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패를 '바깥'이라고 달기로 했다. 큰 흐름의 바깥, 스포트라이트의 바깥이라는 의미려니 여겨졌으면 좋겠다. 주류 혹은 집단 가치의 울타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도전적 의미의 아웃사이더도, 세(勢)에 쫓겨 변두리로 밀려난 주변인도 이 마당의 손님이 될 수 있다. 대개는 사람이겠지만, 공간이나 잊힌 시간, 또 그 시간 속의 이야기도 초대될 것이다.
바깥은 안과 맞버텨야만 서는 단어다. 그래서 경계(境界)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의 경계는 아주 허술하고 느슨할 것이다. 이따금 "어떻게 이게 바깥이야?!"하며 시비 삼고 싶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경계의 경계(警戒)가 삼엄하지 않은 사회, 안과 바깥이 평화롭게 바뀌기도 하고 섞이기도 하는 세상, 아예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마당을 우리는 바란다.
편집국 동료들의 우려 속에 '연재를 시작하며'라는 머리글을 달고 신문에 글을 싣기 시작한 게 지난해 6월이다. 유재석, 강호동 같은 1등의 이름이나 자극적인 몇몇 단어들이라야만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래서 억지로라도 1등 곁에 얼씬거려야 버틸 수 있는 요즘 같은 때에 철없이 웬 바깥이냐는 우려였다. 나도 그 판단이 대체로 그르지 않을 거라 짐작했고,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신문사를 그만두고 18개월 남짓 '딴 짓'을 하다가 여의치 않아 재입사한 직후였다. 복직을 허락하며 내 선배는 매주 한 면씩 써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는데, 부족한 재주에 열의마저 미지근했던 나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 조건에 내용과 질의 단서는 없었다. 그래서 큰 부담 없이 시작했고 대체로 자유롭게 썼다. 그리고 얼마 전, 연재를 끝냈다.(지시를 받는 자리에 있는 자의 화법으로는 '~가 끝났다'라 쓰는 게 옳겠으나, 여기선 '~끝냈다'라 쓰고 싶다.)
말보다 몸짓, 표정에 이끌리는 편이다. 언어의 전개보다 호흡과 침묵의 질감, 말의 몸통보다 말려 있는 꼬리의 양상에 주목한다. 거기서 얼핏 보이는, 말이 덧대거나 누락시킨 다른 층위의 진실을 나는 미쁘게 생각한다. 최근 읽은 다니엘 켈나의 소설『나와 카민스키』의 한 구절 - 진실은 오로지 분위기 속에만 존재하는 거야. 그려진 형태가 아니라 색채 속에. 정확하게 포착된 소실점은 진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 - 에 나는 주저 없이 밑줄을 그었다.
문학은 눌변으로 시작되는 것이라 했던 소설가 이인성의 지적에 나는 수긍한다. "눌변이란 침묵이 최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침묵할 수 없는 자들의 서투름이라고나 할까. 더듬거리는 꼴에도 결국 삶을 사랑하므로 침묵으로 초월하지 못한 자가, 또는 그런 초월을 거부한 자가 침묵하듯 말하는 방식…."(『식물성의 저항』에서)
'바깥'에서 만난 이들의, 말과 세상살이의 어눌함이 나의 둔함을 감싸고 이끌어 이 연재가 이어져왔다. 그들을 찾고 또 만나러 다니면서 나는 꽤 오래전부터 '꿈'이라는 단 하나의 단어를 만지작거리곤 했다. 그들은 꿈을 꾸는 이들이었고, 나는 그 꿈을 엿보며 멋대로 해몽이란 걸 한 셈이다. 그리고 이따금은 그들의 꿈 뒤에 숨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꾸고 싶은 꿈 이야기를 하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켈트 신화의 후예들이 전해온 민요의 한 구절 -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멀리 있는 이들은 끝내 꿈꾸는 자일 수밖에 없어요 - 을 흥얼거리고 있다. '그들'의 꿈과 '나'의 꿈이 겹치는 공간, 우리의 이니스프리가 하늘처럼 넓고 푸르렀으면 좋겠다. (후략)
-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최윤필, pp.5-8 '책머리에' 에서 -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93905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