서 체계화한 것이다. 이는 중국 철학을 세계 철학의 보편적 담론으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이다.
신이학(新理學) 구축을 위한 이론적 토대 : 그의 철학사 저술은 과거에 대한 단순한 정리를 넘어, 후일 자신이 주창할 '신이학' 체계를 위한 학문적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그는 중국 철학사 전반에 걸쳐 보편과 특수의 관계(리(理)와 기(氣)의 문제)라는 핵심적인 형이상학적 난제를 발굴하고, 정주이학이 이 문제에 대해 가장 깊이 있는 논의를 했음을 입증하였다. 이로써 '중국철학사'는 펑유란의 독자적인 철학을 위한 역사적 정당성과 이론적 자원을 확보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신이학(新理學)은 중일전쟁이라는 고난의 시기, 펑유란이 피난을 다니면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고 완성한 독자적인 철학 체계이다. 이 시기(1937~1946)에 저술된 여섯 권의 책은 '정원육서(貞元六書)'라 불리며, 이는 고난(貞) 속에서도 희망(元)을 잃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중 '신이학' 은 과거의 성리학을 '옛 이학'으로 두고, 이를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제목에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방법론인 '이어서 설명하기(接著講, 수강)'를 천명하였다. 수강은 옛 철학을 단순히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빗대어서 설명하기 위한 조강(照講)'을 넘어,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키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신이학의 핵심은 리(理)와 기(氣)
개념의 현대적 재해석에 있다.
펑유란은 리를 각 사물이 '그렇게 있을 수 있는 까닭'이자 보편(Universal)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리가 구체적 세계에 반드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놓일 물질적 기초가 있어야만 한다고 보았다. 이 물질적 기초를 그는 기(氣)라고 명명하였는데, 기는 구체적인 사물(器) 그 자체는 아니며 아직 한정되지 않은 원초적 질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리와 기를 구별한 후, 구체적이고 한정적인 개별 사물을 지칭하는 용어는 기(器)라고 명확히 구별하였다. 이러한 리-기-기의 삼분법은 과거 성리학을 근대 철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한 펑유란만의 독창적인 공헌이다.
펑유란은 송대 이학자들이 "기에 맑은 것과 탁한 것이 있다"고 말했던 부분을 비판적으로 수정하였다. 그는 기에 성질이 부여되는 순간, 그 기는 이미 한정된 구체적 사물(器)이 되어버린다고 지적하였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순수한 기(氣)는 아무런 규정이 없는, 개별적 사물이라고 할 수 없는 원초적 질료의 개념이다. 이러한 기(氣) 개념은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 철학의 '질료(hyle)'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이처럼 전통 개념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논리 구조에 맞게 수정하는 방식은 펑유란의 수강(接著講) 방법론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그는 이로써 중국 철학이 서양 철학의 형이상학적 난제와 대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원의 개념 (The Concept of a Circle)
리 (理, 원의 원리): 원(圓)이 가질 수 있는 추상적인 기하학적 법칙이다. 즉,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모든 점들의 집합이라는 영원불변한 보편적 원리 그 자체이다. 이 원리는 종이나 연필이 없더라도 항상 참인 것이다.
기 (氣, 원료의 질료): 원이 될 가능성을 가진, 아직 규정되지 않은 원초적인 질료나 공간이다. 이는 칠판에 쓰일 분필 가루나 컴퓨터 화면을 구성하는 픽셀 등 원을 구성할 수 있는 모든 물질적 재료를 의미하는 것이다.
기 (器, 구체적인 원): 누군가가 칠판에 그린, 특정 크기와 색깔을 가진 구체적인 원이다. 이 원은 불완전하거나 시간이 지나 지워질 수 있지만, '원의 리'가 '기의 질료'를 통해 현실에 구현된 개별적인 사물인 것이다.
비행의 원리 (The Principle of Flight)
리 (理, 비행의 원리):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게 하는 공기역학, 물리법칙, 그리고 구조 설계의 보편적인 법칙이다. 이 원리는 비행기가 실제로 발명되기 전에도 영원히 존재했던 것이다.
