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바리 넥스랩24 <Tech Insurgency>
인간은 어떤 쪽이든 극단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절벽에 서 있는 물리적 상황에서만이 아니라 가치 수용의 범위, 인지의 범위를 벗어날 것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균형을 잡기 위해 그 반대에 있는 대상을 찾곤 한다. 미래에 대한 장밋빛 환상이나 막연한 두려움이 팽배할 때 우리는 역사를 찾았다. 악습과 적폐가 사회의 전면에 등장할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그린다. 기술만능주의가 대두될 때 우리는 인문학을 찾았고, 인간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졌다.
거버넌스의 위기라고 한다. 테러는 이미 일상이 된 듯하고, 국가보다 더 거대한 주체가 나오기 시작했다. 강력한 민족주의 사상에서 국가를 체감했던 시기와 달리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희미해진 지금의 우리는 국가에 속하면서도 정작 그 실체에 모호함을 느낀다. 이는 인지 범위의 극단이자 내가 살아가는 터전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이고 그 역할은 무엇인가?
국가는 사회적 계약의 산물이라고 한다. 계약이라 함은 구성원들의 필요와 요구에 기반한다. 따라서 구성원들의 필요와 요구가 바뀌면 계약의 산물 역시 그에 맞게 변해야 한다. 작은 정부니 큰 정부니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를 떠나 그 시대에 구성원들의 요구가 반영되어 변화해왔던 것은 아닐까? 지금의 우리는 또다른 변화에 놓여 있다. 인터넷, 모바일, 인공지능… 국가가 통제하기 어려운 수준의 기술세계에 돌입했고, 완벽히 새로운 계층이 출현했다. 이전에 국가가 내게 해주었던 역할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우리는 국가의 새로운 역할을 필요로 하지만, 아직 그 역할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고 국가 역시 그 역할을 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은 거버넌스의 위기라기 보다 변화된 거버넌스에 아직 모두가 적응하지 못한 상황에 가깝지 않을까? 진짜 거버넌스의 위기는 다른 데 있지 않을까?
영화 <프리즌>이 떠올랐다. 영화의 배경인 감옥에는 두 가지 거버넌스가 공존한다. 수감자 정익호(한석규 분)는 실질적 지배자다. 감방이라고 볼 수 없는 곳에 살며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교도관들도 그의 말에 따르며 놀랍게도 마음만 먹으면 감옥 밖으로 나갔다 올 수도 있다. 익호가 거버넌스를 유지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커다란(적어도 감옥의 구성원들에게는) 물질적 혜택과 세심한 배려다. 교도관들에게 뒷돈을 챙겨주고, 명령에 따르는 수감자의 집안 경조사를 챙기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공포다. 그의 말에 따르지 않거나 배신하는 사람에게 자비는 없다. 절단기로 팔을 잘라버리거나, 목을 메달고 자살로 위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달콤한 쪽이든 공포든 피부에 와닿는 방식으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익호의 거버넌스를 '말초적 거버넌스’라고 부를 수 있겠다.
다른 하나의 거버넌스는 교도소장(정웅인 분)과 교도관들로 부터 나온다. 표면상 그들의 거버넌스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 교도소 질서를 유지하고 수감자를 교화시키라는 목적에서 부여받았다. 그러나 실제 모습은 다르다. 앞서 말했듯 감옥의 실질적 지배자는 익호다. 여기서 교도소장과 교도관들의 거버넌스는 익호의 행태를 묵인함으로써 발생한다. 익호가 하는 일을 눈 감아 주거나 도우면서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껍데기 권위도 유지한다. 그들의 거버넌스는 '묵인의 거버넌스’라고 할 수 있겠다.
두 거버넌스는 안정적으로 공존한다. 서로가 견제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가장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상대 거버넌스를 부정하고 무너뜨리는 순간 자신의 거버넌스 역시 위험에 빠진다. 한편으로는 매우 불안정적이기도 하다. 교정국장(이경영 분)이 등장하면서 익호의 거버넌스는 흔들리고, 묵인해왔던 교도소장의 책임이 드러난다(물론 잠깐이지만).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을 수 있을만큼 더 강력한 상대의 등장 혹은 상황의 변화. 이 하나만으로 두 거버넌스의 공존에 파장이 생긴다.
불안정한 안정. Nils Gilman의 글도 영화에 나오는 감옥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plutocrats와 criminals는 '말초적 거버넌스’를 실행한다.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주고 체감할 수 있는 것들을 준다. 그 과정에서 불법과 폭력을 자행하거나, 이익 극대화의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국가는 껍데기 권위는 인정해주지만 몇몇 역할 빼고는 그만한 가치가 없다.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이 들이닥쳤을 때 익호가 외친다. "여긴 내 구역이야! 내가 만든 세상이야, 아무도 못 건드려!" 국가는 적절한 선에서 '묵인의 거버넌스’를 실행한다. 그게 국가 혹은 정부의 유지와 이익에 도움이 된다. 이 세계는 그렇게 돌아간다. 불안정하게 안정적으로.
이렇듯 거버넌스는 국가 단위에만 적용되는 개념이 아니라 범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가 마주하는 다양한 조직과 사회 모든 곳에 녹아 있다. 사실 거시 세계의 담론은 체감하기도,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기도 어렵다. 거버넌스의 근원을 '아래에서 위로의 흐름’으로 본다면 일상에 가장 맞닿아 있는 곳에서의 거버넌스가 핵심 중의 핵심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도 거버넌스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상하체계에 따른 흐름을 따르기 바쁘고, 리더의 자리에 있을 때는 상하체계를 공고히 하기 마련이다. 이는 그 누구의 탓도 아니다. 거대한 조직에서 개인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이며, 자신이 해야할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왜 이럴까? 정작 우리는 일상에서의 거버넌스를 학습하고 경험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부모님의 말에 무조건 따르기를 강요받고, "어른"이라는 지위만으로 논쟁은 일축된다. 선생님들은 말 잘듣는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공부 외 활동은 직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된다.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가정과 학교에서 거버넌스를 학습하고 경험할 길이 없는데 대체 어떤 기회로 거버넌스를 사회화할 수 있을까? 불매운동이 실패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소비자로서의 거버넌스가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는 아닐까?
결국 진짜 거버넌스의 위기는 일상에서의 거버넌스가 무너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국가의 역할이니 기술의 발달이니 하는 쟁점을 논하는 것은 뼈대 없이 외벽을 디자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은 일상의 거버넌스를 굳건히 하는 일이다.
#What We're Reading
1. The Twin Insurgency by NILS GILMAN
http://www.the-american-interest.com/2014/06/15/the-twin-insurgency/
2. Building A People First Community, A Response to Mark Zuckerberg
https://medium.com/@getongab/building-a-people-first-community-ff97a97f21e9#.3520zgpzr
3. Deleting Uber is the least you can do
https://medium.com/@dhh/deleting-uber-is-the-least-you-can-do-30c0601103ea#.k3d8gxim5
#트레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