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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학일기

폭력과 비폭력 사이 십자가가 보일 때

미로슬라브 볼프_배제와 포용 6장, 7장

by 낭만민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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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마지막 시간을 향해서 가고 있다. 요즘들어서 계속 공부한 것만 올리고 있다. 월요일은 볼프의 책으로, 화요일은 에밀브레이어의 서양철학사 수업으로, 목요일은 튜터십칼리지로, 일요일은 중국현대철학으로 계속해서 공부하고 강의하고 있다. 월요일은 신림동까지 와야하는데 가장 힘든 시간이다. 집에서 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듣고 보고 토론하는 시간이 귀중하기는 하다. 오늘은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용』 6장과 7장을 이어서 다룬다. 배제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정의와 비폭력의 신학적 기초로 다시 들어가서 ‘기만과 진실’을 다룬다. 여기서의 소재는 ’기억‘이다. 잘 기억하기를 통해서 기만당하지 않고 자신도 기만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의 기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조지오엘은 1984에서 “미래를 위해 혹은 과거를 위해, 생각의 자유가 있고 사람들이 서로 다르지만 홀로살아가지 않는 시대를 위해, 진실이 존재하고 이미 벌어진 일을 없앴던 일로 만들 수 없는 시댈르 위해”라고 강조한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내러티브를 발견하는 것이고, 또한 스스로 현재의 생각에 기만당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더 나아가 가해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기만을 기억하여 그들을 용서할 것인지 말지를 구원시키는 것이다. 볼프의 특이한 점은 이렇게 기존의 언어를 다른 관점에서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기억’이 그렇고 ‘기만’이 그렇다. 오늘은 7장까지 다루겠지만 주요한 개념들을 중심으로 볼프의 이야기의 끝까지 가 볼 것이다.


오늘도 신림동을 향해서 가고 있다


1. 과거를 위한 축배 “과거를 위하여”


볼프는 기억의 의무를 강조한다. 엘리비젤이 했던 이야기를 기억한다. 1987년 나치 클라우스 바르비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 증인으로 나온 비젤은 “이 재판은 정의를 세우기 위해 이루어졌지만 기억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해야합니다”라면서 “기억이 없는 정의는 불완전한 정의, 거짓되고 불의한 정의입니다. 아우슈비츠가 절대적인 범죄인 것과 마찬가지로 망각한느 것은 절대적인 불의일 것입니다. 망각한다는 것은 곧 원수가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기억을 지우라. 그러면 가해자 의 손에서 피를 씻어 주는 셈이다"라고 경고하며, 악행에 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은 이미 벌어진 일을 벌어지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미래의 가해자들을 면책으로 유혹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역으로 악행을 기억하는 것은 미래 악행에 대한 방벽을 세우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듯,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의 고통을 기억할 의무를 진다.


억압의 상황에서 기만과 억압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볼프는 "당신이 억압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기만을 통해 당신의 죄를 은폐하려 할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기만의 덮개를 제거할 때 억압은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벌거벗고 드러나게 되며, 이는 "비밀이 없이는 권력이 작동할 수 없다"는 통찰로 이어진다. 따라서 지금 상황이 어떤지 크게 외치는 것은 압제당하는 이들에게는 위험하지만 강력한 해방의 행위가 된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기억도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인류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삶의 의미를 준다. 우리에게 기억은 선물이다. 망각이 선물이듯이 기억도 선물이다. 우리는 어떻게 선물을 사용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지금은 누군가의 요청으로 혹은 유혹으로 혹은 문화의 언어로 자유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자신을 기만하고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는 방식으로.


그래서 볼프는 진리의 문제로 넘어간다. 볼프는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지식은 유한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관심에 의해 형성되며, 문화와 전통을 통해 걸러진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사실이나 완벽하게 명료한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볼프는 진리가 계시되는 것이 아닌 "생산되어 지고 구성되고 덮어 씌워진다"는 푸코의 통찰을 인용하며,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권력을 바르게 행사 하기를 원해야 한다는 주장에 주목한다. 그래서 푸코가 말한대로 권력이 만들어낸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결국 이중보기를 다시 꺼낸다.