기 (氣, 질료의 가능성): 비행기를 만들 수 있는 금속, 합성 물질, 연료와 같은 아직 비행기의 형태로 한정되지 않은 원초적인 물질적 기초이다. 이는 비행의 리가 발현되기 위한 물리적 조건이 되는 것이다.
기 (器, 특정 비행기): 특정 항공사의 로고가 새겨진, 고유한 등록번호를 가진 구체적인 보잉 747이다. 이 특정 비행기는 '비행의 리'를 구현하고 있지만, 수명이 있고 파괴될 수 있는 한정적이고 개별적인 사물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 (Human Nature)
리 (理, 인(仁)의 원리): 인간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순수하고 절대적인 도덕적 본성이나 인간성(人性)의 이상적인 법칙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이자 선(善)의 근원이다.
기 (氣, 생명 질료): 정신적, 육체적 활력을 포함하며, 아직 특정 성격이나 감정으로 규정되지 않은 인간을 구성하는 원초적인 생명력이다. 이는 리가 인간의 몸과 마음을 통해 구현될 수 있는 물질적 바탕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 (器, 구체적인 인간): 지능이나 성격, 습관 등 개별적인 특성으로 한정된 '나' 또는 '저 사람'이다. 이 개별자는 '인간의 리'를 부여받았으나, 기(氣)의 맑고 탁함에 따라 현실에서 그 리를 온전히 구현하는 데 한계를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존재인 것이다.
신이학은 리의 존재론적 지위를 형이상(形而上)의 영역에 두었다. '주역'의 "형체를 넘어선 것을 도(道)라 하고, 형체를 갖춘 것을 기(器)라 한다"는 구절을 인용하였다. 펑유란은 여기서 도(道)를 리와 같은 것으로서 보편이고, 기(器)는 구체적 사물로서 특수라고 간주하였다. 리는 감각적 대상이 될 수 없는 추상적 존재이지만, 현실에 무수히 많고 참으로 있는 것(實載)이라고 보았다. 그는 정이(程頤)의 "고요하고 아무런 형체가 없되 모든 형상이 빽빽하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리의 세계가 모든 보편과 가능성을 담고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처럼 전통 문구를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의 보편적 실재론을 뒷받침하는 데 활용하였다.
신이학은 보편과 특수의 관계, 즉 리와 사(事)의 위치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켰다. 펑유란은 초기에는 정주이학을 따라 "리가 사물에 앞서 있다(理先於事)"는 보편적 실재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비행기의 리가 실제 비행기보다 먼저 영원불변하게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인간이 단지 그 리를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설명하였다. 하지만 만년에 그는 입장을 바꾸어 "리가 사물 속에 있다(理在事中)"를 취하며, 리는 사람이 구체적 사물로부터 추상화하는 과정에 의해 사유 속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진웨린(金岳霖)의 영향을 받아 리는 '존재하지 않지만 있는 것(不存在而有)', 즉 시공간 내에 존재하지 않지만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경계론(境界論)은 펑유란의 신이학에 포함된 독특한 수양론적 논의로서, 근현대 서양 철학의 결여된 측면을 보완하려는 목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는 서양 철학이 인식 가능성이나 과학 성립 조건 같은 문제에만 치중하여 대중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고 진단하였다. 사람들은 철학으로부터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실질적인 교훈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서양 철학은 이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펑유란은 이러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중국의 전통적 수양론을 현대적인 철학 체계 안에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의 경계론은 따라서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이성적 사유를 결합한 독특한 시도라 할 수 있다.
펑유란은 인간의 인격 도야 단계를 네 가지 경지(境界)로 나누어 제시하였다. 첫 번째는 자연(自然)의 경지로, 자의식이 없고 순박한 생활을 영위하는 원시 사회의 상태를 가리킨다. 두 번째는 공리(功利)의 경지로, 인간이 자의식을 가지고 사회를 구성하지만, 오직 자기 개인의 이익(私)만을 위해 일하는 단계이다. 세 번째는 도덕(道德)의 경지로, 개인의 이익을 넘어 공적인 선(公)을 위해 의식적으로 도덕을 행하는 단계를 의미한다. 이 세 경지는 인간이 세상과 관계 맺는 기본적인 방식과 동기를 보여준다.
