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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띤떵훈 Dec 02. 2023

공장형 글



멋진 신세계에선 포드의 탄생을 기원으로 해를 센다. 포드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함이다. 그것은 대량 생산이다. 컨베이어 벨트에 차량이 오면 노동자는 담당한 역할을 한다. 일이 파편화되고, 전문화되니 효율이 오른다.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가 말한 논지를 포드는 누구보다 잘 이해한 사람이다. 공장에서 정해진 작업을 하고 다음으로 넘긴다. 다음 인부는 본인 일을 하고 다음으로, 그다음 인부로, 다음 인부로. 경쟁업체 보다 빠르게 조립한다. 컨베이어 벨트가 일주를 끝나면 무에서 유가 된다. 지적 설계론이 현실화된다. 이런 고도로 발달한 기계문명의 상징적 존재로 포드가 칭송받게 됐다. 





포드식 생산의 단점이 있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노동자는 노동에서, 노동물에서 소외 당한다. 자신이 맡은 역할이 극단적으로 세분화되었기에 생산물을 만듦에 있어 기여했다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타이어 볼트 조이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이 차를 제가 만들었습니다'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기에 자신이 다루는 부품처럼 자신 또한 대체 가능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다. 미하이 칙센트가 즐겁게 인생 사는 방법을 논하는데, 가치 있는 일을 하라는 내용이 있다. 포드식 공정은 본인의 일의 가치를 재고하게 만든다.





한 블로거의 글을 읽었다. 흡입력이 좋아서 몇 편을 이어 읽었다. 문장을 세심히 고른다. 문단과 부합하는 사진을 고른다. 현실의 어떤 장면에서 생각을 확장한다. 그 장면이 구성되기까지 어떤 요소가 작용을 했고, 그 장면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왜 그런 영향을 받았는지 탐구한다. 문단은 탐구를 끝내고 나서 쓰는 보고서다. 그러니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끝마치고, 결과를 도출한다. 그 결과를 예쁜 포장지에 담아 세상에 보낸다. 글을 소중히 다룬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볼 수 있도록 10개 전후의 태그를 덧붙인다. 애지중지 만든 글이 널리 퍼지길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애플이 본인 제품 한편에 'Designed by Apple in California'라고 인쇄하듯, 시그니처 인사로 마무리한다. 공들인 글에 박수를 보냈다.




공장형 글이다. 내 블로그로 돌아와서 한 생각이다. 최근에 쓴 글 몇 편을 읽었다. 공들인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글을 쓰고 방치한다. 긴 사유 끝에, 오랜 고민 끝에 문장을 고르지 않는다. 내 생각을 예쁜 포장지에 담고자 하지 않는다. 생각을 돋보이게 만드는 예쁜 비유와 상징을 찾지 않는다. 나는 단문을 쓴다. 가장 다루기 쉽기 때문이다. 글 진행이 수월하다. 주어 서술을 맞추기 쉽다. 빠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지 않는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쓴다. 아름다움의 관점에서 두 차이는 크다. 전자는 형식을, 후자는 콘텐츠를 중시한다. 사진으로 말하자면 form과 contents다. 폼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말한다. 콘텐츠는 그곳에 담긴 내용을 말한다. 전자는 직관적인 아름다움을 담당한다. 후자를 중시하는 나는 목적한 내용만 담고 형식(아름다움)을 포기한다. 말하자면 내 글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답지 않은 글을 쓰는 데 불만은 없다. 그만큼 한 의미 덩어리, 그러니까 제목을 가진 글에 큰 애정을 갖지 않는다. 그 사실은 공통된 대제목 '메모'에 드러난다. 취지 또한 아무 때나 부담 없이 쓰자는 것이다. 정성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전제다. 띤떵훈아 내게 네(나)게 원하는 것은 많은 글이야. 뭐가 됐든 안 쓰는 것보다 나아. 일단 써줘. 내가 쓰기 가장 편한 환경을 조성해 줄게. 어떠한 압박도 부담도 없어. 그냥 연습장에 메모 갈겨쓰듯이 휘리릭 펜을 놀리라고. (물론 네 경우엔 자판이겠지만) 쓰고 찢어서 휴지통에 버리는 그런 글을 써. 봐봐 제목이 메모야. 적당한 기분으로 친구 만나서 잡담하듯이 일상을 기술해. 네가 뭐 먹었고, 어떤 사람 만났고, 얼마 벌었고, 뭘 샀는지 말이야. 그런 아름답지 않고 의미도 없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내게 쏟아내라고. 아! 그런 거였어? 그런 얘기라면 내가 잘하지. 그 결과 아름답지 않은 무수히 많은 글이 세상에 나왔다.