얀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

얀 아스만의 문화적 기억(Cultural Memory)은 한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과거를 선별적으로 재구성하고 제도적으로 전승하는 집단 기억 체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일상적인 구술 소통에 의존하며 수명이 짧은 의사소통적 기억(Communicative Memory)과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수천 년에 걸쳐 지속되는 장기 기억인 것입니다.

문화적 기억의 핵심 특성은 객관화(Objectification)에 있습니다. 문화적 기억은 단순한 정신적 잔상이 아니라, 경전, 기념비, 예술 작품, 텍스트와 같은 외부의 물리적 또는 상징적 매체를 통해 저장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객관화 과정을 거쳐 기억은 개인의 생물학적 생명을 넘어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문화적 기억은 조직화 및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의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이 기억은 개인이 아닌 국가, 종교 기관, 교육 제도와 같은 전문적인 기관과 사제, 서기관 등의 전문가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유지되고 해석되며, 세대 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전수되는 것입니다.

이 기억은 규범성(Normativity)을 지니는 것입니다. 문화적 기억의 내용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 나열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원 신화나 운명적인 사건을 '기억의 고정점(Fixed Points of Memory)'으로 삼아 저장되며, 이는 곧 공동체가 따라야 할 가치, 윤리, 행위의 기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문화적 기억은 선택적이며 재구성적(Reconstructive)입니다. 과거의 모든 사실을 기억하려 하지 않고, 현재의 공동체 정체성과 목표에 부합하는 사건이나 인물만을 골라 상징화하고 의미를 부여하여 지속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과거는 현재의 필요에 의해 끊임없이 편집되는 것입니다.

문화적 기억은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는 '역사학(History)'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 전체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려 하지만, 문화적 기억의 목적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연속성을 부여하는 기념적(Commemorative) 역할에 집중되는 것입니다.


모리스 알브바슈의 기억과 역사

모리스 알바슈(Maurice Halbwachs)는 기억(집단 기억)과 역사(History)를 근본적으로 구별하며, 이 둘은 서로 다른 사회적 틀과 기능을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알바슈에게 있어 집단 기억은 특정 사회 집단(가족, 종교 등)의 '사회적 틀(Cadres Sociaux)' 안에서만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 중심적이며, 과거와 현재를 연속적인 하나의 흐름으로 인식하면서 집단의 정체성과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봉사하는 '살아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반면, 알바슈가 정의한 역사는 기억이 끊어지거나 희미해진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역사는 특정 집단의 틀에 갇히지 않고, 보편적이고 총체적인 과거의 재구성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과거 그 자체를 지향하며, 생생한 경험 대신 문서나 기록에 의존하는 인공적인 구성물로, 주로 역사가라는 전문가 집단에 의해 다루어지고 기록 보관소 같은 전문 기관에 보관되는 것입니다.

기억과 역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연속성과 단절에 있는 것입니다. 기억은 집단의 정체성을 위해 과거의 사건들을 선택적이고 편향적으로 다루며,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연결되어 생동감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를 현재의 집단적 맥락에서 분리하여 단절된 독립적인 영역으로 취급하며, 기록과 증거를 통해 과거를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려 시도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알바슈는 집단 기억이 사라질 때 비로소 역사가 시작된다는 관점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기억은 특정 집단의 필요에 따른 정체성 유지를 목적으로 하지만, 역사는 집단의 틀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진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 둘은 본질적으로 상호 보완적이 아닌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는 것입니다.




2. 정의로운 지식을 향한 '이중적 보기'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진리를 알 수밖에 없다. 볼프는 근대적인 합리적 관료적 문명이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했음을 지적하며, "중립적 입장 이 존재하는 그들이 가정은 틀렸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절대적 객관성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정의로운 지식에 도달할 수 있을까? 볼프는 '이중적 보기(Double Vision)'라는 윤리적 실천을 제안한다. 그는 "우리는 거기로부터 그리고 여기로부터 세계를 바라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거기로부터 바라보기'는 억압받는 타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며, 이 이중적 보기야말로 타자성을 약화시키지 않고 그들이 자신의 입장을 지키도록 허용하는 방식이다.