네 번째 경지는 최고 단계인 천지(天地)의 경지이다. 천지의 경지에 있는 인간은 단순히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것을 넘어, 자연에 대한 심층적 인식을 추구한다. 이 단계에서는 경험 가능한 특수(事)로부터 그 속에 깃든 보편(理)을 순수한 사유를 통해 인식하게 된다. 보편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안심입명(安心立命)할 곳을 찾게 된다고 펑유란은 말하였다. 즉, 이 경지는 이성적 사유를 통해 형이상학적 진리를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근본적인 안정을 얻는 경지이다. 이 경지는 서양의 이성적 사유와 중국의 수양론적 통찰이 만나는 지점을 보여준다.
펑유란은 천지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대전(大全, 우주 전체)의 관점에서 세상을 조망한다고 설명하였다. 대전은 우주이고 모든 사물에 대한 총칭으로서 '군집해 있음'으로 규정된다. '군집해 있음'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천지를 분절된 개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비분절의 연속체로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도덕 행위는 단지 사회적 행위가 아니라, 나와 천지만물의 구분이 사라진 우주적 행위가 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이는 행위가 '나와 나의 일부' 사이의 관계가 되어 근본적으로 자의식적 행위가 불가능해지는 초도덕적 경지이다.
도덕의 경지와 천지의 경지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도덕의 경지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도덕을 행하며, 자신의 행위에 대한 대가나 답례를 기대하는 의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경지이다. 반면, 천지의 경지는 행위가 순수한 본성으로부터 비롯하여 상대방에게 예우나 선물을 주고도 대가나 답례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 '절대증여'의 경지이다. 이는 인류학자들이 신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고 느끼는 초월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경지이다. 다만, 펑유란이 '군집해 있음(有)'과 '비분절적 연속체(無)'를 동일시한 점은 존재론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부분이 남는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펑유란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직전, 미국에서 '중국 철학과 미래 세계 철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자신의 철학적 비전을 요약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서양 근대철학의 한계를 지적하며 논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칸트 이후의 서양 철학자들이 물 자체(Thing-in-itself)는 이성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 점에 주목하였다. 이성이 대상을 접할 때마다 규정하고 구획 짓기 때문에 물 자체의 규정 없는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서양 철학의 결론이었다. 이러한 서양 철학의 한계는 이성 중심주의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펑유란은 이러한 서양 철학의 난제에 대해 중국의 도가(道家) 철학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도가 철학이 이성적으로 사유하면서도 물 자체를 파악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 방법이란 다름 아닌 '이성에 의한 이성의 부정'이었다. 이성이 스스로를 부정함으로써 물 자체를 규정하려는 주체로서의 이성적 작용을 소멸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이성의 주체적 작용이 사라지면 나와 대상 사이의 구별, 그리고 세계 내의 모든 구별이 사라진다. 세계는 구별 없고 규정 없는 상태로 화하며, 이를 통해 물 자체와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가 논리적으로 가능해진다고 펑유란은 설명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물 자체와 하나가 되는 과정 자체가 결국 이성의 활동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펑유란의 해결책은 물 자체는 이성에 의해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는 칸트의 결론과 정면으로 상반되는 것이다. 그는 도가 철학의 통찰이 서양의 합리주의가 도달하지 못한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라고 보았다.
