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다이어리
여기서 살아보니 알겠다. 베를린 사람들이 왜 이렇게 해를 찾아다니는지, 왜 해만 나면 공원이고 호수고 나와서 벌러덩 누워있는지. 화창해야 할 5월까지 히트텍을 입고 사니 따뜻한 햇살이 간절하다. 내가 그동안 서울에서 얼마나 날씨 복을 누리고 살았나 감사할 정도다. 기온이 30도가 넘는 요즘은 너도나도 호수로 간다. 큰 쇼핑몰과 호텔을 제외하면 (믿지 못하겠지만) 에어컨 있는 곳이 거의 없다. 카페와 음식점은 물론 지하철에도, 집에도 에어컨이 없다. 바싹 달궈진 거리를 피하는 방법은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는 것뿐이다. 베를린 호숫가에 가면 해수욕장을 방불케 하는 ‘호수욕’이 펼쳐지는 이유다.
특이한 점이라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누워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독일에는 나체의 사람들이 모이는 누드비치나 캠핑장이 유독 많은데,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나체로 선탠을 하고, 책을 읽고, 비치발리볼을 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독일의 나체주의 문화, 에프카카(FKK)다. FKK는 ‘Frei-Körper-Kultur’의 약자로 직역하면 ‘자유로운 몸의 문화’란 뜻이다. 옷을 입지 않은 자연 상태에서 자유를 누리겠다는 문화 운동이다. 시작은 1900년대 초까지 올라간다. 나치 정권 시대에 금지되었다가 동서독으로 분단된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독에서는 다시 국가적으로 장려되었다. 지금도 누드비치는 구 동독지역에 더 많이 남아있다.
베를리너들이 많이 간다는 호수, 크루메랑케를 갈 때도 누드비치를 보았다. 하지만 부러 먼 길을 돌아갔다. 나체로 누워있는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엄두가 안 났다. 누드비치에서 놀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랬던 내가 독일의 나체 문화를 경험한 것은 베를린의 사우나에서였다. 발리의 스파 휴양지를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바발리’ 사우나에서 외국 남녀들의 나체를 마주했다. 말로만 듣던 혼탕 사우나에서 내 눈동자는 눈 둘 데를 찾지 못해 허공을 헤맸다. 신기한 건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몸을 흘깃거리거나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모두가 천하태평일 수 있을까 싶게 느긋했다. 100년이 넘는 독일의 FKK문화와 자연주의에서 이어져온 경험과 개방적 사고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열 개가 넘는 사우나실을 알몸으로 들락거리고, 샤워도 그냥 밖에서 남녀가 같이 줄 서서 기다렸다가 하고, 야외 수영장에서도 알몸으로 수영했다. 다 벗고 있다는 부끄러움도 잠시, 모두가 알몸인 그곳에서 뭔가 원초적 자유로움을 느꼈다. 늘어진 배와 제 각각으로 생긴 허벅지, 팔다리, 가슴, 성기까지 늘어뜨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냥 인간적이었다. 성적인 느낌이나 야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스스로도 놀랐다. 잡지에서 보던 모델 같은 몸매는 그곳에 없었다. 저들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느낌. 걸친 것 하나 없이 몸뚱이만 있는 우린 그저 다 같은 인간이라는 것. 그런 생각이 드니 긴장했던 마음도, 괜히 혼자 신경 쓰이던 남의 눈길도 줄어들었다. 베를린의 여름에 겪어본 최고의 일탈이자 경험이었다.
독일 누드비치와 혼탕 사우나에 대해 물어보는 사람이 많다. 나는 기회가 된다면 한번 경험해보라고 권한다. 그게 원초적 본능에 기인한 것이든, 단순한 호기심이든, 새로운 모험심이든 상관없다. 모든 것에 열려있는 베를린의 한 조각을 만나는 최고의 경험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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