이 이중적 보기의 실천을 위해 우리는 네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자신의 외부로 걸어 나가야" 한다. 둘째,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 "잠시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상상력을 발휘해서 타자들의 관점이 그들에게는 설득력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낯설고 심지어 모욕적일 수 있음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포함한다. 셋째, 우리는 타자를 우리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여 거기로부터의 관점과 여기로부터의 관점을 비교하고 대조한다. 넷째, 이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볼프는 "어떤 판단도 최종적 이어서는 안 되며 움직임은 중지시켜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진리 추구는 습관과 실천의 문제이며, 진리에 복종하려는 의지가 없다면 진리에 대한 의지는 유지될 수 없다. 이것을 조금 더 자세하게 보자.


자신의 외부로 걸어 나가기는 타자의 관점으로 들어가기 위한 윤리적 준비 단계이다. 이는 자신의 관점(여기)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을 깨닫고, 인간이 피조물이며 특정한 상황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신의 외부로 "잠시" 걸어 나감으로써, 자신만의 관점에 갇혀 객관적인 척하는 "절대적 자기 초월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핵심이다. 둘째, 타자의 세계로 들어가 잠시 살기는 윤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 타자의 세계로 진입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귀를 열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들어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타자의 관점이 우리에게는 낯설고 모욕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관점이 왜 그들에게 그토록 설득력이 있는지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셋째, 타자를 우리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기는 타자의 관점을 다시 자신의 세계로 가지고 와서 성찰하는 단계이다. '거기로부터'의 관점과 '여기'로부터의 관점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고 대조하는 작업을 한다. 볼프는 이 과정이 타자의 관점을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단순히 타협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 혹은 둘 다 부분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넷째, 이 과정을 반복하기는 이중적 보기가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는 과정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자아로부터 타자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움직임'은 중지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판단도 최종적 이어서는 안 된다"는 유연한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 반복을 통해 우리는 자신에 관한 기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자부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포용을 향한 노력을 지속하게 된다.


미셸 푸코가 말하는 파레이시아 (Parrhēsia)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말하는 파레이시아(Parrhēsia)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일반적으로 '진실을 말할 용기' 또는 '솔직함'을 의미하는 철학적 태도이자 윤리적 실천이다. 푸코는 후기 강연에서 이 개념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개인이 권력이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말하는 행위가 지닌 의미와 가치에 주목하였다. 파레이시아는 단순한 사실의 진술을 넘어, 말하는 자와 진실 사이의 위험하고 윤리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파레이시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의 핵심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솔직함(Frankness)으로, 말하는 이가 자신의 내면적 신념과 말의 내용 사이에 괴리가 없어야 한다. 둘째, 진실(Truth)로, 말하는 이가 그것을 진실로 여기고 용기 있게 선포하기 때문에 진실의 권위를 얻는다. 셋째, 위험(Danger)으로, 진실을 말함으로써 말하는 이가 청중의 분노, 벌칙, 추방, 심지어 죽음까지 감수해야 하며, 이 위험이 파레이시아를 단순한 의견 표명과 구별 짓는다. 넷째, 비판(Criticism)으로, 듣는 이의 믿음이나 행동의 오류를 지적하여 변화를 촉구하는 윤리적 기능을 수행한다. 다섯째, 의무(Duty)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이익 추구가 아닌 자신을 향한 윤리적 책임의 문제로 간주되어야 한다.

푸코는 파레이시아를 단순히 고대 역사 연구로만 다루지 않았는데, 이는 현대 사회에서 주체(Subject)가 권력에 맞서 자신을 형성하는 윤리적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파레이시아는 주체가 지배적인 권력의 담론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진실의 관계"를 수립할 때 발휘하는 용기(courage)의 한 형태이다. 특히 소크라테스는 권력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가르침을 굽히지 않은 파레이시아의 대표적인 인물로, 푸코는 이 개념이 정치적 권리에서 자신을 돌보는 일(care of the self)과 연결된 윤리적 실천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분석한다.