펑유란의 이러한 해결책은 그의 초기 철학적 노선인 신실재론과 실용주의를 종합하려는 시도 끝에 도출된 것이다. 그는 이성적 전통을 중시하는 신실재론과, 유기체(물 자체에 가까운 근본)를 이성보다 중시하는 실용주의를 결합하고자 하였다. 특히 스승인 존 듀이의 실용주의가 유기체를 근본에 두고 이성적 사유를 유기체의 반응 양 중 하나로 보았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그는 미래의 세계 철학이 이러한 동서양 철학적 전통의 결합, 즉 이성주의와 신비주의의 종합이 되리라고 전망하였다. 이는 그의 평생에 걸친 동서양 철학의 융합 시도를 집대성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펑유란의 이성 부정 논리에 대해서는 여전히 철학적 의문이 제기된다. 이성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활동 자체가 이성적인 것이라면, 그 부정의 활동 속에서도 이성은 주체로서 계속 존속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이성이 존속하는 한, 물 자체를 규정하려는 활동을 완전히 멈출 수 없으며, 결국 물 자체와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비판이 가능해진다. 이성이 계속 작동한다면, 펑유란이 제시한 진정한 의미의 신비주의가 성립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남는다. 이는 펑유란이 제시한 해결책이 논리적 모순을 내포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펑유란의 철학적 전반기가 신실재론과 실용주의의 종합으로 마무리된 후, 그의 후반기 여정은 중국 공산화 이후의 마르크시즘과의 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그는 마르크시즘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으나, 그의 철학적 기반인 관념론 계열의 신실재론은 유물론을 근본으로 하는 당국으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특히 1950년대 후반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화되면서 유교를 봉건적 사상의 대변자로 비판하는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펑유란은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방어하고 유교 전통을 구원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다.
펑유란은 유교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방법으로 '추상적 계승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유가 경전 내 대부분의 구절은 구체적 의미와 추상적 의미를 가지며, 현대의 우리는 그중 추상적 의미만을 추출하여 계승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논어'의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않은가?"라는 구절의 구체적 의미는 봉건 귀족의 커리큘럼을 배우는 것이지만, 추상적 의미는 배움을 향한 열정을 지시한다고 설명하였다. 이처럼 추상적 의미는 속성상 시대를 초월할 수 있어, 후대에도 아무 문제없이 계승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추상적 계승법은 펑유란의 신실재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신실재론은 어떤 것의 특수와 보편, 곧 구체와 추상을 나누어 보면서 후자(추상/보편)의 실재성을 긍정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고전에서 추상적 의미를 추출함으로써, 봉건적 요소가 제거된 보편적 가치를 살려 전통을 현대적으로 보존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마르크시즘적 유물론자들에게는 관념론적 궤변으로 여겨져 비판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60년대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그는 반동 분자로 분류되어 고난을 겪게 되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펑유란은 노령의 몸으로 '중국철학사 신편'이라는 대작의 저술에 착수하였다. 이 책은 과거 자신이 썼던 철학사와는 달리 마르크시즘의 관점에서 중국철학사를 새로 쓰는 작업이었다. 그는 이 책의 완성에 즈음하여 영면에 들었으며, 이는 그의 일생이 이데올로기의 격변 속에서 전통과 현대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 한 고투의 기록임을 보여준다. 그의 생애는 한 철학자가 자신의 학문적 신념과 시대적 요청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지난한 과정을 함축하고 있다.
펑유란의 철학적 과제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21세기 현대 중국 철학의 주요 논쟁을 형성하였다. 그의 수제자인 리쩌허우는 실용주의의 영향을 이어받아 정감본체론을 주장하였고, 마지막 제자인 천라이는 신실재론의 영향을 이어받아 인학본체론으로 이에 맞섰다. 이처럼 리쩌허우와 천라이는 펑유란이 젊은 시절 종합하려고 했던 실용주의와 신실재론이라는 두 가지 철학적 노선을 각각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펑유란이 해결하려 했던 철학적 과제는 여전히 현대 중국인의 두뇌를 움직이고 있으며, 그의 철학은 중국 전통과 현대, 그리고 세계 철학을 잇는 영속적인 가교(架橋) 역할을 하고 있다.
리쩌허우 vs. 천라이
이 논쟁은 중국 철학이 미래 세계 철학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리쩌허우는 서양 철학이 니체, 하이데거, 데리다를 거치며 이성 중심주의가 이미 힘을 잃고 붕괴하는 추세라고 진단하였다.
그는 서양의 새로운 주류가 사변적인 이성을 넘어 감정(정감) 중심주의로 이동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이러한 서양의 변화는 역사적으로 정감을 중시해온 중국 전통 철학이 세계 철학의 주류로 부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한다.