내가 생각한 공장형 글의 정의는 이렇다. 실용적인 목적을 갖고, 다소 완결성을 포기한 채, 정해진 형식에서 빠르게 써 내려가는 글이다. 나는 생각 정리와 재미라는 목적을 갖고, 완결성을 포기한 채, 단문으로 순식간에 글을 써 내려간다. 다음 문장! 다음 문장! 다음 문장! 주어와 서술어의 간격을 좁혀 문장을 격파해 나간다. 그야말로 공장형 글을 쓴다. 내 생각을 온전히 파악한 상태로 그에 적합한 표현을 고르기 보다, 최소한의 동선으로 생각을 시각화 시킨다. 아직 명확하지 않은 어떤 감정, 혹은 생각을 쓰면서 풀어낸다. 아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낀 이유가 이거였군. 아 이런 생각 뒤엔 이런 맥락이 있었군. 내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아름다운 글은 명확한 할 말을 보유한 상태에서 노랫말 같은 비유, 혹은 그간 없었던 신선한 비유를 덧씌운다. 나는 할 말을 찾아가며 빠르게 문단을 넘어갈 날카로운 문장을 다룬다. 그것은 단문이고 너덜너덜해진 상투적 표현이다. 상투적 표현은 쓰는 입장에서 편하고, 듣는 입장에서 편하다. 어떤 의도인지 분명하고 친숙하기에 의미 전달이 효율적이다. 





나는 자동차 생산 공정의 노동자가 그러하듯 노동물에서 소외 당한다. 이것은 당신이 쓴 글입니다. 예? 제가 이런 글을 썼었나요? 위와 같은 이유로 내 글은 창작이라 하기 애매한 지점에 있다. 문학적 창작물 혹은 인문학적 창작물이 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과 지식 획득이다. 내 글엔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다. 지식 획득도 불가능하다. 단지 글쓴이(나)가 생각 정리하는 과정과, 일상을 기술한 것이다. 내게는 실리적이지만 읽는 사람 입장에선 얻어 갈 것이 없다. 또한 내 글쓰기 목적은 생각 정리이므로 쓰는 과정에서 원하는 바를 이룬다. 하나의 예쁜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목적이 아니기에 한 번 완성된 글은 쓰임을 (대부분) 잃는다. 글쓰기라는 행위 전반에는 애정이 있으나 내가 밥 먹듯 거의 매일 쓴 글에는 애정이 (거의) 없다. (앞선 두 괄호, 대부분과 거의,는 없어도 성립이 가능하단 의미를 뜻하지만 없어선 안 된다. 이 무쓸모의 쓸모는 희망 한 줌으로 고쳐 쓸 수 있다)





애지중지 다뤄지는 누군가의 글을 본다. 세심함 없이 방치된 글을 본다. 블로그에 모인 수천 편의 글에게 송구스럽다. 공장에 쌓인 재고들이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메모 공장입니다. 위탁 생산 전문이죠. 아, 저희 주문자 띤떵훈 씨 말씀이군요. 저희는 주문받아서 생산했는데, 필요 없다고 안 가져가던대요? 근데 또 주문은 밀려 있죠. 아 그런데 가져갈 생각은 여전히 없다고 하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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