미로슬라브 볼프가 말하는 ‘진리의 체제들(Regimes of Truth)’은 단순히 사실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집단의 권력과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구성된 편향된 지식 구조를 의미한다. 갈등 상황에 놓인 집단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타자를 배제하기 위해 저마다의 유리한 사실만을 엮어 견고한 논리를 구축한다. 이 체제 안에서 진실은 권력의 시녀가 되어, "우리는 선하고 무고하며, 그들은 악하고 부당하다"는 이분법적 도식을 강화하는 무기로 작동한다. 이러한 진리의 체제가 위험한 이유는 주관적인 해석을 마치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위장하여 소통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신의 시각을 절대화할 때, 상대방의 주장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거짓이나 악의적인 선동으로 치부된다. 볼프는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과 동일시하는 이러한 태도를 일종의 우상숭배로 규정하며, 이것이 결국 타자에 대한 폭력을 도덕적 의무로 둔갑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고 비판한다.


따라서 이 폐쇄적인 체제를 깨뜨리고 화해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리가 불완전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함과 '이중의 시각(double vision)'이 필수적이다. 이중의 시각이란 자신의 눈뿐만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눈으로 상황을 바라보려는 의지적인 노력이다. 나의 진리 체제에 타자의 목소리가 들어올 틈을 내어주고, 십자가의 빛 아래서 나의 편향된 정의를 심판받게 할 때 비로소 배제의 벽은 허물어지고 진실한 만남이 시작된다. 이중적 시각이 처음에도 나오고 6장에서도 나오는데 서로 조금씩 다르다. 그러나 그 개념은 같다. 자신에게서 거리두기와 그 사람에게 거리두기이다.


거리두기의 이중적 관점

자기 관점 밖으로의 탈피와 공감의 훈련 : 이중의 시각은 내가 구축한 진리의 방패, 즉 ‘단일 시각’을 해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볼프는 인간이 자신의 고통과 억울함에만 집중할 때 타자의 고통이나 자신의 죄는 외면하게 되는 편향성을 극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중의 시각은 의지적으로 자신의 관점 밖으로 나아가는 상상력의 행위이다. 이는 가해자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두려움과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나아가 피해자의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며 나의 기만적인 요소들을 포착하려 애쓰는 윤리적 자세이다. 이 과정을 통해 나의 주관적 진실이 불완전함을 겸허히 인정하게 된다.

두 가지 렌즈, 타자와 십자가 : 이중의 시각은 두 가지 중요한 렌즈를 통해 작동한다. 첫 번째 렌즈는 ‘타자의 시각’이다. 이는 내가 배제했던 타자가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지, 그들의 고통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그들이 나의 행위를 어떻게 비난하는지를 경청하는 것이다. 두 번째 렌즈는 ‘십자가의 시각’이다. 볼프에게 십자가는 단순한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죄와 불의를 비추는 궁극적인 진리의 기준이 된다. 십자가의 빛 아래서 우리는 자신을 신성시하던 오만함을 버리고, 나 역시 구원이 필요한 죄인이며 동시에 타자를 배제했던 가해자임을 자각하게 된다. 십자가의 시각은 타자의 주장에 무조건 동의하는 상대주의로 빠지지 않도록 진리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포용을 위한 공간 만들기 : 이중의 시각을 실천하는 것은 자기 보호를 위한 방어막을 자발적으로 해체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화해와 포용을 위한 내적 공간이 마련된다. 자신의 시각과 타자의 시각, 그리고 하나님의 시각을 통합하려는 노력은 나의 진리 체제를 유연하게 만들며, 나를 타자에게 열린 취약한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취약성이야말로 상대방에게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고, 내가 상대방을 용서하며, 상처가 치유된 새로운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 따라서 이중의 시각은 볼프가 제시하는 포용의 네 단계(회개, 용서, 공간 만들기, 치유)를 시작하는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다.



