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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희 Mar 29. 2021

화분

새벽 단편: 화분



엄마가 죽었다.

장례를 치르고 집에 오니 오랜만에 온 집은 어딘가 휑했다.

냉장고도 장농도, 엄마가 채워놓은 반찬이며, 기워놓은 이불로 꽉꽉 차있는데 이상하게 집이 썰렁했다. 아마도 엄마가 없어서겠지.


제일 어색한 곳은 베란다였다.

베란다는 엄마가 애지중지하며 가꾸던 온갖 화분들로 가득했다.

이름모를 풀들이 주인을 기다리듯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 오면, 엄마는 늘 베란다에서 인사하곤 했다.

“어 그래 니 왔나”

“엄마 또 화분 샀어?”

“사기는, 요 앞 화단에 누가 다 죽어가는 걸 내비뒀길래 거둬왔다. 죽지도 않은 거 버리면 우짜노 아까워서.”

베란다는 그렇게 엄마가 여기저기서 데려온 화분들로 발 디딜 틈 없이 차있었다.

신기하게도, 말라 비틀어져 죽은 것 같던 식물들도 엄마 손만 거치면 마법처럼 살아났다.

흔해빠진 비유지만서도, 정말이지 마법처럼.

그럴 때는 엄마가 경이롭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엄마는 플로리스트를 꿈꿨다고 했다.

“야 그때는 플로스트? 플로리리스? 뭐 그런 말도 엄섰다. 그냥 꽃 만지고, 풀 만지고 하는 기 좋으니까 생각없이 하고 싶었던 기지.. 그게 뭐 꿈씩이나 되겠나”

말은 그렇게 해도 엄마는 식물 돌보기에 열심이었다.

철마다 분갈이를 하고, 좋은 흙을 찾고, 화분마다 다른 시간대에 물을 챙겨줬다.

저걸 다 언제 하나 싶다가도, 자식들 뒷바라지며 집안일부터 시작해 식물 돌보기까지 해내는 엄마를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결국 엄마 허리 다친다며 화분 돌보는 걸 반대하던 누나도 백기를 들고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는 안마 의자를 사주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그렇게 좋아하던 화분들인데, 마지막엔 제대로 물도 못주고 가네 엄마.


괜히 마음이 짠해져 두 팔을 걷고 물뿌리개를 찾아 물을 잔뜩 담아가지고 나왔다.

자, 뭐부터 얼마나 줘야하는 거지.

엄마가 주는 건 그렇게 자주 봤으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른다는 게 또 마음이 쓰려서 잠시 멈칫했다가, 까짓것 말라죽게 두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물을 주기 시작했다. 화분 흙이 촉촉해질 때마다 왠지 식물들이 목을 축이고 살아나는 것 같아 어느새 진지한 표정으로 집중했다. 총 열 세 개의 크고 작은 화분들을 축이고는 겨우 허리를 펴니 두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제서야 힘이 들었다. 정작 나는 집에 와서 물도 못 마셨네.

냉장고를 열고 물통을 들어 컵에 물을 따르다가, 생각지도 못한 메모에 물통을 그만 놓치고 말았다.

냉장고 구석에는 엄마가 남겨놓은 메모가 있었다.


‘화분 물 주는 법.


문 열자마자 오른쪽에 있는 파란 화분. 유카립투쓰.

겉흑이 말라있으면 아래쪽 화분 밧침으로 물이 나올때까지 충분히 물 주기​

따듯한 기후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니까 햇빛 쪼여주기


왼편에 있는 초록 화분. 해피트리.

일주일에서 열흘 지나면 물 주기. 물을 못 먹다가 먹으면 잎이 상하는데 죽은 것은 아니니 버리지 말고 꼭 살려주기


베란다 창가 쪽 빨간 화분, 스투기.

한 달에 한 번씩 화분에서 물이 빠질 정도로 흠뻑 주기. 자주 돌보아 주지는 않아도 되지만 물 주는 것 잊지 안기. 햇볏 많이 쪼이면 안됨.


...’