결국 이 논쟁은 중국 전통 사상의 어떤 측면을 계승하여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리쩌허우의 주장: 정감본체론 (情憾本體論)
리쩌허우는 중국 철학의 핵심을 정감(감정)으로 규정하고, 이를 우주의 근본 실체(본체)로 삼는 정감본체론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중국 철학이 단순한 사변이 아닌 인간의 실제적인 정서와 관계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고 보았다.
감정을 우주 만물의 궁극적 실체로 파악함으로써, 서양의 차가운 이성과는 다른, 따뜻하고 인간적인 대안 철학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펑유란이 추구했던 실용주의의 흐름을 계승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실용주의가 경험과 유기체적 실재를 이성보다 중시했듯이, 정감본체론은 객관적인 리보다는 경험적이고 주관적인 정서를 강조하는 것이다.
천라이의 반론: 인학본체론 (仁學本體論)
천라이는 리쩌허우의 정감본체론에 맞서 인학본체론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박하였다.
그는 성리학(性理學) 연구자로서의 입장을 바탕으로, 변동성이 큰 감정이 안정적이고 영원해야 할 궁극적 실체(본체)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성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성, 性)은 우주의 법칙인 리(理)와 동일하며, 이 본성의 실제 내용이 바로 인(仁)이다.
반면, 감정은 기(氣)의 현상으로 여겨져 실체적인 리보다 하위에 위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라이는 중국 전통 철학의 정통적 핵심은 도덕적 실체인 인(仁)에 있으며, 이를 본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펑유란이 평생 동안 추구했던 리(理)의 객관적 실재성을 강조하는 신실재론의 노선을 이어받은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펑유란의 유산
리쩌허우와 천라이의 첨예한 논쟁은 결국 펑유란이 신실재론과 실용주의를 결합하여 해결하려 했던 보편적 실재와 경험적 실재 사이의 긴장 관계가 21세기에도 해소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펑유란이 동서양 철학의 가교 역할을 시도했듯이, 그의 제자들은 이제 그 가교의 어느 부분을 더 튼튼하게 놓아야 할지를 논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펑유란의 철학적 문제는 현대 중국 철학계에 새로운 활력과 깊이를 불어넣으며 여전히 살아있는 화두되어싿.
펑유란은 동양의 성리학을 서양의 신실재론과 실용주의를 결합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수립했다. 그는 리(理)를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객관적이고 영원한 보편적 실재로 규정하고 이를 신이학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러한 리와 구체적 실재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리와 기(氣) 외에 기(器)라는 구체적 사물을 추가한 리-기-기(理-氣-器)의 삼분법을 제시한 것이 그의 가장 독창적인 공헌이다. 그의 역사 연구 방법론은 고대 문헌의 철학적 가치를 긍정하는 석고(釋古)의 태도를 취하여 후스의 회의적인 의고론과 대립했다. 철학의 목적은 단순히 지식 습득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진리를 실현하는 경계론(境界論)을 통해 삶의 궁극적 목표를 제시했다. 결론적으로, 풍유란의 철학을 평가해보자면 중국 전통이 세계 철학의 논리적 담론에 참여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마련해준 것이다.
펑유란은 형이상학을 배격하고 실용주의를 주창했던 스승 후스와 정반대의 철학적 노선을 걸으며 20세기 중국 철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그는 제자백가부터 성리학에 이르기까지 중국 사상의 논리적 깊이를 세계적으로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9년 이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 속에서 중국 본토에 남아 이데올로기의 압력에 적응해야 하는 학자의 고난을 겪었다. 그는 마르크시즘 하에서 자신의 사상을 방어하기 위해 추상적 계승법을 제시하는 등 전통 보존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의 철학적 과제인 보편과 경험의 종합 문제는 제자들인 리쩌허우와 천라이의 첨예한 논쟁으로 이어지며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펑유란은 격변하는 근현대사 속에서 전통과 현대, 그리고 동양과 서양을 잇는 가교 역할을 수행한 중국 철학계의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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