3. 십자가에 달리신 이와 백마타고 오는 자


볼프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폭력인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행하시는 폭력인 백마를 탄 자에 관해 살펴본다. 폭력의 질서에 기초를 둔 세계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부활하신 메시아를 붙잡으려 하지만, 기독교인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라가야 함을 명확히 한다.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는 네 가지 방식으로 폭력에 도전한다. 첫째, 십자가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법을 보여준다. 둘째, 십자가는 희생양 기재를 폭로한다. 셋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위한 예수님의 싸움의 일부이다. 넷째, "십자가는 기만과 불의의 사람들을 끌어 안는 하나님 포용 이다." 십자가는 결국 순수하고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불의와 기만의 세상을 바로잡으신 방법이다.


반면, 요한계시록의 백마를 탄 자가 상징하는 하나님의 폭력적 심판은 고통당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구속되기를 거부하는 모든 것에 대한 최종적인 배제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볼프는 하나님이 불의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불의의 공범이 되고 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폭력(심판)을 행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일이며, 이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되게 할 의무"를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칼을 들고 백마 탄 자의 깃발 아래 서서는 안 되며, 비폭력에 대한 헌신이 진리에 대한 헌신을 동반해야 한다. 볼프는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비폭력과 하나님의 복수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한다.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지 않는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라가고 핍박을 받을 때 복수하기를 거부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미로슬라브 볼프에게 빌라도와 예수님의 진리 대조는 권력과 진리가 어떻게 얽히고 대립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사례이다. 빌라도의 진리는 근본적으로 권력에 의해 정의되고 유지되는 진리이다.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지만, 이는 진실을 찾기 위한 신학적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통치 안정과 정치적 안위를 위협하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려는 실용적 질문이었다. 따라서 빌라도에게 진리는 로마의 질서를 보장하는 가이사의 힘이며, 그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진실),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군중의 소요를 막는 권력을 선택하고 진리를 외면하는 냉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이에 반해 예수님의 진리는 비폭력적인 증언에 기반을 둔 진리이며, 진리 자체가 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며, 칼이나 폭력이 아닌 십자가라는 자기희생을 통해 진리를 증언한다. 이 진리는 세상의 폭력적인 '진리의 체제들'을 폭로하고 심판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박해하는 자들까지 포용할 수 있는 근본적인 기반을 제공한다. 예수님은 권력과 결탁한 진리가 아닌, 고난과 사랑을 통해 세상의 거짓을 이기는 진리의 권력을 제시한다.


볼프는 이 두 진리의 충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선택의 기로를 강조한다. 우리는 빌라도처럼 권력의 유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포용은 예수님처럼 가이사의 칼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의 비폭력적 진리를 따르는 데서 시작된다. 이 진리는 타자에 대한 사랑과 공존을 전제하며, 나의 진리를 위해 폭력으로 타자를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의무를 부과한다. 따라서 진정한 기독교적 포용은 이 세상의 모든 권력 중심적 진리 체제를 거부하고 십자가의 진리 안에서 타자를 껴안으려는 의지를 필요로 한다.


폴 리쾨리의 신율과 자율

자율(自律, Autonomy): 윤리적 주체의 능력 : 자율은 현대 윤리학, 특히 칸트적 전통에서 강조되는 개념으로, 행위의 기준을 외부의 권위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입법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리쾨르에게 자율은 윤리적 주체로서의 책임감과 연결된다. 그는 인간이 스스로 선한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책임 있는 행동을 통해 자신의 선한 능력(esteem)을 긍정하는 주체임을 강조한다. 자율은 법을 단순히 따르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좋은 삶을 향해 나아가는 능동적인 행위의 원천이 된다.