그 많은 화분들을 위해 하나하나 손글씨로 물 주는 법을 적어뒀을 엄마의 모습이 선해서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진짜 이 아줌마, 적당히를 모르고 끝까지, 정말 끝까지 놓지 않는구나.

그리고 마지막 장.


“민아야, 민호야. 우리 딸, 아들. 엄마 괜찮다.

엄마가 요새 몸도 안좋고 자꾸 여기저기 고장이 나가지고 아들딸 고생이 많지.

엄마가 이래 누워만 있으니까 생전 없던 시간이 많아가 아들딸 생각이 더 많드라고.

미안타. 아직도 이것저것 챙겨줘야될 게 많은데 엄마가 이래가..

그래도 엄마가 우리 딸, 우리 아들 참 잘 키웠는갑지, 주위 사람들이 다 그러대.

아들딸 잘 키워서 차암 좋겠다고. 그래 맞다, 엄마 참 좋다. 내가 살면서 지금까지 뭐했나 싶다가도, 우리 딸 아들 얼굴 보믄 그래 좋은게 맞다, 내 참 잘 살았지 싶드라.

고맙다, 우리 딸. 우리 아들. 엄마 덕분에 참 행복하다.

민아야, 직장 댕기느라 힘들제. 우리 딸 얼굴 헬쓱해지는 거 보믄 엄마가 마음이 아파가 뭐라도 더 해주고 싶다가도 짐이 될까봐.. 못 그랬다이가. 그게 이제사 참 미안타. 해줄 수 있을 때 해줬어야 하는긴데, 욕을 먹더라도 뭐 하나라도 더 챙겨주껄.. 맴이 안 좋드라. 엄마가 미안데이.

그리고 민호야. 직장 구하러 다니는기 참 쉬운 일이 아니제?

엄마 눈에는 모자란 거 없는 우리 아들, 세상살이 하면서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일 때마다 엄마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더라. 그치만 우야겟노. 그기 다 성장하고 자라는 건데. 엄마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우리 아들 안 굶고 다니게 밥 챙겨주는 거, 그거 하나 아니겟나. 그래서 엄마가 그래 잔소리를 해싼기다. 귀찮았제. 엄마가 더 해줄 수 있는 게 업서가 미안타.

우리 딸, 아들.

엄마가 화분을 이래 돌보다 보믄 말이다, 고 쪼꼬만 풀때기들이 다 저각각 어쩜 그리도 다른지 놀랄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어떤 거는 물을 쪼금씩 자주 줘야 하고, 어떤 거는 한 번에 왕창 주고는 한참을 또 기다려야 카고. 햇볏 쪼아주는 것도 다르고, 꽃 펴는 것도 다 다르더라. 그 작은 풀때기들도 자기 방식이 다 다른데, 사람이라고 안 그렇겠나. 맞제? 그러니까 민호야, 민아야. 다 지나갈 기다. 그리고 또 때가 다 올기다. 그러니까 언제든 포기말고, 혼자 울지말고, 밥 곪지말고, 힘들면 집으로 온나. 엄마가 없어도, 집은 집이어야지 않겠나. 맞제?

내 새끼들, 엄마 없어도 밥 잘 챙기묵고. 아프지 말거라잉.

사랑한다.


-추신. 냉장고에 반찬 해두엇으니 민호 민아 집에 가저가서 먹거라”


엄마.

나 잘 살게. 진짜 잘 살게.

나 포기도 안하고, 울지도 않고, 밥도 잘 챙겨먹고, 힘들면 집으로 올게.

안 힘들어도 집에 올게. 와서 화분 물도 주고, 엄마가 해준 반찬에 밥도 먹고. 그럴게.

그러니까 엄마 이제 걱정말구 좀 쉬어요.

아들 잘 할게. 누나는 이미 잘하고 있으니까. 내가 진짜 잘해볼게.


베란다에 열어둔 문 틈으로 바람이 인다.

화분 위 이파리들이 일제히 흔들린다. 걱정말라는듯이. 알겠다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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