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해둔 일정을 드디어 소화했다.
계획이란 게 없는 여행이었지만 그 날에만 볼 수 있는 것들은 웬만하면 보려는 편이다. 이번 여행에선 마우어파크 플리마켓이 몇 안 되는 계획 중 하나였다. 베를린에 여행을 간다고 하니 모든 친구들은 나에게 일요일에 열리는 마우어파크 플리마켓에 가보라고 했다. 평소에도 여행지에서 플리마켓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터라 꼭 가보고 싶었다. 여행 온지는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날씨는 늦여름-초가을로 거꾸로 돌아갔다. 반팔만 입고 다녀도 괜찮은 날씨. 그냥 동네에 있을까 하다 아니다 싶어 지하철을 타고 마우어파크로 향했다.
마우어파크가 근접한 U반 8호선 Bernauer Straße 역에 내렸다. 어떤 방향으로 나가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모든 사람들이 한 방향을 향해 나갔다. 분명 이 길로 따라가면 마우어파크가 나올 것이다. 5분도 채 걷지 않아 마우어파크 입구에 도착했다. 공원 반대쪽 차고지 같은 곳도 플리마켓으로 바뀌어 있었고, 공원 입구 쪽으로 건너가니 엄청난 활력이 느껴졌다. 축제다. 이곳은 매주 일요일마다 축제처럼 벼룩시장이 열리나 보다. 누군가와 함께 왔더라면 돗자리도 펴놓고 맥주도 마시고 더 신나게 즐겼을 텐데, 좋은 걸 볼 때면 아쉬운 마음도 함께 든다. 혼자 여행할 때 드는 어쩔 수 없는 양가감정이다.
플리마켓의 규모는 상당히 컸고, 종류도 다양했다. 옷부터, 레코드판, 그릇, 포스터, 조명, 전화기 등 그냥 우리가 살면서 필요한 모든 잡동사니가 다 있었다. 설마 이걸 파는 거야? 싶은 말도 안 되는 낡은 것들도 있었고, 신진 작가들의 디자이너 제품들도 많았다. 세계의 먹거리도 한가득이었는데 한국 음식을 파는 푸드트럭도 봐서 괜히 반가웠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김치부침개를 줄 서서 사고 있었다.
막상 무얼 살까 보려니까 또 사라진 돈이 생각났다. 이미 떠난 것에 대하여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행동으로 잘 옮겨지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LP판에 달려들어 이것저것을 샀을 텐데 멀리서만 바라보았다. 가까이 가면 사고 싶을 것 같았다. 그래도 4장에 10유로면 달려들었어야 했는데, 언젠가 또 살 기회가 있겠지.
공원 한편에는 버스킹 공연이 한창이었다. 얼마 전 <비긴어게인3>에서 보았던 그 장소였다. 방송 화면으로도 자유분방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는데 직접 보니 더 신기했다. 버스킹 하는 뮤지션이 자리를 잡으면 그 주위로 동그랗게 사람들이 둘러앉고 그곳은 곧 무대가 된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앉아서 즐기거나 휴대폰으로 촬영을 하거나 혹은 흥을 주체 못 하고 무대 가까이로 나와 춤을 춘다. 춤을 추는 사람들 또한 또 다른 무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느낄 수 있다는 것. 나도 워낙 남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사람인 터라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
바람이 부는 대로, 햇살이 비추는대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느껴볼 것. 억지로 애쓰지 말 것. 해도 안 되는 건 안되나 보다 그냥 흘려보내 볼 것. 오늘 마우어파크가 나에게 준 자유의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