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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희 Mar 29. 2021

새벽 단편: 술


우리는 여기에 있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


마지막 기억이 뭐였는지조차 모르겠어.

흔들리던 불빛에 어딘지 모르겠던 차 안, 술집에서 언제 나온건지도 모르게 금새 쌀쌀해졌던 날씨. 맨살에 바람이 스치면 나를 보호하듯 어깨를 감아안던 네 다섯 손가락. 그럼 난 또 술이 다 깬 것 같다가도 다시 취하고 싶었지.


네가 데려다준 길 끝에서 집에 혼자 들어와서는 조금 울었어.

속이 안 좋기도 했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내 꼴이 우스워서, 내 인생이 엉망이어서, 머릿속이 진창이어서, 그러다가도 마음 저 바닥엔 아직도 무겁게 네가 깔려있는 꼴이 참, 지옥같아서.

그래서 울었어. 속이 안좋기도 했고.


헤어지자거나 다시 만나자거나, 내가 좋다거나 이젠 질렸다거나, 그런 말은 딱히 없었어.

너는 그냥 나를 집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고 싶어했고, 나는 여느때처럼 집에 가기 싫어했을뿐. 이상하게 너랑 있는 밤이면 나는 자꾸 정신을 잃고 싶더라고. 취했다는 핑계로 너를 집에 보내기 싫고. 그걸 들키는 게 싫어서 나는 취한 척을 했다가도 결국에는 웃으면서 현관문을 닫았어.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있었지. 불이 다 꺼진 문가에서 네가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술이 참 그래.

기억하기 싫은 건 지독히도 선명하게 만들고 잊기 싫은 건 자꾸 흐리게 해.

네가 멀어지던 소리가 아직도 생생해. 복도에 울려퍼지던 네 낡은 운동화 소리.

근데 나 이제 니 얼굴이 기억이 안나.

슬펐던 것 같은데, 네 표정은 생각이 안나.

어땠었지, 너도 조금은 울었던가?

생각이 안나.


술이 참 그래.

술이 참,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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