신율(神律/他律, Heteronomy): 타자에게서 온 명령. 신율(타율)은 법이 외적인 근원, 즉 신(神)이나 혹은 타자(他者, the Other)로부터 온다는 개념이다. 리쾨르에게 신율은 자율을 위협하는 억압적인 외부 권위가 아니라, 자율이 자기중심적인 독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도덕적 명령으로 기능한다. 신율은 궁극적으로 윤리적 명령이 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요구하고 요청하는 타자의 얼굴에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이 타자, 혹은 신적인 근원은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절대적인 명령을 제시하며, 나의 의지와 욕망을 뛰어넘어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도록 촉구한다.

신율과 자율의 변증법: '받아들여진 자율', 리쾨르는 신율과 자율을 대립시키는 대신, 이 둘이 순환하며 윤리적 실천을 완성하는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고 본다. 진정한 자율은 주체가 스스로를 닫아걸고 독립성을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부터 오는 명령(신율)을 받아들이고 그 명령을 자신의 책임 있는 행위(자율)로 실현하는 데 있다. 즉, 타자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신율), 이 요구를 내면화하고 자발적으로 실천할 때(자율), 비로소 '받아들여진 자율(received autonomy)'이 완성된다. 신율은 자율의 조건이자 촉매제이며, 이 변증법을 통해 인간의 윤리는 자기만의 성찰을 넘어 타자에 대한 사랑과 정의로 확장된다.


진실성과 포용

진실성: 기만적 기억의 해체, 진정한 포용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성을 확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볼프에게 타자를 배제하는 모든 행위의 근원은 종종 자신이 무고한 피해자라는 기만적인 기억('진리의 체제')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성은 바로 나의 기억이 얼마나 편향되고 자기 방어적인지, 내가 가해자일 수도 있는 측면을 얼마나 의도적으로 외면했는지 인정하는 용기 있는 행위이다. 자신을 절대적인 피해자로만 규정하는 한, 타자의 진실을 수용하거나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공간은 결코 마련되지 않으며, 이것이 곧 포용의 벽이 된다.

진실성: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이중 시각, 진실성은 단순한 내적 성찰을 넘어 윤리적 실천을 요구하며, 이는 '이중의 시각'을 갖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진실한 주체는 자신의 진리 체제 밖으로 나와 타자의 고통뿐만 아니라, 타자의 눈에 비친 자신의 죄와 편향성까지도 정직하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자기 직면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절대화하던 '진리의 체제'는 무너지며, 타자가 나에게 요구하는 정의와 사랑의 명령(리쾨르의 신율과 유사함)에 진정으로 응답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자율을 회복한다. 즉, 진실성은 포용을 위한 주체의 윤리적 능력이다.

진실성: 포용의 문을 여는 열쇠, 궁극적으로 진실성은 포용의 가능성을 여는 문이 된다. 진실성이 확보될 때, 과거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는 회개가 가능해지며, 타인의 죄에 대해 새로운 관계를 선언하는 용서가 의미를 갖는다. 진실한 주체는 자기 방어라는 갑옷을 벗어 던지고, 상대방이 들어와 쉴 수 있도록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드는' 취약한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진실성은 포용이 감정적 화해가 아니라, 진리를 기반으로 한 고통스럽고 윤리적인 정의의 과정임을 입증하는 핵심적인 덕목이 된다.



4. 누군가를 살리고 우리도 사는 방법


볼프는 예수님과 빌라도의 만남을 통해 진리와 권력의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유대 지도자와 빌라도는 권력을 진리 위에 두며 자신을 옹호했지만, 예수님은 "진리를 자신 위에 두며 죽음 을 선택함으로써 진리를 살리고 생명을 살리게 되었다." 이 만남의 첫 번째 함의는 "나 자신의 자아보다 진리가 중요하다는 불편한 통찰"이다. 그러나 이 통찰은 두 번째 함의로 보완된다. 바로 "타자 의자 않은 나의 진리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볼프는 비록 나는 진리를 위해 기꺼이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하지만, "나의 진리의 재단을 타자를 희생 제물로 바쳐서 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진리를 주장하시는 예수님조차도 자신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기를 거부하셨다.


