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ywright로서의 극작가
저는 연극을 시작한 후 창작보다는 각색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관객 여러분께 제 이름을 알리게 된 것도 각색한 작품을 통해서였지요. 이제 보통 제 이름 앞에 ‘극작가’라는 말이 따라 붙게 되었습니다. 극작가는 영어로 ‘playwright’라고 씁니다. ‘writer’가 아니라 ‘wright’지요. ‘wright’는 수공업적 기술, 그러한 기술을 지닌 장인(匠人)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shipwright’라고 하면 배를 짓는 기술자, ‘wheelwright’라고 하면 바퀴를 만드는 장인을 가리키지요. 그러니 ‘playwright’를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자면 희곡장(匠), 희곡공(工) 정도가 될 겁니다. 저는 ‘극작가’라는 말보다는 이 ‘playwright’라는 말이 마음에 듭니다. 왜냐하면 극작가라는 말에서 작가(作家), 즉 무언가 없던 것을 지어내는, 창조해내는 자라는 명칭은 왠지 부담스럽고,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은 점이 있지 않나 싶거든요.
사실 모든 이야기는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것,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들입니다. 자신이 지어내고 있다고 착각할 뿐이지요. 심하게 말하자면, 각색과 창작의 차이란,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의 근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정도인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각색과 창작을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봅니다만 일반적인 시선은 그렇지 못한 것 같더군요. 왠지 각색이라 하면 창작보다는 하급의 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는 좀 우스꽝스런 일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소포클레스도 그렇고 셰익스피어도 뛰어난 각색자들이었죠. <햄릿>도 그렇고 <리어왕>도 그렇고, 셰익스피어가 남긴 명작의 대부분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이야기들을 토대로 빼어나게 ‘각색’한 경우입니다.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지요. 그 사실이 그 작품들의 가치, 그 작가들의 위대함을 손상시키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창작’이란 관념은 환상일 뿐이며, 초역사적이며 보편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특수한 역사의 산물, 20세기 이후 생겨나 널리 퍼진 관념, 다분히 병적인 강박관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해, 20세기에 들어서 예술가들은 시장에 자신들의 작품을 물건으로 내놓고 팔아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 따라서 그 물건의 고유함(uniqueness, originality)을 주장하고 증명해야 했던 상황에서 생겨난 강박관념이 곧 ‘창작’에 대한 집착, 그 반대급부로써 각색에 대한 가치절하로 이어진 것 아닌가 싶습니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어느 에세이에서 이러한 강박관념을 버릴 것을 권유하는데,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중국에 장자(莊子)라는 책이 있는데 전체의 90퍼센트 정도가 인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인용을 통해 저자는 삶과 세계에 대해 깊이 있는 엄청난 책을 썼다. 선대의 유산, 기술적 축적을 받아들여 작업하는 목수는 대성당이라도 지을 수 있지만, 오로지 자기 것만 가지고 일하는 목수는 움막 하나도 짓기 어렵다”
창작이냐, 각색이냐를 따지는 것은 제게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브레히트의 말처럼 창작이라는, 고유성에 대한 강박관념을 버릴 때 우리는 기름진 이야기의 토양, 넘치는 수원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극작가라는, 다소 허황한 명칭보다는 ‘이야기-희곡을 다루는 기술자이자 장인’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playwright’라는 단어가 더 마음에 듭니다.
저는 학교에 나가고는 있지만 수업시간에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는 강의는 많이 하지 않습니다. 사실, 글 쓰는 일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은 학생이 써온 것을 열심히 꼼꼼하게 읽어주는 것, 세심하고 성실한 독자(讀者)가 되어주는 것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저는 제가 세계와 소통하고 있고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타인들과 여전히 불통의 상태에 놓여있고 이해보다는 오해가 많고, 저의 견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편견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저와는 다른 생각과 태도, 다른 시선을 가진 학생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고민과 편견 안에서 그것들을 읽어내려고 최대한 노력합니다.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희곡은 이러한 오해와 불통이 개입될 여지가 많은 장르인 것 같습니다. 희곡은 언어 텍스트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연출과 스태프를 비롯해 수많은 작업자들, 종국에는 배우의 몸 위에서 완성되며, 그 이후에도 관객과의 소통, 수용의 과정을 거쳐야 하니까요. 이러한 어려움은 희곡을 쓰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혼란, 웅성거림, 오해와 불통이야말로 희곡이 지니는 매력의 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체호프를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는데요. 그의 작품 속에서 저는 이러한 혼란, 웅성거림, 오해와 불통을 듣습니다. 그 속에서는 여러 편견들과 다양한 목소리들이 서로 부딪치며 공존합니다. 그 목소리들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어떤 ‘중심의 목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다성적(多聲的, polyphonic) 세계. 현재로서는 제가 구현하고자 하는 희곡의 세계는 그러한 세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배삼식 작가, <극작수업> pp.1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