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불가피하다. 인간이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말과 행동이 형편없는 불량품이기 때문이다. 말이 대개 나의 진정을 실어나르지 못하기 때문이고 행동이 자주 나의 통제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가장 친숙하고 유용해야 할 수단들이 가장 치명적으로 나를 곤경에 빠뜨린다. 왜 우리는 이 모양인가. 개별자의 내면에 ‘세계의 밤’(헤겔)이, 혹은 ‘죽음충동’(프로이트)이 있기 때문이다. 부분 안에 그 부분보다 더 큰 전체가 있다는 역설, 살고자 하는 것 안에 죽고자 하는 의지가 내재하고 있다는 역설 때문이다. (내가 부정해야만 하는 혹은 나를 부정하려 드는 ‘그것’을 독일관념론과 정신분석학에 기대어 자기-관계적 부정성self-relating negativity이라 부를 수 있다.) 덕분에 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 과연 나는 내가 아닌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라캉). 그러니 내 안의 이 심연을 어찌할 것인가. 그것의 존재를 부인하는 일(신경증)은 쉬운 일이고 그것에 삼켜지는 것(분열증)은 참혹한 일이다. 어렵고도 용기 있는 일은 그것과 대면하는 일이다. 그 심연에서 나의, 시스템의, 세계의 ‘진실’을 발굴해내는 일이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나를 바라보겠지만(니체), 그 대치(對峙) 없이는 돌파도 없다. 그것이 시인과 소설가의 일이다.
말은 미끄러지고 행동은 엇나간다. 말에 배반당하기 때문에 다른 말들을 찾아헤매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말들이 실패하는 지점에서 그 실패를 한없이 곱씹는다. 그 치열함이 시인의 시적 발화를 독려한다. 한편 행동이 통제 불능이라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려는 자들이 소설가다. 소설가들은 법과 금기의 틀을 위협하는 선택과 결단의 순간을 창조하고 그 순간이 요구하는 진실을 오래 되새긴다. 그것이 소설가의 서사 구성을 추동한다. 요컨대 문학의 근원적 물음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없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없는가?” 말하자면 나의 진실에 부합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날그날의 효율을 위해 이 질문을 건너뛸 때 우리의 정치, 행정, 사법은 개살구가 되고 만다. 문학이 불가피한 것은 저 질문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문학이라는 제도와 거기서 생산되는 문학 상품들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저 질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갖가지 모험들이 불가피한 것이다. 시적인 발화의 실험과 소설적인 행동의 감행이 불가피한 것이다.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시하는 그 모든 발화들에서 시적인 것이 발생하고,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개시하는 그 모든 행위들에서 소설적인 것이 발생한다.
-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pp.13~14 -
시적인 것, 소설적인 것. 나는 연극이 이 둘의 중간점 내지 모두 포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흔히 연극적 언어라 칭할 정도로 연극에 있어서 말은 일상적 발화와는 구분된다. 대사보다 많은 해설이 동반되는 소설과 달리 연극은 오로지 대사의 형태로 말을 전한다. 그리고 그 안에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을 담아야 한다. 따라서 희곡작가는 시인만큼이나 말을 곱씹어서 살며시 내려놓는다. 연극이 시와 다른 것은 배우라는 존재의 실체적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이는 지문을 통해, 때로는 연출가의 재량을 통해, 때로는 배우의 감정을 통해 구성되고 나타난다. 따라서 희곡작가는 소설가만큼이나 행동의 밑바닥을 들여다봐야 한다. 신형철의 논리에 따르면 연극 역시 불가피하다. 그 안에는 인간의 말과 행동에 대한 고민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연극의 근원적 물음 역시 “나는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고/없고,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없는가?”라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연극과 문학은 본질적으로 동류다. 흔히 창의성이라는 틀에 박혀(이 얼마나 모순적인 일인가!) 새로운 것에 목을 매는 일은 창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이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미끄러지는 것의 원인이 내 안의 심연이고, 그 심연에서 나의, 시스템의, 세계의 ‘진실’을 발굴해내는 것이 연극인의 일이라면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창의성이 아니라 진실성과 진중함일 것이다. 여기서 진실성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과 가식없이 심연을 바라보는 태도다.
이와 더불어 연극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연극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문학과 한 뿌리에서 나와 연극이라는 가지로 뻗어나갈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이다. 이는 연극의 재미이자 존재가치와 연관되는 중요한 사안이다. 창의성은 그 다음이다. 다르게 말할 수 있는 가능성,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쩌면 다르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반드시 진실성과 연극성이 바탕이 되어야 가능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