이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과 연결된다. 예수님이 선포하러 오신 진리의 나라는 "자유의 나라 이기 때문에 폭력이라는 기둥 위에 놓일 수 없고" 비폭력에 대한 헌신이 진리에 대한 헌신의 동반되어야 한다. 이 자유는 우리 자신의 진리를 만들어 타인에게 강요하는 대신, 자아로부터 타자로 그리고 다시 자아로 돌아오는 여행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정의를 확신하고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려는 보복하지 않는 값비싼 행동들은 연약한 열매가 자랄 수 있는 씨앗이 된다. 그 열매가 바로 오순절 평화이다. 오순절 평화는 "서로 다른 문화적 공간 에서 온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고 서로의 물건을 공유하는 평화"를 의미한다. 이 비전이야말로 브루와 파괴로부터 해방된 세상, 공포가 아니라 평화가 마지막 말이 되는 세상에 대한 비전이다.


볼프의 ‘배제와 포용‘ 6장과 7장은 정의와 비폭력의 토대 위에서만 진정한 포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실을 외치고 악행을 기억하는 것은 억압의 구조를 해체하는 필수적인 윤리적 의무이다. 또한, 자신의 관점만이 아닌 타자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는 이중적 보기의 실천은 편향된 지식으로부터 벗어나 정의에 다가가는 길을 연다. 궁극적으로 기독교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를 따르는 비폭력적 헌신을 통해 복수심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심판과 복수는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며, 이로써 용서와 화해로 나아갈 영적인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볼프가 제시하는 최종적인 화해는 정의와 사랑의 통합이며, 이는 차이 속에서도 서로를 환대하고 재산을 공유하는 오순절적 평화 공동체의 비전으로 완성된다.


포용의 4단계: 폭력의 고리 끊기

회개 (Repentance) : 회개는 악순환을 끊는 가장 핵심적인 첫 단추이다. 이는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구축했던 '진리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기 자신의 죄와 과오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행위이다. 피해자도 자신이 복수의 주체가 되려 했거나, 폭력의 구조에 무의식적으로 공모했던 부분을 인정할 때 진정한 회개가 시작된다. 이 과정을 통해 진실성이 확보되며, 악순환을 지속시키려 했던 자기 방어적 기만이 해체된다.

용서 (Forgiveness) : 용서는 폭력의 악순환을 깨는 결정적인 단절이다. 이는 가해자의 죄를 눈감아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 맺어진 과거의 채무 관계와 속박으로부터 가해자를 해방시키겠다고 선언하는 의지적인 행위이다. 용서는 피해자 자신이 과거의 고통에 묶여 증오와 복수를 대물림하는 고통의 주체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자기 해방이다. 용서는 타인의 변화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관계의 새로운 시작을 선언하는 힘이다.

공간 만들기 (Making Space) : 공간 만들기는 포용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단계이며, 관계의 재구축을 의미한다. 이는 물리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상대를 다시 나의 삶과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 함께 공존할 여백을 마련하는 것이다. 가해자에게는 자신의 죄를 씻고 변화할 수 있는 회복의 공간을 제공하고, 피해자에게는 안전을 확보하며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자율적인 영역을 보장하는 복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용서가 현실로 이어진다.

치유와 새 생명 (Healing and New Life) : 마지막 단계인 치유와 새 생명은 폭력의 악순환이 완전히 종식된 결과이자 목표이다. 이는 과거의 상처가 완전히 아물어 더 이상 증오나 복수를 낳는 근원이 되지 않는 상태이다. 피해자와 가해자였던 이들이 과거의 정체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로 재탄생하며, 공동체 안에서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종말론적 희망의 상태이다. 이 상태는 '망각을 위한 기억'을 통해 이루어지며,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되 그 기억이 더 이상 폭력적인 힘을 갖지 않도록 한다.


르네지라르의 희생양이론의 작동과 배제

모방적 위기와 집단 폭력의 전이 : 지라르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모방적(Mimetic)이다. 우리는 타자가 원하는 것을 욕망하며, 이 모방적인 욕망이 끝없이 증폭될 때 사회는 모방적 위기(Mimetic Crisis)에 빠진다. 이 위기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적이 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공동체가 붕괴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극심한 혼란과 폭력 속에서 공동체는 무의식적으로 희생양 메커니즘을 발동한다. 즉, 모든 폭력의 원인을 단 한 명의 무고한 개인(희생양)에게 전가하고 그를 향해 집단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희생양 메커니즘과 사회적 배제 : 희생양 메커니즘은 근본적으로 배제를 통해 사회적 질서를 재건하는 방식이다. 희생양은 공동체의 내부적 폭력(분열)을 흡수하고 대신 외부로 추방되거나 살해됨으로써, 공동체는 분열 위기에서 벗어나 일시적인 평화를 되찾는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화합이 희생양의 죽음 덕분에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이 희생양을 두려움과 숭배의 대상(신화와 종교의 기원)으로 삼아 반복적인 폭력을 신성화한다. 즉, 희생양 메커니즘은 폭력의 악순환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질서를 세우지만, 이는 희생양을 영원히 배제하고 그의 희생을 망각하는 기만 위에 세워진 질서이다.

폭로를 통한 포용의 가능성 : 지라르는 이 희생양 메커니즘이 복음(기독교)에 의해 폭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방식대로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복음서는 그가 죄가 없는 무고한 희생양이었음을 증언한다. 이 희생양의 무고함에 대한 폭로는 인류가 수천 년간 질서를 유지해 온 기만적인 메커니즘을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일단 메커니즘이 폭로되면, 공동체는 더 이상 무의식적으로 희생양을 만들 수 없게 되며, 희생양을 희생시키던 과거의 행위가 폭력적인 배제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 폭로가 바로 진정한 포용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윤리적 토대가 된다. 포용은 희생양을 다시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윤리적 결단이기 때문이다.



0. 나오기


10년도 더 전에 볼프를 읽을 때는 ‘거리두기’에만 집중한 것 같다. 상황과 거리를 두고, 상대방하고도 거리를 두고 그 공간에 그리스도와 함께 고민해보는 것. 이것으로 10년동안 볼프를 알고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런데 오늘까지 배제와 포용을 살펴보니 정말로 ‘현실적’이다. 현실적인 고민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할 때는 그리스도가 아닌 적그리스도에 가까울 때가 많다. 단순히 모든 것은 사랑으로 덮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백마탄 왕자‘로 위치지우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해야할까? 어떤 순간에 ’그 사람은 반드시 응징을 받아야해‘라고 하는 나의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가 없는 것을 본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돌이키지 않으면 피해를 받은 순간부터 가해자가 되어 있다. 이러한 감정으로 도덕성을 만들어 내서 다른 사람들의 공격에 대해서 고정관념으로 쳐내거나 방어기제로 대응하기에 바쁘다.


그런데 과연 이게 그리스도가 새롭게 하신 인간의 속성일까?
아닐 것이다.


우리는 가해자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형상으로 아름답게 창조되었다. 그리고 얼마든지 마음을 돌이켜서 희망을 꿈꾸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우리 안에는 그러한 잠재력이 항상 숨쉬고 있다. 마음 속에 가느다란 금이 생기고 거기에 성령의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고, 아니 못하고 점점 벽을 쌓아 놓아서 거대한 성벽들로 이루어진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그 성벽들을 자랑하느라 바쁜 사람들. 내 안에서 드높아진 성벽을 돌아보고 이제는 무너질 때가 되었다고 본다. 방법도 목적도 결국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하려면 매번 우리는 거리를 두고 용서하기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포용하면서 살아야 한다. 볼프의 말처럼 이것은 정말로 사랑이 아니면 안된다. 거리를 두고 그 분의 은혜를 구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오늘도 아주 쉬운 길과 아주 어려운 길이 두 갈래로 길게 뻗어 있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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